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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7.07.30.주일예배<고전9:25-27. 절제의 선물, 풍요.>

by 설렘심목 2017. 8. 2.

2017.07.30.주일예배<고전9:25-27. 절제의 선물, 풍요.>

바울사도가 개척한 아시아의 교회들은 한결같이 비슷한 문제를 안고 나름대로 충성하고 다투어 앞서거니 뒷서거니 믿음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중 약 2년 반 동안 머물면서 아테네로부터 함께 온 실루아노, 디모데와 함께 천막을 만들며 같은 직종의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만나 설립한 교회입니다. 고린도는 약 670만인구의 상업중심지인 대도시로서 풍성과 부패와 타락과 학문의 연구가 대단한 역동성있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헬라문화의 거대도시 고린도에는 철학자와 지식인들이 많아 제멋에 사는 비현실적인 방랑자들도 많았습니다. 거기에 유대교인들이 율법을 갖고 들어와 교회는 늘 문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간 법정소송문제, 부도덕한 성, 자유와 방종의 구별, 예배에 여자가 수건 쓰는 일, 무질서한 만찬과 예배행태, 성령의 은사 등 많은 것을 가르치는 본서는 특히 본문에서 절제하는 자의 보장된 승리를 열거합니다. 본문 25절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썩지 않는 면류관, 절제로 첫 문을 열게 되지만 절제가 분별력을 잃어 적정선을 넘어가면 금욕주의가 됩니다. 그래서 벧후1:7절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겅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함으로 그 끝을 사랑으로 마감하도록 권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절제의 선물, 풍요입니다. 즉 절제를 몸에 익히기만 한다면 그 사람의 한평생은 늘 풍요롭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낭비하고 사치하면 가난을 면치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이 주는 절제의 의미를 우리들 신앙생활과 실질적 삶에 적용해서 주님이 절제를 통하여 주시는 풍성을 어찌 이룰 것인가? 먼저 절제의 의미와 종류와 결과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1. 절제(節制)가장 알맞은 것의 고귀한 이름입니다.

 

절제의 미덕은 세상만사 모든 일에 해당되는 일인데 넘치거나 부족함이 없이 가장 적절한 것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의 삯은 사망이란 약1:15절의 말씀과 막1: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라니, 믿는 자에겐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신말씀은 우리의 소망과 욕심이 믿음가운데서 어찌 해석돼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남겨놨습니다. 여기에 믿음과 절제라는 명제가 등장합니다. 5장에서도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절제로 마무리합니다. 꽃은 절반쯤 피었을 때 보고 술은 기분이 좋아질 때 잔을 놔야 한다는 채근담이나 군자는 입에서 나오는 말을 삼가 덕을 쌓고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물을 절제하여 몸을 보양한다는 중국 역경의 충고도 모두 절제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 절제의 기능이 에덴에서 쫓겨나며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인간의 욕심은 선악과를 먹었고 선악과를 먹은 후 눈이 밝아져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제 뜻대로 행하는 불순종의 영이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욕심에는 제동장치가 없어서 결국 죄로 연결되고 죄의 결과는 사망이란 성경말씀은 여전히 우리의 생명을 깨우는 진리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병들어죽는 사람보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많고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너무 먹어 성인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인병으로 죽는 사람보다 더 많은 숫자가 바로 홧병에 죽는 신경성환자의 수라는 것입니다. 보통 심인성질환이라 부르는데 특별한 원인없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해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병입니다.“ 욕심이 죄로, 죄가 사망으로란 약1:15절의 말씀처럼 결국 인류 사망의 제 1원인은 욕심에 의한 홧병이라고 봐야 됩니다. 알고 보면 절제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 일들이고 절제는 우리네 인생에서 그리고 성도의 삶과 사역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절제하는 습관여하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무너뜨리거나 아니면 평생을 주님 앞에 풍요로 보장받거나 할 것입니다. 한 평생을 주장하게 되는 절제, 어떤 종류가 있을까? 22:37-38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 하나님 사랑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절제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전인격과 전생애와 24시간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과 정성과 에너지는 일정량을 지닙니다. 6: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주님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세상을 향한 마음과 목숨과 뜻을 절제해야 합니다. 마음과 뜻은 정신세계를 말하지만 목숨은 건강과 아울러 목숨을 바칠만한 의지도 포함합니다. 그렇게 주님위해 목숨마져 바치려면 세상에서의 세속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절제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체력과 시간과 물질과 마음이 하나님에 관한 것 외에는 극도로 절약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5:16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 체력의 조절과 시간의 절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몸을 드리려면 세속적인 향락과 쾌락을 잘라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는 절제보다는 강한 단절입니다. 세상모임에 나가 밤늦도록 어울리고 마시고 이튿날 지쳐서 예배가 성가 싫으면 그는 체력과 시간에 절제를 다하지 못한 예배실패자입니다. 체력과 시간은 우리의 생명을 싣고 달리는 열차아래 두 개 철로와 같습니다. 체력과 시간을 엉뚱한 곳에 빼앗기면 주님 앞에 드릴 모두를 잃게 됩니다. 반면 시간과 체력을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면 그는 귀한 일꾼으로 사용됩니다. 어떤 집사님은 세상친구들이 많아서 믿음생활에 방해가 되자 기도해서 얻은 한 가지 지혜를 사용했습니다. 세상관계에서 연락이 오면 매우 중요한 선약이 있어서였고 교회와 관련된 연락은 모두 늘, 예 한가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에게 없었고 하나님과 관계된 일은 모두 태고 전에 결정된 일이니 선약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신 그는 교회에 충성하고 세상에 시간과 체력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게 됐습니다. 직장에서 하는 일마다 칭찬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에겐 승진이란 선물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직장에서 관계가 불편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그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회식장소에선 볼 수 없어도 남들이 불편해 하고 힘들어하는 자리엔 꼭 그의 모습이 보입니다.

