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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7.11.12. 주일예배<눅5:27-29.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레위>

by 설렘심목 2017. 11. 12.

2017.11.12. 주일<5:27-29.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레위>


레위는 세무서직원 마태의 별명입니다. 레위는 연합, 화합이란 뜻이고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름처럼 삶에 기쁨과 건강한 자존감이 없었습니다. 당시 세무서 직원이던 마태는 레위라는 별명처럼 좋은 사람이었지만 직업으로 인해 자기라는 존재에 대해 늘 갈등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돈은 많았지만 선민사상과 민족 중심적 당시 분위기에서 동족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일은 그를 누구보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자였으나 내면은 늘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찔림이 있었는데 그건 동족에게 혈세를 거둬 로마의 비위를 맞추며 산다는 불명예 외에도 물질로 채워지지 않는 영혼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달리 영혼과 사후세계에 대해서 관심과 애착이 특별한 민족입니다. 예수님이 한 마을에서 중풍병자를 고치고 가시던 길에 세관에 앉아 있는 세무서원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합니다. 나를 따라 내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제자를 부르시는 주님의 부름 앞에 마태의 순종과 소명자세를 보며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오늘 짧은 본문 27-29절에는 첫째, 마태를 불러 제자를 삼는 주님과 둘째, 주님의 부름에 모든 것 버리고 따르는 마태, 셋째, 주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푸는 마태라는 중요한 세 주제가 나타납니다. 한절씩 살피며 제자와 헌신이란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27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1. 부를 자를 부르셔서 제자 삼는 주님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안에 성령이 계셔서 잠시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요삼1:2절에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요한은 가이오에게 문안합니다. 영혼이 잘 된 후에 범사가 열린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듯이 마태가 근심하고 고뇌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었기에 그는 예수님의 소식을 귀담아 듣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회의를 품고 있던 마태에게 예수님 소식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영혼은 삶의 진로를 열어가는 첫 단추이고 평생에 등불이며 방향타입니다. 그러므로 마태의 열등감은 진정 인간이기를 바라는 순수한 바램, 곧 영혼의 목마름이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들을 때 저와 여러분의 영혼이 그 갈증을 우리 주님 앞에 시원하게 해결 받는 말씀생수가 넘치기를 주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은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것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이 열리는 음성이었고 나를 따르라.” 그것은 영혼에 있어서 생사의 갈림길이 되는 중차대한 명령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은 마태로서 인생역전을 이루는 최고의 영광이었으며 가슴 뛰는 새로움을 향한 도전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 눈은 죄로 가려진 인생들의 눈과 다릅니다. 주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밝히 아시는 눈입니다. 마음과 형편과 계획과 가야 할 길을 한 번에 보십니다. 마태의 모든 것을 보셨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부를 자를 부르시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십니다. 그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교회, 곧 당신이 거할 성전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안에 그분이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구원받을만한 아무 것도 없었지만 버림받지 않고 구원받을 자 가운데 들게 하신 주님이십니다. 마태를 택하신 주님은 또 우리를 환히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부를 만한 뭔가를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마태처럼 우리에게도 구원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하나님만 아시는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주님께서 우리를 상상 못할 정도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부르셔서 어딘가에 사용할 계획과 기쁨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세금을 걷어 풍요롭게 살아도 늘 목말라 하던 마태를 부르셔서 제자 삼으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어 최고최상의 존귀한 삶으로 인도하신 주님,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향한 놀라운 계획이 주님 안에 있고 지금 진행 중임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 중 과정을 결론이라 말해 좌절하는 이가 없기를 원합니다. 28절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라간 마태입니다.

 

28절 이후 마태의 발언은 4복음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는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한마디 없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길을 떠난 것과 같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 앞에 마태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첫째 마태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둘째 마태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마태가 버린 모든 것 안에는 포함되지 않는 게 없습니다. 직업과 생계문제,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모든 관계들, 습관, 정서와 문화를 비롯한 모든 삶의 배경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16:24와 막8:34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서 자기를 비우는 자기부인을 말씀합니다. 주님은 또 요12:24절에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 떨어져 죽어야하는 한 알의 밀알로 십자가를 설명합니다. 저와 여러분. 영적으로나 현실의 문제에도 열매 맺는 삶이란 반드시 먼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죽음같은 통증의 수고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열매는 반드시 퇴비를 먹고 자랍니다. 썩어 뭉개지는 아픔과 죽음이 분노가 아닌 겸손으로 삭혀진 삶의 퇴비, 그것이 밑에 깔려야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 인격의 열매, 관계와 전도의 열매가 건강하게 맺힙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어 한 알의 씨가 되심으로 교회라는 수많은 열매들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최고의 열매를 맺으신 포도나무십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오늘은 일대일 제자양육성경공부교재를 토대로 정리해보기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들은 어떤 것들이라 했습니까?

