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25.주일설교<갈5:1.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행불행은 내가 결정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는 버릇을 가지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이지를 씹으면서 행복하다면 하나님이야 행복의 원천 아니겠습니까? 행복도 연습해야 합니다. 천국과 행복, 지옥과 불행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지 뵈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언제나 두 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짚신장사와 우산장사입니다.]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의 눈물이 서려있는 특별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의 활동으로 복음이 공격을 받고 흔들리니 바울은 매우 안타깝고 힘들었습니다. 본서의 내용은 바울자신의 사도직과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입증하면서 한편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득의, 오직 믿음으로 받는 구원, 그리고 율법과 죄로부터의 자유는 복음으로만 가능함을 힘주어 전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가 받는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먼저, 무언가에 묶여 노예가 된 상태에 있는 자에게 절실한 단어입니다. 진정한 자유자에겐 자유라는 말이 소용없습니다. 자유라는 말은 뭔가 자신을 압박하거나 그런 움직임이나 세력들이 보일 때 그 대상을 향하여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는 곳이라면 거긴 자유대신 핍박과 눌림으로 숨이 막히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은 죄에 묶이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복음으로 주신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당시 대표적인 율법준수로 할례를 들어 바울사도는 역설합니다. 구원이 할례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오는 것이며 그 소식은 복음입니다. 그런데 교회가운데 할례는 할례대로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이 파고 들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할례를 비롯한 모든 율법과 유대전통이 더 이상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본문은 증거합니다. 할례와 같은 각종 율법에서 풀려나는 자유, 그것은 먼저,
1.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합니다.
자유가운데 가장 크고 힘 있는 자유, 기쁜 자유는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적이 바로 나 자신이고 보면 가장 힘든 전투가 자신과의 전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 그러면 자신과의 전투, 어떤 것이 있습니까? 잘 알지만 잘 안 되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1) 죄성입니다. 죄인의 속성을 지니고 태어난 우리들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자신의 죄성 때문에 늘 수치와 고통을 당합니다. 롬1:29절 아래 인간이 지닌 악성을 소개하는데 모든 불의, 추악, 탐욕, 가득한 악의악독,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수군수군 대는 것,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부모거역, 우매, 약속파기, 무정, 무자비, 방탕한 것, 술 취함 등 인간의 악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죄는 다분히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들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런 죄의 성향이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과연 이러한 죄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복음으로 자유롭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복음과 약속위에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복음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나아가면 가능합니다. 종이 일솜씨로 받아들여질 때 아들은 상속자이기에 받아들여집니다. 종의 멍에는 지시명령에 눌려 마지못해 하지만 아들은 상속자라서 받은 구원의 기쁨으로 자원하여 하게 됩니다. 이는 누차 들어왔던 율법의 마침이요, 은혜의 시작인 믿음으로 받은 구원의 무한한 능력입니다. 그 능력, 구원의 무한한 능력은 죽음에서 우릴 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성향으로부터 참 자유를 줍니다. 노력해도, 스스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죄성, 주님이 이기게 하십니다.
2) 죽고만 싶은 낙심과 절망입니다. 삼상25장에 나오는 나발이란 자는 어리석기 짝이 없고 인색한 사람인데 돈이 많아 지혜롭고 어여쁜 아내를 둔 사람입니다. 그는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분개한 다윗의 소식에 너무 놀라 몸이 굳어 열흘 뒤에 죽었습니다. 절망과 낙심은 살 이유와 소망을 끊어버립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의미를 못 느낍니다. 차라리 죽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한번 절망과 낙심이 찾아오면 아무도 그를 돕지 못합니다. 죽음 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절망과 낙심,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 마음과 몸을 서서히 숨막히게 합니다. 자살을 시도했던 이들의 대다수는 당시 죽음만이 유일한 길임을 확고히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기억합니까? 광야의 문제는 뭐라고 했습니까? 목이 마르고 주려서 지치는 몸입니까? 아닙니다. 광야의 문제는 길이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문제는 왜 생길까? 하나님이 안보여서 생기는 것입니다. “♬나의 힘(길)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찬양하나이다.”시편기자의 노래처럼 첩첩산중이든 사막이든 광야같은 인생길에서 예수께서 길 되신 것을 뼈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길이신 것을 우리가 붙잡고 놓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낙심과 절망은 낮아져 겸손히 아름다워지는 계기가 될 뿐 결코 파멸의 시작이 아닙니다. 낙심과 절망 뒤에 오는 새하늘과 새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TV선전에 귀한 자막을 보았습니다. 화면에 큰 파도가 밀려옵니다. “꿈이 없는 사람에게는 거친 파도가 보이지만 꿈이 있는 사람에겐 그 너머 대륙이 보인다.” 제가 다듬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에게는 거친 파도가 보이고 꿈이 있는 사람에겐 그 너머 대륙이 보이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대륙 안 곳곳에 계곡과 능선이 파도처럼 쉬지 않고 인생을 향해 다가온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거기 모든 파도 잠잠케 명령하시는 주님의 손을 잡은 자는 평강과 기쁨이 넘치리라.” 계곡도 능선도 파도도 문제가 아니요 문제는 누구의 손을 잡고 가느냐 입니다. 내 인생 이제 내 것이 아니라 내손을 잡으신 주님의 것이고 내 삶의 모든 문제는 이제 여전히 내손을 잡으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임을 다시한번 잊지 않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낙심치 않기 바랍니다. 주님의 손을 놓치지 말고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쉬는 동안 악한 마귀는 조금도 쉬지 않고 우리와 주님사이를 낙심과 절망으로 이간질하고 방해합니다. 사단의 방해에 흔들리지 않을지어다.
