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5. 주일설교 <창3:1-7. 죄의 기원(Ⅱ)-선악과>
[프롤로그]
“세상에 나 같은 죄인이 어디 있을까?”라며 심하게 아파하는 동시에 “이런 죄인이 이렇게 큰 복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라는 송구함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진정 거듭난 자의 자세이다. 이런 회심(悔心)을 경험한 자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괘씸한 마음 대신 가여운 마음을 습관처럼 먼저 갖게 된다. 아직도 괘씸하다면 그것은 자신의 죄를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공의 적이요, 만인 앞에 마귀 앞잡이가 된 자에게 갖는 분노가 있다. 그러나 그 공의조차 영혼을 미워하지는 않아야하며 다만 죄를 미워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올라갔던 십자가, 지금은 빈 십자가에 우리가 한번 매달리는 시늉만 해봐도 “괘씸 대신 오죽하면”이라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피 묻은 언약으로 가려지고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복을 다 받았으니 그 만복의 출발이 전도와 함께 명령된 영생과 복음이라는 엄중한 사실은 인간이 존재하는 가장 근본 된 이유이자 본질이다. 이 이유와 본질을 떠난 불신세상에서 구원받은 이가 살아가는 일은 목적을 향해 바로 갈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 성도의 성무는 삶의 의무이기 전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요, 보람이기도 하다. - 2017.10.31.diary발췌.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하나님. 인간. 세상의 소원은 동일하게 행복. 표현도 같으나 방법에 있어서 정반대의 길.<외형과 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29)
♨ 하나님의 소원. 성경설교의 목적. 우리의 성결과 찬양을 통한 하나님의 기쁨.
뵈는 것이 다 투쟁의 대상인가? 뵈는 것이 다 찬양의 대상이어야. 뵈는 전투 아니라 안 뵈는 전투.
이겨야 할 대상은 상대방이 아니라 나 자신 내면의 죄.
지난주에 이어 오늘말씀도 죄의 기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죄의 기원인 교만과 불순종을 다루었고 이번에는 선악과를 살피게 됩니다. 선악과(tree of knowledge), 곧 지혜의 나무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따먹은 선악과로 인해 눈이 밝아졌습니다. 7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눈이 밝아지자 그들은 벗은 줄 알고 나무 잎으로 앞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 8절은 밝히고 있습니다. 즉 선악과를 먹음으로 눈이 밝아진 것이 죄의 시작이었다는 것입니다. 죄의 기원,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눈이 밝아지는 것일까?
1. 거룩의 눈(門)이 닫히고 죄의 눈(門)이 열린 것입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안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봐야 할 것이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그동안 죄에 대하여 무관하던 순결한 영혼이 명령을 어기자 죄가 들어와서 알지 않아야 할 죄에 대해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벗었다는 사실에 놀라 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나무사이에 숨었습니다. 부끄럽지 않던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두려움과 수치는 벌거벗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그로 인해 멀리 가서 숨었다는 그 사실임을 저와 여러분 오늘 기억해야합니다. 오늘 날 세상의 불행과 수치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모른다는 그 사실이지 실수와 부족이 아닙니다. 인생불행의 근본적인 이유는 즉, 광야의 불행, 나그네의 진정한 아픔은 가진 게 없다거나 혹은 인생이 짧다거나 몸에 병이 든다는 것이 아니라 인도자시고 진리시며 길이신 하나님이 안 뵈는 겁니다. 죄가 인간과 하나님사이를 가로 막아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겁니다. 인생이 죄로 망하는 게 아니라 회개 못해 망하는 법인데 그렇다면 죄로 안 뵈는 하나님, 회개할 길이 없어 못 만나는 하나님, 오직 길은 하나 회개는 어린양 예수님의 보혈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대신 죄 값을 청산하시니 살길이 열려 오늘 우리가 예배합니다. 이렇게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가장 먼저 나타난 일이 하나님과의 관계파괴였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는 건 그들의 생령이 죽은 영이 되고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후 하나님을 만나려면 죄로 가로막힌 담을 헐어 하나님의 문을 열어 제치는 죄용서의 행사, 곧 희생제사가 요구됐습니다. 오늘 이 말씀 중에 하나님과 막힌 담이 무너져 하나님의 나라 안에 더욱 깊이 들어가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요일 2:16절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生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렇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2. 정욕과 세상에 눈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1)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눈이 밝아지자 즉시 알게 된 것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입니다. 수치를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수치라는 것, 부끄러움이 바르지 못한 현상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미 교만이라는 죄가 들어간 후의 일입니다. 엄마가 아기기저귀를 갈아주는데 아기는 아직 수치를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아담하와가 체면을 차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 앞에서 뭔가 가려야만 편안한 관계로 높아진 교만으로 본래의 위치를 떠나 전락한 것을 뜻합니다. 아담하와가 갑자기 의젓해져 신분상승을 한 듯하고 하나님은 상대적으로 낮아진 느낌입니다. 지극히 가까운 사이, 분신인 관계는 아무런 거리낌이나 가릴 것이나 체면을 차려야 할 이유를 못 느낍니다. 그러나 관계에 금이 가면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선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안 보이는 선, 곧 금이 가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경계선이 그어진 관계는 나와 너, 그리고 그들이란 말로 분명한 지경표시를 하게 됩니다. 