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16. 주일설교<행6:8-15. 스데반의 마지막 얼굴>
주님이 부활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는 주님이 예고하신대로 성령의 놀라운 임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였는데 마치 불의 혀같이 갈라지며 성령이 임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두려워 떨던 제자들은 담대히 각 지방의 방언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설교하니 삼천명이 세례를 받고 그 모이는 수가 더해 초대교회가 탄생합니다. 교회는 핍박을 받고 사도들은 채찍과 옥에 갇히는 가운데 수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가진 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 내것네것없이 유무상통하며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전형을 이루어 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기독교사상 첫 순교를 하게 된 스테반은 사도들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만 전념하기 위해 뽑은 일곱집사 중 한 사람입니다. 성경적인 집사의 본래 직무는 그렇게 재정업무를 감당하며 구제비할당을 포함해 기도와 말씀을 제외한 교회제반사항을 돌보는 교회청지기라고 할 수 있는 직분이 집사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소개하는 스데반집사는 거의 사도의 직무를 감당할 정도로 그 신앙의 영향력이 교회를 크게 받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스데반의 순교직전 모습과 그의 활동과 신앙을 살피게 됩니다. 8-10절입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스데반의 헌신적 삶은 순교의 꽃을 피우기 전에 먼저,
1.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죄악된 세상에 확장돼가는 일에는 일정의 순환고리가 있습니다. 불을 붙이는 점화기가 있고 불이 붙으면 확산되는 확장기가 있습니다. 확장기에는 자신의 전반적인 분야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를 다 감당하지 못해 어수선합니다. 어느 정도 확장되면 내면으로 익어가는 성숙과 성장을 반복하며 성장기를 거칩니다. 이 성장기에는 다소의 회의와 고난을 경험하면서, 필요한 신앙의 저력을 키워갑니다. 가장 힘든 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장한 나라와 나라들은 다시 씨앗을 잉태하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서 구령의 열정, 곧 영혼을 사랑함으로 반드시 주변의 죽은 영혼들을 구해내겠다는 열렬한 마음을 품는 완숙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완숙기에는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 가르치고 싶고 찬양도 앞에서 인도하고 싶고 뭔가 고백함으로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를 드러내 전하지 못해 늘 부담이 있습니다. 이 부담은 단순한 눌림이 아니라 기도가 익어 주님의 음성 앞에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매우 귀한 부담이요, 갸륵한 믿음입니다. 이때 자칫 바로 잡아주지 못하면 교만이 틈타 교회의 아픔이 되기도 합니다.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는 벼처럼 성도의 승리와 미덕은 끝까지 겸손으로만 가능한 것인데 좀 잘한다싶으면 대번에 풍선처럼 하늘모르고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찬바람만나 터져버리기 일쑤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던 당시는 기독교가 한창 확산일로에 있던 확장기와 성장기의 전환점에서 사도들에겐 성령의 임재로 폭발적인 완숙기까지 겹쳐서 그야말로 성령의 불꽃이 뜨겁게 타오르던 때였습니다. 성령의 불은 사도뿐 아니라 집사와 평신도에게도 번졌습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의 밭과 집과 소유를 팔아 봉헌해 교회 안에 가난한 자가 없어졌습니다. 교회는 크게 부흥하고 사도들에게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하신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다리자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이토록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사도들의 손이 닿는 곳마다 귀신이 쫓겨나가고 각종 더러운 병이 치유됩니다. 계속되는 기적의 역사로 인해 사도들의 설교현장에는 인산인해를 이뤄 사두개인들과 대제사장도 사도들을 공격하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옥에 가뒀다가 몇 대 치고 훈방하는 정도였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자, 비록 고통이 있어도 늘 벅찬 감동입니다. 오늘 날에는 초대교회와 같은 성령의 폭발을 쉽게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오해일 뿐입니다. 성령께선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시공에 따라 좀 다른 모습으로 일하는 것뿐입니다. 그땐 불치병환자가 거리마다 넘쳤고 귀신과 무지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시대였습니다. 그릇된 종교로 우상숭배와 미신에 가까운 행위가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어가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영리해져서 과학과 의학은 발전하고 분별력도 높아졌습니다. 초대교회와는 모든 상황과 삶의 배경과 의식의 수준이 다릅니다. 달라진 만큼 하나님의 성령이 다른 모양으로 일하십니다. 불치병, 무지와 가난, 질병과 재난 등 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질고들이 인생을 괴롭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의술이 좋아 수명이 늘어나고 산업혁명 이후 모든 생산성이 향상되어 물자가 풍부합니다. 그러나 과거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은 천형과도 같은 무서운 불치병과 난치병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성홍열, 파상풍, 천연두, 흑사병, 장티푸스, 폐병 등이 사라지자 암과 에이즈와 싸워야 할 것이고 또 그것이 정복되면 전혀 알 수 없는 신종 바이러스에 의한 치명적인 불치병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즉 시대와 무관하게 인생의 고통은 그침이 없을 것이며 그때마다 하나님의 기적은 구할 자를 구하셔서 증거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기적과 권능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가운데 늘 진행되는 것을 아는 믿음은 귀한 믿음입니다. 거듭 선언하지만 기적이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곧 하나님의 권능이요, 은총이요, 기적입니다. 지금도 영적인 문둥병과 앞 못 보는 장애와 바로 못 걷는 절름발이의 불구가 여전히 우리 안에 일부 남아 있다고 인정하시면 아멘입니다. 과거에는 눈에 드러난 장애였지만 지금은 속으로 숨어들어 교묘히 자신과 하나님과 교회를 가로막는 장애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자신을 바로 깨닫는 자마다 낙심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낙심은 낙심하라고 온 건 아닙니다. 낙심과 좌절 끝에 유일한 소망, 영원한 생명, 우리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낙심과 좌절은 천국을 향하는 첫 계단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이요, 선물이요, 과정입니다.