여러분. 체력과 시간을 주님위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쪽으론 최대한 절제하기 바랍니다. 시간과 체력의 절제로 할례받은 사람은 주님이 그의 길을 형통하게 하시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6장과 눅12장에선 너희를 위하여 보화를 하늘창고에 쌓아두라.”고 하면서 그 이유로 거긴 도적과 동록이 없고 더 중요한 이유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기때문이라고 하십니다.

 

2) 마음과 물질에 절제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당신 외에 어떠한 것에도 마음과 물질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돈과 물질을 함부로 사용하면 돈과 물질이 그를 함부로 대합니다. 돈에 절제치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을 단속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물질에 절제를 가하려면 먼저 마음을 절제해야 합니다. 남들이 누리는 사치와 허영 앞에 그리고 사람들의 환호와 칭찬 앞에 마음을 지켜내야 합니다. 창고문이 칭찬으로 열려버리면 적자인생을 면치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창고에 네 보물을 쌓으라고 합니다. 그것은 물질 가는 곳에 마음이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마음이 주님께 묶여 하나님 것이 되면 하나님은 당신의 풍성하고 기름진 모든 것을 다 내주셔서 거룩한 길에 귀한 자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이제 왜 주님이 생명으로 시작하여 모든 물질과 시간과 마음을 달라고 하시는 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 영광을 눈에 보이는 당신의 형상, 곧 택한 자들에게 드러내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 안에 우리들의 기쁨과 평강과 풍요가 있습니다. 마음과 물질이 주님 외에 고도의 절제를 받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많이 버는 자가 아껴 쓰는 자를 못 당한다고 했는데 고도의 절제는 근검절약하는 분명한 동기를 주님 앞에 두어야 할 줄 압니다. 26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며믿음의 경주, 곧 달음질에 분명한 방향이 있어야 하고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 동기는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않는 관을 얻고자 하노라고 한 것은 하늘의 상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상급은 땅의 허물을 덮고도 남아 저와 여러분의 현실적인 삶에도 풍성을 더하실 줄 믿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인류역사상 보기드문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전쟁도 없고 특별히 재앙없는 복된 시절을 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모든 게 풍부해서 여기저기 부패해가는 시대에 썩어버릴 관을 준비하지 말고 썩지 않을 승리관을 준비하라고 본문은 가르칩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과 보는 것과 쓰는 것에 절제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왜 아껴서 알뜰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나라 거기 썩지 않을 승리의 관을 받기 위해 우리들은 이 땅에서 절제해야 합니다. 분에 넘치는 소비습관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마음과 물질에 절제로 노력하는 자는 주님이 남은 생애를 풍성한 것들로 보장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절제된 신앙인격은 관계의 풍성을 보장합니다.

