2017.12.10. <창39:20-23. 환경과 무관한 요셉의 형통.>
헨델의 이야기입니다. 불후의 명작 <메시야>가 작곡된 것은 놀랍게도 그의 슬럼프 기간 중이었습니다. 그는 공연도 제대로 못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절망가운데 있는데 어느 시인이 편지 한 통을 보내왔습니다.
"주님은 멸시받았지만 온 세상의 왕이 되어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당신도 힘을 내세요!"
그 편지를 받고 그는 힘을 얻었습니다. 23일간 금식하며 묵상한 후 작곡하게 됐는데 그게 바로 헨델의 메시야입니다. 늘 들어왔던 “환경이 아니라 정신력이고 조건이 아니라 대응자세”입니다.
소생과 부활은 다릅니다. 부활이란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고 시편에서 말하는 소생은 거의 사경을 헤매다가 기진맥진한 영혼이 새 힘 얻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것이고 우리의 영혼은 그 부활의 주님이 소생시켜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소생을 위해서는 거의 죽음직전까지 가는 것이 필요하지만 영광의 부활을 위해서는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새생명, 영원한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영생에 이르도록 주님께서는 죽음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역사상 극형 중 극형이라는 십자가의 무서운 고통을 우리의 죄 값으로 드렸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No pain, no crown. 수고없이 먹은 떡은 반드시 언젠가 그 대가를 요구받을 것이고 상처 없는 영광은 빛이 나질 않습니다. 요셉의 고난은 단순히 그의 부족한 인격과 아버지 야곱의 편애만이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한 참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실행, 즉 하나님의 신실성에서 찾아야 합니다. 인간의 부족과 열악한 환경은 그러므로 구원의 하나님께 붙잡혀 있는 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거치면서 빛나는 보석의 원석제련과정일 뿐입니다.
우리는 뿌리치기 어려운 육신의 유혹을 하나님의 은혜로 잘 이겨낸 요셉에 대하여 잘 압니다. 오늘은 요셉의 고난이 총리대신으로 가는 길목인 동시 이스라엘구원의 출발이라는 말씀의 주제로 우리 삶에 새 힘을 얻는 날이 되기 원합니다. 이 기쁜 주일 아침에 주님주시는 말씀으로 우리 모두의 영혼과 삶이 그리고 몸이 새롭게 태어나길 원합니다. 본문 20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구원의 섭리,..
1. 유혹을 뿌리친 순결과 정직의 대가로 요셉의 옥살이가 시작됩니다.
마른 우물구덩이에 빠진 어린 요셉은 난생 처음 두려운 시간을 통과하며 엄청난 생각을 합니다. 내면이 급격한 변화를 시작한 것입니다. 형들의 동태를 일러바치던 철없는 요셉을 하나님이 크고 급하게 바꾸셔서 보디발 장군 집에 성실하고 정직한 사환이 됩니다. 음녀의 손에서 도망쳐 하나님 앞에 순결을 지킨 결과 억울한 옥살이가 시작됩니다. 사람 생각은 정직한 후에 상급지만 하나님은 멀리 전체를 한눈에 보시고 일을 하십니다. 전7:14절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형통한 날에 사람들은 물론 기뻐하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특별히 돌아보아 경건의 훈련으로 삼고 성숙의 계기로 삼는다면 그 고통의 날들이 유익할 것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고난 앞에 분노대신 성실로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다 보고 계시다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방금 읽은 전도서에서도 인생에 형통과 곤고함이 늘 번갈아 다가오는 것은 사람이 그 장래 일을 알지 못하므로 다만 깨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겸손함으로 주의 평강과 그 나라를 풍성하게 이루시려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상 받을 만한 요셉의 성실함이 상을 받기는커녕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건 가슴을 칠 노릇입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오해가 풀리기 전까지 그는 잠을 못 이룰 것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인의 입장이 돼 본 사람은 요셉의 고통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결백한데 아무도 자기를 믿어주지 않을 때의 답답함을 무엇으로 설명합니까? 그러나 신앙의 힘은 놀랍습니다. 요셉은 2년을 죄 없이 옥에 갇혀 아까운 세월을 억울하게 보내는데 무엇이 2년의 세월을 버티게 했을까?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 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하나님의 동행입니다. 하나님의 동행은 요셉이 처한 환경을 뛰어넘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평온과 고요함, 그리고 당당함이었습니다. 22절입니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2. 주어진 환경에 흔들림 없이 오히려 성실한 요셉과,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 환경에 굴하지 않고 환경을 다스리는 힘은 오직 믿음에 의한 성실뿐입니다. 요셉의 성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넉넉하게 실현된 은혜 중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다스림을 기뻐한다면 현재 환경조차 선하게 사용하실 하나님을 전적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요셉은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자신의 결백과 억울함을 둘 중에 한 사람이 살아남아 왕에게 탄원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살아남아 복직된 술 관원장은 요셉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무려 만 2년 동안 요셉은 암흑 같은 세월을 보냅니다. 