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03. 주일예배<삼하11:6-13. 헷사람 우리아의 충절>
[“의리 없는 놈의 친구가 되기보다는, 의리 없는 놈의 원수가 되는 것이 안전하다. -춘원 이광수의 책 「麻依太子」에서]
의리의 간단한 설명은 함께 좋아하고 함께 미워하고 함께 관심하며 고민함으로 늘 동감의 기쁨을 공유하는 것이다.
의리의 결과는 내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존재의 부요다.
주연과 조연, 기술자와 조수, 주역과 조역 등은 어디서나 늘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하게 됩니다. 대부분 주요 줄거리로 인해 자칫 가려지기 쉬운 주변 언저리의 이야기는 주제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간혹 헷사람 우리아처럼 숨은 공신의 이야기는 결코 사소하지 않아서 주제만큼이나 우리들은 감동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내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윗의 범죄가 나은 불행의 한 뒷면을 듣는 안타까운 일이라 더욱 마음 아픈 장면입니다.
충신 우리아장군은 다윗의 37 용사 중 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런 그가 전쟁에 나간 중에 홀로 있는 그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밧세바가 잉태하자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계략을 꾸밉니다. 잠시 휴가를 준 뒤 아내와 동침하게 함으로 자신의 범죄를 숨기려 합니다. 그러나 우직하고 충성스런 우리아는 아내에게 가지 않습니다. 진수성찬을 차려 우리아를 권유했지만 그는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부하들과 함께 지냅니다. 그 이유를 묻는 다윗에게 우리아는 말합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들에 진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우리는 본문에서 우리아가 아내에게 가지 않는 이유 두 가지를 봅니다. 첫째는 언약궤와 이스라엘, 유다가 야영 중에 있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직속상관인 요압장군과 전우들이 전투중이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과 나라에 대한 충성입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우리아장군은 사사로운 개인의 정보다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진영과 함께 전투의 현장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잡혀있습니다. 충성심에 불타는 그는 아내보다 언약궤의 거취와 전투중이란 군인정신이 앞선 충신이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의 상징이어서 큰 전쟁을 하거나 위태로운 일에 그들은 늘 언약궤를 중심에 두고 뭉쳤습니다. 언약궤가 야영중이란 사실은 지금이 비상시국이며 아내와 함께 누울 만한 편한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벨론포로에서 풀려난 유다인들이 고향에 돌아와 성전건축보다 먼저 자신의 집을 지으려할 때 하나님은 학개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잘 꾸민 집에서 거주함이 옳은가?”하나님우선사상과 교회 중심적 사고방식은 결국 내 집과 자손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우리아, 그는 개인을 억제하는 이유에 있어서 맨 처음 언약궤를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개인을 누르지 못해 이러한 충신을 속이려고 합니다.
우린 때로 지도자가 아랫사람보다 훨씬 못한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것은 전문지식이나 전략부족이 아니라 순간적인 개인의 욕심을 제어하지 못함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적군과 대치중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앞장서 있다는 것은 충성스런 우리아에게 큰 위로와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전투에 생명을 걸고 싸우다가 잠시 왕이 불러 따라주는 어주를 한잔 마셨지만 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군인이었습니다. 그 철옹성같은 충성이 언약궤를 맨처음 거론하면서 아내에게 내려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아의 정신은 그 중요도에 있어서 첫 우선순위가 하나님의 언약궤, 즉 하나님중심사상이었습니다. 다음은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었습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이스라엘과 유다의 진영이 적과 대치중인 야전현장이란 사실이 우리아 장군에겐 아내보다 중요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졌다면 아내도 남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을 멀리한 곳에서는 가정이 함정과 소굴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아는 우선순위에서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음은 언약궤에 이어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충정입니다. 이 역시 하나님 없는 아내와 가정이 아무 쓸모없듯이 나라없는 가정이 있을 수 없고 나라 없는 아내는 불행의 씨앗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과거 청나라와 일본에 국권을 잃었을 때 조선의 딸들은 젊으나 늙으나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삶을 살다가 한 많은 인생 눈을 감지 못하고 죽어야 했습니다. 강제로 울며 끌려가는 정든 아내, 나라 잃은 설음입니다. 우리아의 생각은 백번 옳았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전투 중에 어찌 아내를 품을 수 있냐는 생각, 이러한 충신들로 주변이 든든했던 다윗은 느슨해진 마음에 자신의 육체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풍요가 가져다 준 타락입니다.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들에 진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2. 믿음직한 전우애입니다.