 

15:1절입니다. “유순한 말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이어 4절입니다.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그 외에 여러 군데에 있는 말씀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환난에서 그 영혼을 지키리라.”“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또 전5:2절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1) 입술의 절제입니다. 12:34절 끝에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낸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입술의 할례는 곧 마음의 할례입니다. 마음의 절제, 곧 절제된 인격은 입을 통해 말로 드러나고 그 절제된 언어생활은 신앙인격을 빛나게 합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그리스도의 빛으로 드러나는 신앙인격체의 주변에는 많은 영혼들이 안정감을 갖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왕, 히브리인의 왕을 닮은 사람을 보면 본성적으로 모여들게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제된 언어생활이 몸에 익은 사람들은 주변에 많은 좋은 관계들로 지경이 확산되는 야베스의 복이 넘치는 것이 보입니다. 저는 이시간 저와 여러분이 이 말씀으로 우리들 내면에 주의 강력한 임재와 간섭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혈기는 떠나갈지어다. 고함소리도 떠날지어다. 고함이 안 떠나면 마음과 사람이 떠납니다. 결국 자신의 고함소리가 자신을 더욱 외롭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절제력은 관계의 형통입니다. 그리고 관계형통은 모든 삶의 형통을 제공하게 됩니다. 인생이란 결국 관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늙어 숨질 때에 자신이 걸어온 길이 관계로 이루어졌고 그 관계는 자신의 신앙과 인격의 결과였음을 알 것입니다. 즉 자신이 맺어왔던 관계들이 자신의 인생전부였다는 것을 마지막 순간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입술을 절제하지 못함으로 원만치 못하고 외로워진다는 것을 잠언서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청년들에게 자기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인생 중 최고의 자산 가치라는 말씀을 다시한번 상기하게 됩니다. 27절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2) 손과 발의 절제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발은 이미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어느새 손에 잡혀 있습니다. 때로는 양심과 싸우지만 대부분 생각대로 움직이는데 이 생각을 바로 잡아 몸을 이기면 바람직한 행동이 나타납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것이 쉽지 않아도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들도 바울처럼 절제로 승리하라고 하십니다. 절제하지 못하면 우리가 복음을 잘 전하고도 어둠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친다는 것은 거룩한 생각을 피하려는 육신의 욕구를 강제해서 게으름과 안일함을 떨쳐내고 주님이 원하시는 경건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발은 내 몸을 움직여서 내가 서 있는 장소를 정하고 손은 움직여서 행동을 이룹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를 발과 손이 이루는데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이미 결정한 것입니다. 본문은 가야 할 곳과 하고자 하는 일들이 과연 절제라는 휠터를 통과한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즉 가고 싶은 곳 다가고 하고 싶은 것 다하고는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무너진 자기통제로 인해 결국 세상이라는 함정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딤전3:11에서 직분을 맡을만한 여성도의 모범에 정숙함과 정직함과 절제함과 충성됨을 들고 있습니다. 예배당과 직장과 가정 외에 가야할 곳이 있다면 거긴 전도자의 아름다운 발길이 머문 곳일 겁니다. 119:101절입니다.“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141:3절입니다.“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입술과 발을 통해 인생을 거룩으로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오직 주님께 바쳐지길 원합니다. 이번엔 롬12:3절을 함께 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3) 머리와 가슴의 절제입니다. 성도여러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의 함량에 알맞는 생각과 뜻을 품는 것인데 적절한 수위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소심해서도 안 되지만 만용을 부려도 안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자신을 제일 많이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손과 계획에 맡겨드리는 것이 가장 확실한 자신에 대한 보장이 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겨드린 사람은 주님과 사람 앞에 먼저 겸손합니다. 생각과 느낌조차 하나님께 의탁하려고 노력합니다. 무릇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검증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과한 생각과 느낌은 근본과 결과가 다릅니다. 이 생각과 이 느낌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과 뜻에 비추어 문제의 소지는 없는가를 늘 세심하게 관찰하고 고민해 봐야 합니다. 그렇게 머리와 가슴을 절제하면 늘 단순하고도 명료한 성도의 삶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생각이 복잡합니까? 그건 확실한 길을 찾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길을 찾으면 그냥 그길로 가면 됩니다. 그러므로 절제는 사람에게서 나지 않고 주님을 모실 때 길이신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심으로 열리는 성도의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의 자유는 진리를 따를 때 가능하고 자유는 절제가운데 행해져야 하는데 절제는 말씀이 다스려야 합니다. 고삐풀린 욕망과 적절한 절제 사이에서 성도는 말씀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 주실 풍성을 소망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듣고 결단케 하시는 주님을 찬송합니다. 풍요의 시대 절제의 미덕으로 주님께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절제를 결단으로 서원하는 자마다 말할 수 없는 풍성으로 채우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증거하게 되시길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