 

1) 자존심을 버리면 건강한 주의 자녀로서의 자존감이 살아납니다.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 취한 것이라 여기는 자기존재감, 자기자랑, 프라이버시가 죽으면 그곳에 자존감이 부활합니다. 자존감은 자신이 비록 천하고 무능해도 주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감을 가득히 느끼는 자기존귀감입니다. 이는 자신이 존귀하다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고 자신을 구원하시고 자녀삼으신 하나님이 존귀하시니 택함받은 인생이 존귀하다는 지극히 과학적이고도 이성적인 바른 생각입니다. “내가 이래뵈도라는 말이 내안에 주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데라는 말로 바뀌는 것입니다.

 

2) 특권의식을 버리면 특권이 죽은 그곳에 특별은총에 의한 구원의 감격이 넘칩니다. 남을 밟고 서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됩니다. 특권층의 사람들이 그 특권을 고집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짓밟혀 죽어갑니까? 특권은 무너져야 합니다. 특권이 무너지면 거기엔 특혜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놀라운 감동이 올라옵니다. 내가 교회를 다니다니, 예수를 믿다니, 천국시민이 되었다니, 가정이 있다니, 건강한 몸이 있다니,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니, 오늘도 내 발로 걸어서 여기 왔다는 것, 모두가 특별한 선물 중에 선물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3) 편견을 버리면 절대적 가치관이 세워집니다. 편견이라는 말은 보는 눈이 기울어졌다는 뜻인데 이것이 바로세워지려면 절대가치는 단 하나 성경이 제시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자신 안에 형성된 바르지 못한 선입견이나 상처로 인한 편견이 사라져야 합니다. 냉철한 분별력과 정확한 사고능력은 바른 기준점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험한 인생항로에 등대가 되는 단 하나의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4) 자신의 야망을 버리면 주 안에서 영생의 소망이 솟아오릅니다. 사람마다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더 행복하게 더 많이 더 길게 소유하고 누리고 싶어 하는 라는 욕구를 못 버립니다. 그 끝없는 만족을 위해서 눈에 뵈는 대로 닥치는 대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고 뜁니다.

 

16:9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자기이름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는 자는 실망과 낙심이라는 수렁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으시고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주님께 모든 것 의뢰하고 그 사랑, 그 능력을 믿어드리면 다시는 죽거나 어둠에 빠지지 않는 영생복락, 빛의 길, 시온의 대로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 오직 예수께만 있다는 것을 굳게 믿는 자에게 열리는 하늘의 문입니다. 자신의 꿈을 접고 하나님의 꿈이 이뤄지도록 기도하시고 맡겨드리시기 바랍니다.

 

5) 안락을 포기하면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편안함을 원하지 말고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인생들이 원하는 무사안일은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인해 어떻게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평화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편안한 인생을 포기하고 주님께 헌신한다면 주님은 안락보다 더 나은 평강을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주십니다. 샬롬이란 제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편안한 것보다 성도가 성도자리에서 맡은 바 주님소원을 이뤄드리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입니다. 자존심이 죽은 자리에 자존감이, 특권의식이 죽은 곳에 특별은총에 의한 구원의 감격이, 편견이 죽은 자리에 성경적 가치관이, 야망이 죽은 그 자리엔 영적인 소망들이, 안락이 죽으면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29절입니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 부름 받은 레위는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레위는 주님의 부르심에 매우 큰 기쁨과 감동을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르셔서 따르라고 하신 주님을 위해 큰 잔치를 열었는데 이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큰 잔치를 할 만큼 레위마태에게는 일생에 대단한 경사요 큰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고 그분의 택함을 받는 일은 더없는 영광이요, 기쁨이며 자축할만한 일입니다. 원하는 학교에 진학을 하거나 원하는 직장에 취업이 돼도 많은 축하의 인사를 받고 잔치를 합니다. 하물며 세상과 자신의 구세주이신 영원한 소망의 주님이 제자로 부르셨으니 어찌 주님을 위하여 잔치를 하지 않겠습니까? 방금 읽은 본문, 29절은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의 표준입니다. 주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푸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기본인데 본문을 보면 부름 받은 성도의 예배나 잔치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 우리는 즉시 자신을 비워드려 하나님의 잔치처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마태를 부르신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로 부르셔서 자녀 삼으시고 신부 삼으셨습니다. 제자란 자신의 자존심, 특권의식, 편견, 야망, 안락을 포기하고 주를 따르는 이들입니다. 제자의 길을 가는 우리가 주를 위해 다 비운 거기, 그분이 채우시는 놀라운 것이 풍성할 것입니다. 거기서 주님 위해 크고 기쁜 잔치를 열려야 합니다. 말씀을 먹고 복음으로 풍성한 삶을 기쁨과 감사로 나눠야 합니다. 이 말씀 후에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기쁨과 감동을 만나는 모든 이들과 나누는 잔치가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예배와 전도로 나타날 것입니다. 오직 주를 위해 모든 것 버리고 오직 주를 위해 기쁜 잔치와 초청과 나눔과 하나 됨이 대대로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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