어떤 이의 고백입니다. “내가 나를 가로막고 네가 너를 가로막는구나. 언제나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흩어놓고 또 일구어 왔다. 누구를 탓할 수 있는가? 그나마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덮으심으로 지금 이 정도가 아닌가? 이 천형과도 같은 영혼의 불구, 등급 없는 인격 장애의 한 맺힌 아픔이여”
초대교회의 기적과 오늘날 현대교회의 기적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눈멀어 멸망의 길로, 심판의 길로, 사망의 길로 줄달음치던 인생이 그리스도의 기적으로 깨끗이 고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찬송자의 길로 가는 것,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믿기는 믿는데 절름발이 믿음으로 불안했던 신앙의 행보가 주의 권능과 성령의 활동으로 반듯하게 세워져가는 것, 그런가하면 지체들을 부축하며 돕는 자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에 대해선 한마디도 입을 열지 못하던 자가 예수라면 전하지 못해 마음에 불이 붙는 것 이것이 기적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구차한 자랑거리, 역겨운 자기자랑이 많던 자가 자랑이라면 오직 예수밖에는 없다고 고개를 숙이는 겸손도 하나님의 권능이요, 기적입니다. 10-11절입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하고” 스데반의 능력은 지혜와 성령의 임재였고 그러한 스데반에게 모함과 순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 모함 받음과 희생과 순교는 스데반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본서 사도행전 7:1-53절까지는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진술할 기회를 줍니다. 돈에 매수돼 스데반을 모함한 내용이 사실인가를 본인에게 묻자 스데반은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아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 설교의 내용은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닫은 자들에겐 쳐 죽여도 분이 안 풀릴 내용입니다. 본문 7:2-50절까지는 아브라함시대로부터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역사까지 한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51-53절은 군중들을 향해 무섭게 책망합니다. 51-53절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죽음을 겁내지 않은 책망의 선포였습니다.
성도여러분. 죽음의 순간에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도 죽음은 두렵습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에 대한 고결한 본성입니다. 15절입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죽음도 두렵지 않은 스데반의 평강,
3. 순교 직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도 같았습니다.
환경과 분위기와 생사조차 뛰어넘은 권세, 영생을 주신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스데반에게 이 하나님의 권세가 성령으로 충만하자 스데반의 얼굴은 마치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천사에게나 나타날만한 하나님의 영광이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고 내려올 때 그 얼굴이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올 때 그 얼굴에 빛이 났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것은 첫째 평온하고 감동이 밀려왔음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고백도 어떤 설교로도 복음을 선포할 용기가 가득했음을 말합니다. 비록 그 설교로 생명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을 만난 자는 두려움을 뛰어넘는 용기가 생깁니다. 물론 육신의 감각은 살아있어 닥치는 아픔 앞에 예민하게 반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근본인 영혼은 주님 앞에서, 주님이 주셔서, 주를 믿는 믿음으로 극심한 고통도 피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은 곧 닥칠 죽음을 이미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듭니다. 55-56절입니다.“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스데반은 분명 하늘 문이 열리고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주님을 봤습니다. 순교의 짧은 과정을 지나면 영원한 주님의 나라로 들어갈 자신의 영생행보에 말할 수 없는 소망과 기쁨과 확신으로 충만했습니다. 영원에 대한 확고한 소망과 기쁨이 잠시의 고통을 담담히 받게 한 것입니다. 59-60절입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돌에 맞는 순간 심한 통증과 함께 이미 스데반은 예수의 영으로 가득해서 죽기 직전 아직 정신이 있을 때 무릎을 꿇고 돌로 자신을 치는 자들을 위해 크게 부르짖습니다. 눅23:46절입니다.“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23:34절입니다.“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주님위해 목숨을 버리는 순간 주님과 꼭 같은 기도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한사람이 죽는 순간, 그의 마지막 말과 모습은 그의 인생과 미래를 말합니다. 괴테의 화우스트는 “살려줘요.”비명을 질렀고 괴테도 “창문을 열어다오. 빛을” 어둠을 호소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유언을 적겠다고 하는 하녀에게 “시끄러워. 꺼져버려.” 소리쳤습니다. 나폴레옹은 “난 불행하게 살았다. 후랑스. 군대. 죠세핀...” 뭔가 웅얼거리는데 안 들렸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구유로 오셨지만 집행군사들과 자신을 모함하고 죽인 모든 이들의 용서를 빈 뒤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스데반도 돌을 든 무리들을 용서해달라고 큰소리로 기도하고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며 떠났습니다.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맑고 환하게 평화를 전했습니다. 영원한 안식과 평강과 기쁨을 영혼의 눈으로 분명히 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구원의 하나님은 영혼만을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렘32:27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주님이 일을 하실 때에 우리의 손을 잡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또한 명심하시기 주의 이름으로 당부합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험한 골짜기를 천사의 얼굴과 평강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우리가 순교할 영광의 기회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의 시대에 순교할 각오로 세상 앞에 믿음으로 당당히 나아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병든 경제와 얽힌 관계가 소생합니다. 주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믿고 평강과 풍성과 나눔과 번성으로 살아계신 기적의 하나님을 삶으로 증거하는 복된 저와 여러분 되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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