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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7.07.02. 주일설교<딤전1:18-19. 금메달성도>

by 설렘심목 2017. 7. 2.

2017.07.02. 주일설교<딤전1:18-19. 금메달성도>

[제물은 항상 초태생. 가장 좋은 것으로. 가정에선 먼저 구원받은 가장 성숙한 자가, 교회에선 목사, 권사, 장로가 십자가에 올라가야 모두 소생. 십자가엔 항상 장자권자가 올라가는 것. 잉태의 설렘은 산고의 죽음을 지나야 생명의 열매로. ]


4년마다 세계 올림픽경기대회가 열립니다. 모든 경기종목마다 엄격한 규정이 있어 그 규정을 어기면 우승을 해도 무효가 됩니다. 특히 체력을 일시강화하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는 일은 강력한 조치를 당하게 됩니다. 올림픽에는 그래서 많은 에피소드가 있고 감동이 넘치지만 아픔도 심하게 따릅니다. 인간의 한계를 정복하는 극한 훈련을 하고 경기에 거의 모든 것을 건 선수들의 투혼은 실로 가상하고 감동적입니다. 그들은 모두 규정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위반하거나 비겁하거나 게으르지 않았다는 증거가 메달로 인정됩니다.

모든 사람에게도 한평생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법도와 규정이 있습니다. 규정을 잘 지켜 우승점에 도달하면 금메달이지만 규정을 어기고 남을 속이거나 해를 끼치면 메달대신 수갑 차고 격리수용을 당해 수치를 당합니다. 현재 금메달리스트의 연금은 월100만원이고 은메달 45만원, 동메달은 30만원입니다. 일시불로 67백만 원을 받지 않으면 평생 월 100만원씩 은행에 입금이 됩니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지급되는 돈이라면 월 100만원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피눈물 나는 훈련과 투지와 국위선양의 효과도 결코 작은 게 아닙니다.

올림픽에서만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하늘의 상급과 이 땅의 기업이란 말로 금메달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하늘의 상급은 영생과 천국이요, 땅의 기업은 자녀와 관계의 지경 등 땅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눈에 뵈는 풍성과 평강과 믿음에서 비롯되는 갖가지 선물들입니다. 그렇다면 금메달을 받을만한 성도의 삶은 무엇입니까? 본문18절을 함께 읽습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이 교훈으로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 죽음 앞에 후회 없는 삶,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죽음 앞에 후회 없는 삶, 즉 주님 앞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얻어 돌아보아 아쉬움과 미련이 없는 삶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20:24)”사도바울은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워오자 생명도 결코 소중치 않고 모든 것에서 홀가분하다고 고백합니다. 미련도, 후회도 없이 생명조차 복음을 위해 얼마든지 바칠 수 있는 위대한 이 영적 거장의 고백은 정녕 하늘나라 금메달이 분명합니다.

 

주님이 제자 요한을 특별히 총애했다면 바울사도는 디모데를 아들처럼 아꼈습니다. 바울사도는 디모데가 선한 싸움을 싸우는 데는 반드시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하나님의 성경이 절대적 지침이요, 법인 것을 일깨웁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가운데 보고자 하는 것은 금메달의 영광 뒤에 있는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을 이미 했습니다. 패자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역사는 승자의 손에서 기록됩니다. 승자는 정의롭고 공평하고 대의명분이 확실해서 아무도 원망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 못하는 패자는 비겁하였고 범죄사실이 분명하고 누가 봐도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역사책은 거의 허위문서라는 말은 옳습니다. 아무리 공정하게 기록하려해도 불가능한 것이 역사기록입니다. 이는 세상의 전형적인 승전의 공식입니다. 방법이나 수단이야 어찌하든 이기고 봐야 한다는 비겁한 세상논리입니다. 하나님의 승전 공식은 세상의 것과 정반대인 것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이 결과 의존적이라면 하나님나라는 방법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그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선한 길 되신 예수그리스도만이 우리 믿는 성도들의 유일한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따라 죽음 앞에서도 후회 없는 삶이길 주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절 함께 읽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성도의 올림픽 규정, 두 번째는..