아담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죄가 들어가자 자신들만의 영역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 영역의식은 하나님을 자신의 모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객체, 곧 체면을 차려야 할 대상으로서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우리라는 단어가 나와 하나님이란 말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방금 읽은 요일2:16절의 “육신의 정욕”은 육신의 눈으로 보기 좋은 것에 대하여 갖는 정과 욕심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육신의 정욕가운데는 거룩한 처소로서의 건강한 육신이 아니라 오직 쾌락을 추구하는 육체의 속성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별해보기 원합니다. 먼저 육신적인 것은 곧 사라질 것들이요, 영적인 것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들입니다. 다음 육적인 것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지만 영적인 것은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또 육적인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썩어 냄새가 나지만 영적인 것은 형질이 없으니 썩거나 냄새가 나거나 변질이 없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명령기관이라면 육체는 그 명령을 받아 수행하는 부속기관입니다. 머리가 판단하여 명령하면 가슴이 느껴 감동하고 손발이 움직여서 뜻대로 실행하는 피차 필수적인 관계, 그러나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잘 융화함으로 선한 곳에 귀하게 쓰이기도 하고 추하고 악한 일로 고통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영혼에게 육체가 없다면 진리를 행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한편 육체가운데 영혼이 잠들어 있다면 그 육체는 동물보다 못하게 됩니다. 다만 육체가 거룩한 공간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적인 결단과 헌신과 노력과 인내가 절실하다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육체가 해야 할 우리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 열린 것은,
2) 이生의 자랑(boastful pride of life), 곧 하나님보다 세상을 소중히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生이란 말은 여기 이 삶(生: this life)을 말하는데 다분히 몸으로 만끽할 수 있는 현실적이며 육체적이고 감각적이고 관능적 욕구의 충족을 바닥에 깔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生의 자랑이란 말을 “세상사는 동안 세속적인 자랑거리”라고 표현하는 것이 순수 우리말 표현입니다. 어떤 이는 이 말을 세상사는 재미라고 말했는데 정확치 않습니다. 세상사는 재미는 성도들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세상사는 재미는 예수 믿는 기쁨, 성령의 충만 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生의 자랑이란 세상사는 동안 맛보는 세속적 자랑거리, 즉 세상적인 자랑거리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사는 자랑할 일이 뭔가? 돈벌어 출세해 큰소리치며 살고 공부 잘해 많은 이들이 허리 굽히고 권세가 있어서 비록 방법이 나빠도 멋지게 포장해서 감쪽같이 덮을 수 있고 세상과 족보에 영광된 이름을 올리는 것, 더 많이 더 교묘하게 남을 짓밟고 출세하는 것과 비록 그렇진 않아도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한평생을 투자하는 것, 방법이야 어떠하든 일단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위해선 어떤 것도 희생시켜가면서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의 탁월함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상적 능력의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하면 그게 이생의 자랑입니다. 선악과 범죄 후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들이 하는 대표적인 특성 중에 하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눈이 밝아져서 이렇게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했는데 이후 인생들은 정작 부끄러운 일들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양보하지 않고 남을 짓밟아 많이 차지하고 많이 다스리고 많이 먹고 향락에 흠뻑 취하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에 참으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로 하나님의 영이 떠난 뒤 인간은 수치와 영광을 바꿔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롬1:23-24절입니다.“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마음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영혼의 소유주가 하나님인 경우와 사람자신이 되는 경우의 차이를 로마서는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현실적 삶에서 우리자신이 잘나거나 뛰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탁월하다면 탁월하게 하신 주님이 대단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가 처한 세상 것을 자랑할 일이 없습니다. 믿기를 바랍니다. 자랑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복음뿐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들의 생명이 잠시 지나는 안개와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명뿐 아니라 모든 세상, 눈에 뵈는 것들이 다 이와 같이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이 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주님은 그러한 한시적인 것들 위에 크신 소망으로 찾아와 주셔서 죽어도 죽지 않는 새 생명으로 오늘도 인도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우리 앞엔 두 갈래 길이 있어서 선택의 자유와 거기에 따른 책임까지도 각자의 몫으로 부담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하나는 의심과 불순종으로 열리는 저주와 사망과 어둠과 불심판인 선악과의 길이요, 하나는 믿음과 감사와 긍정과 순종으로 열리는 복과 생명과 빛나는 시온의 대로, 곧 그리스도를 향한 길입니다. 선악과의 길은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은 주님이 보호하실 것입니다. 거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수 샘터가 넘쳐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어 영생하시는 주님과 함께 기쁜 노래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가 잠들기 전 끊임없이 가야하는 나그네 길에 여전히 선악과와 생명과는 번갈아가면서 다가옵니다. 둘 중 무엇을 취할까? 오늘도 눈을 감고 신명기 말씀과 계시록말씀을 묵상하면서 설교를 마칩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가 생명수강을 내게 보이시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신30:19 계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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