소리쳐도 들리지 않는 신음소리, 감당키 어려운 분노와 절망과 억울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감옥살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간수장이 그를 신뢰하여 한번 맡긴 일은 묻지도 않을 정도로 요셉은 성실했습니다. 피해 달아나고 싶은 열악한 환경을 정면으로 맞아 도리어 성실하게 살아가는 요셉은 우물을 통과한 후의 요셉입니다. 마른 우물에 던져지기 이전의 요셉은 얍복강을 건너기 전의 야곱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얍복강에서 생사를 건 기도 후에 바뀐 것처럼 요셉도 형들의 분노로 마른 우물에 던져진 후 그 인격이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운 아버지의 품을 떠난 요셉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기사회생한 자의 감격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2) 평강을 주시고 언약의 실현을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시는 요셉의 하나님이 오늘 여기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21절에서 요셉은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인자를 베풀어주셔서 간수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다고 합니다. 요셉의 하나님동행은 먼저 약속에 기인한 것이었고 그 약속의 실현은 사망의 우물에 던져짐으로 시작돼 결국 굶주리던 70명의 가속을 살려내 200만으로 애급을 나오게 합니다.
요셉의 힘든 여정에 유일한 위로가 되신 하나님은 주변의 신뢰와 모든 일에 형통을 허락하셨습니다. 요셉은 부모형제와 헤어져 있는 힘든 환경과 모든 악조건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최선을 다하면서 견디었는데 이것은 사람이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깊은 사망의 웅덩이는 요셉을 총리요셉으로 만드는 귀한 생명의 샘이었고 그 칠흑 같은 음침한 함정은 막힌 굴이 아니라 출구가 있는 터널이었습니다. 성도에게 답이 없다면 거긴 예수로 열리는 새 길의 시작입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약속을 지킵니다. 사랑은 약속에 죽고 사는 신의와 함께 갑니다. 그 신의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약속을 지킵니다. 우리 좋으신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문에 소돔 고모라에서 롯을 기억하셨고 절망의 구덩이에서 요셉을 건지셨습니다. 그 약속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먼지처럼 사라질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언약성취를 위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고 보호하시며 깨워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3. 나라와 민족의 역사조차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계획에 들어오면 하나님 나라와 약속을 이뤄가기 위한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용하십니다.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실패도 성공도, 자랑과 수치도 다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것을 겁내지 말고 눈에는 안 뵈지만 모든 것 주장하시고 사용하시는 주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만 높여 지존, 최상의 주님으로 모셔 섬겨야 합니다. 신명기는 계속 선포합니다. “너와 네 후손이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택하고 그 외의 것들을 바라지 말지어다.”
정리합니다. 역사는 시간이라는 레일을 타고 끝없이 흘러갑니다. 시간은 희비곡선을 시소를 타 듯 오르락내리락하며 인생들의 신음소리에도 아랑곳없이 흘러갑니다. 그 역사의 한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생명의 노른자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의 구원 그 한가운데는 교회라는 하나님의 지성소가 사람들의 심장을 타고 흐르는 어린양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그 생명을 영원으로 이끌며 하나님나라를 이어갑니다. 이 생명을 우리가 받아 다른 이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죽었던 생명들을 다시 일으켜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는 것, 전도와 선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람들을 통하여 전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통과한 것입니까? 십자가의 모진 고난과 죽음과 수치입니다. 우리가 풍성하고 복된 삶을 살면서 이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예수님을 따라 제자 되기 간절히 원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기쁘게 새로 태어납니다. 그 기쁨이 십자가를 통과한 것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와 여러분. 삶에 일어나는 모든 아픔과 수난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하지 말고 예수님의 남은 고통으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자손대대로 주의 평강과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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