 

2. 믿음과 착한 양심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금메달은 규정이 지켜지는 가운데 주어지는 정직의 면류관입니다. 성도의 규정, 곧 선한 싸움의 도구는 믿음과 착한 양심이라고 본문이 정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정한 믿음과 선한 양심,

그 첫째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말은 우리가 평생 듣고 마음에 다지는 가장 귀한 단어요, 가장 많이 쓰는 단어입니다. 보통 천한 것은 흔하고 귀한 것은 흔하지 않지만 실제 생명에 절대적인 것은 값없이 흔하면서 귀한 것입니다. 공기와 물이 그렇고 인간의 생명이 그렇습니다. 거리에 나가면 이리저리 어깨에 부딪치는 것이 생명들이지만 가장 귀한 것이 그 생명이요, 영혼입니다. 이렇듯 믿음만큼 흔하게 우리입술에 붙어있는 말도 흔치 않으나 믿음만큼 귀한 말도 없듯이 믿음이란, 주어의 변환 즉 주와 종이 바뀌는 것입니다. 늘 나라는 말이 앞서던 자가 그리스도가 주어로 등장하는 삶의 대전환을 말합니다. 자신을 어느새 종이라 낮추고 그 종의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믿음은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모시면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내 스스로 하려했던 모든 것이 그 뿌리가 예수님인 걸 알고 그 분께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리스도의 도구일 뿐 아무 권리를 주장하지 않게 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종이 됐다는 사실로 인해 온 생애가 기쁨과 풍요로 가득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2: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은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라 감사할 일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에 대하여 값을 치르거나 어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거저주신 자비로운 하나님만 자랑해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본질은 거저받은 구원앞에 억누를 수 없는 감격으로 자원하는 모든 헌신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즉 믿음의 본질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위에서 거저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받은 구원과 그 감격으로 인한 신앙고백적 행위들, 곧 헌신과 희생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믿음은 충성과 진실과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이렇듯 성도의 삶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길,”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하박국서의 말씀처럼 성도의 의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서 믿음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으니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올림픽금메달보다 더 귀한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올림픽금메달은 육신이 있는 동안에만 연금이 나오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상급 금메달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참으로 놀라운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매월 100만원정도가 아닙니다. 그 나라 거긴 돈이 필요 없습니다. 가게나 백화점도 없습니다. 병원과 약국과 법원, 경찰서가 없습니다. 세무서도 없고 군인경찰이 없습니다. 자동차가 없으니 주유소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핸드폰도 필요없고 매월 카드대금을 막을 것도 없고 은행도, 동사무소도, 로또복권이나 입시전쟁도 없습니다. 인간을 타락시키는 술, 도박, 마약, 이성문제, 출세욕도 없습니다. 취직해서 돈벌고 누굴만나 좋은 가정 꾸밀까하는 고민도 없습니다. 가난도, 수치도, 열등감도, 상실감과 질병과 고통과 눈물이 없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 오직 믿음으로만 갈 수 있는 나라, 참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를 어찌 말과 글로 설명하겠습니까? 특별히 그보다 더 귀한 것,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니 모두 용서됩니다. 원망과 분노, 네 탓 내 탓이 없고 살인과 잔혹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어찌 몇십년 받는 백만원과 금메달과 작은 명예에 비유한단 말입니까? 語不成說, 말을 말아야 합니다.

다음 선한 양심은 어떤 양심입니까? 선한 양심이라면 악한 양심도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양심은 선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양심 중에 성경적 양심을 우리는 본성상의 양심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우리에게 있던 양심은 바른 인간의 도리를 따르도록 우리들의 내면에서 본능적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타락한 인생에게 그래도 마지막 선물로 남겨두신 착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양심보다는 완전치 못해서 이기적인 자기와 싸워 이기지를 못합니다. 반면 성경적 양심은 성령의 활동으로 지켜지는 각종 바른 도리의 승리를 증거하는 성령의 능력이며 또한 바울이 말하는 선한 양심, 디모데를 지도한 예언인 하나님의 말씀, 이 말씀의 능력으로 지켜지는 양심입니다. 이 양심으로 목양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선한 양심, 성경적 능력의 양심은 저와 여러분의 경건에 큰 힘이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은 멀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생각보다 빨리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든 우리가 주님께 가든 그날은 속히 이를 것입니다. 그날 거기서는 우리가 애걸복걸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 것이고 거룩과 경건과 충성과 온힘을 다해 주님가까이서 더 열심히 살지 못한 것을 돌이켜 아파할 것입니다. 죽음 앞에 그러므로 후회가 없는 믿음의 삶을 사시기 주님이름으로 당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믿음으로만 갈 수 있는 기쁨의 그 나라, 하나님의 금메달을 바라보고 말씀의 능력을 따라 선한 양심으로 주의 택한 자들의 모임, 교회를 사랑하고 온몸을 불태워 예수위해 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