앞서는 언약궤요, 나라의 진영이요, 다음에는 전투중인 전우들을 기억해 내는 우리아장군, 이러한 장군이라면 부하를 대신해서 죽어줄만한 신실한 자입니다. 이런 장군아래 있는 병사들은 위기가 다가와도 사기가 꺾이지 않습니다. 승률이 낮아도 생명을 걸고 일당백의 전투에 용감하게 나섭니다. 우리에게 이런 장군 계시니 곧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죄와 사망 속에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신 것입니다. 우리아장군은 아내와 함께 눕는 따듯한 잠을 물리치고 전투현장에서 야영하는 전우들을 생각하면서 왕궁 문에서 병사들과 함께 누었습니다. 요즘처럼 몸을 아껴 편안한 것만 추구하는 시대에 우리아장군의 충직한 전우애는 모두의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쪽은 갈라져 조각이 나는 한이 있어도 굽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아장군 같은 경우 대쪽 같은 절개라고 합니다. 대쪽 같은 충성심과 절개가 아내를 뒤로한 채 궁정 문에서 병사들과 먹고 눕게 한 것입니다. 결국 그 충절이 치열한 전선으로 내몰려 장렬한 전사를 합니다. 그는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먼저는 전투의 현장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그리고 암몬족속과 대치중인 나라의 국방 앞에, 끝으로 생명을 걸고 나라를 지켜 싸우는 전우들 앞에 우리아 장군은 도리를 지켰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라 앞에, 그리고 전우들 앞에 의로운 죽음을 바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생명을 돌보지 않고 도리를 지킨 우리아장군을 보면서 순교와 십자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보통 순교는 심한 고통과 모욕과 공포를 동반합니다. 그리고 순교직전에 한마디 말만 바꾸면 대부분 순교를 피해 고통과 죽음과 수치를 면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터어키순교 사건을 소개합니다.
2007년 4월 18일 수요오전 10시, 터어키 말라야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경배포사역과 문서사역을 하는 기독교출판사에 20대 청년 무슬림 5명이 예배를 드리러 왔고 이들은 이미 3개월 전부터 선교사들에게 성경공부를 하는 척 위장접근을 시도하면서 무서운 계획을 했던 것입니다.
총, 칼, 로프 등을 준비한 이들은 갑자기 기독교형제들을 총으로 위협해 의자에 묶고 잔인한 고문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알라신을 최고의 신으로 인정해 받아들이면 손톱하나 건들지 않겠다고 친절히 말했습니다. 그들은 핸드폰카메라로 녹화까지 하는 여유를 보이면서 네자틴형제는 칼로 99번, 독일선교사 46세의 틸만은 156번, 우르형제는 셀 수도 없이 무수히 찔렀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의 손가락을 모두 잘라내었고 입과 코와 항문까지 칼집을 내어 벌려놓았습니다. 그들은 또 형제들의 배에서 창자를 꺼내어 조각을 낸 뒤 다른 형제들이 눈을 뜨고 보게 하였습니다. 32살의 현지인 우르형제는 “나는 우리민족에게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을 전하다가 죽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라고 평소 고백한 그대로 순교했습니다. 형제들은 3시간에 이어진 잔혹한 고문 속에서도 아무도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 당한 형제들은 결국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수 시간 후 앙카라 TV에 나온 틸만선교사의 아내 수산나선교사는 “저들을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용서했습니다. 또 순교한 네자티형제는 평소 “나는 무슬림으로 태어났지만 크리스찬으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네자틴 아내의 고백입니다. “네자틴은 그리스도를 위해 태어났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정말 의미있는 죽음이었습니다. 저는 그와 인생을 같이했다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에 합당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순교사건 이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언제 어디서 테러를 당해 비참하게 죽을지 모르는 터어키에 크리스쳔들이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낸 것입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돼 생명이 위협받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공개적으로 네자틴의 장례예배에 모여 들었습니다. 이스탄불광장에는 그동안 숨어있던 현지 터어키인 기독교성도들이 대거 몰려나와 “우리도 기독교인이다. 우리도 죽여라.”소리치면서 죽음을 각오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들은 순간적인 흥분이 아니라 이미 순교한 형제들에게 감동해 그들을 따라 순교할 각오가 돼 있는 성도들이었습니다. 비굴하게 세상에 남아있느니 죽어 충성하리란 일사각오의 신앙고백이 이스탄불광장에 울려 퍼진 겁니다.
다윗의 유혹에 빠지지 않아 끝내 치열한 전투현장에 이슬이 되어 사라진 충직한 우리아장군, 비열하고 나약한 안일함을 물리치고 믿음의 도리, 그리고 장군의 도리와 신하의 도리를 지킨 의리의 사나이, 그는 죽은 게 아니라 성경에서 충절의 등불로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우리아장군이 아내에게 내려가 따듯한 잠을 편안하게 잤더라면 전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충절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롬8:18절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잠시의 안일함을 물리쳐 영원한 영광과 도리를 차지한 우리아의 일편단심, 오늘 평강과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님의 능력으로 임하기 바랍니다. 예수믿음으로 당하는 불편이 있습니까? 불이익이 있습니까? 우리의 불편을 어찌 우리아의 순교에 비하겠습니까? 이 말씀 받는 내내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 주변 이런 귀한 자가 누굴까? 아니, 내가 먼저 우리아를 따라야겠다는 강렬한 결단으로 가슴을 요동치게 하시는 주님만 찬양합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주님은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들의 현장에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도우십니다. 성도의 고통을 외면치 않으십니다. 우리아의 충절, 순교자의 정신을 품는다면 세상에 못이길 게 없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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