3) 교만과 지나친 겸손입니다. 잠16: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지적합니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에 용기가 분수를 지나치면 교만이 됩니다. 주의 명령에 혈기가 들어가 교만을 지적받은 것은 모세의 므리바 물사건입니다. 바위에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했더니 아우성치는 백성들을 보고 화가 난 모세가 그만 감정을 이기지 못해 바위를 지팡이로 내리 쳤습니다. 반면 관용이 지나쳐서 교만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 초기에 있던 아말렉 진멸위반입니다. 아말렉을 다 없애지 않고 쓸 만한 것을 골라 데려온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앞서서 충성한다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따르는 것은 그래서 위험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첫째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인 죄성, 낙심과 절망 그리고 교만과 지나친 겸손에 이어 두 번째,.
2.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마13장, 막4장, 눅8장에는 각각 옥토와 박토,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의 비유가 나옵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세상에 속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세상염려, 재물의 유혹에서 자유하려면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 외엔 없습니다. 세상 죄와 무관하게 자신의 몸을 인류의 죄 값으로 드려 제물이 된 거룩하신 그리스도, 인류모두에게 영원하고도 유일한 생명과 소망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유혹과 재물과 명예와 쾌락은 일시적으로 지나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물리칠 힘이 인생들에겐 없습니다. 얼마나 꿀처럼 단지 잠시라도 더 내 곁에 머물러있기를 소원하게 되는 게 우리 육성이요, 본성입니다. 누구 말에 의하면 죽기 전엔 없어지지 않는 게 육체의 본성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세상에 몸을 담고 있고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까? 그 묶인 사슬을 누가 풀어주겠습니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주님 외 누가 과연 우리로 하여금 묶인 세상의 닻줄과 죄의 고리를 끊어내겠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늘 간절하게 요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령이 저와 여러분 안에 오시면 정녕 세상 죄로부터 자유로울 줄 압니다. 사람은 죄를 먹고 다시 토하면서 살지만 성령의 강력한 임재는 거듭난 새 생명을 더욱 강화하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성령의 충만으로 강화된 믿음은 세상이 이기질 못합니다. 세상 죄가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히11:38절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이어 39절 앞부분에서 이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은 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믿음으로 증거(더 나은 안뵈는 증거)를 받았다면 세상의 모든 염려와 죄의 유혹과 잠시 지나는 육체의 사슬에 묶이지 않는 자유가 넘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으로부터의 자유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증거가 뒷받침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하려고 주신 자유는, 따라서 언약의 완성 복음이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그를 믿는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기 원합니까? 세상이 능히 이기지 못할 귀한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사방천지에 깔려있고 자신의 인생전반에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구원의 증거를 우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증거를 받지 못하여 능력과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약국과 명의가 있어도 여전히 병들어 죽는 것처럼 증거가 아무리 많아도 세상 속에 파묻혀 하나님을 모른 채 죽어가는 영혼이 부지기수입니다. 눈에 뵈는 숱한 증거를 믿음의 눈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모두인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와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에 이어 세 번째,
3.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려면 인간적인 전통이나 개인의 능력, 사회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풍토에서,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 오직 복음만이 모든 삶의 잣대와 표준과 목표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특별히 민족마다 민속이 있고 민속가운데 다분히 스며있는 무속적인 풍습은 이생의 행복과 내세의 보장을 이름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악신들에게 의지하는 무지를 대대로 물려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자유뿐입니다. 복음이 율법에 묶였던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할 때 그간에 잘못알고 있었던 고정관념, 바르지 못한 성경해석이 복음의 은혜가운데 모두 부서져 잘 정돈되기 바랍니다. 본문은 전통에 의해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마치 구원을 못 받는 것처럼 여기는 성도들에게 더 이상 할례와 같은 율법에 묶이지 말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자유로울 것을 선언합니다. 나아가 본문은 복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율법으로 인해 할례를 받으려고 한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와 무관한 자요, 율법에 묶인 자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으로 우리도 율법에서 자유하기 원합니다. 성례식 외에 전통과 의식은 시대와 사람이 만든 것이지 주님이 주신 건 아닙니다. 그래서 전통은 필요에 따라 세워졌다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의식은 외형을 통해 내면을 다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의식에 진리가 빠지면 외식이 됩니다. 전통도 필요하고 의식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유 안에서 세워지되 자유롭게 하신 주님 뜻이 충분히 반영돼야 합니다. 찬양에 전자악기와 드럼을 사용한다고 이단으로 몰렸던 일이 얼마 전입니다. 복음은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다만 끝내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요즘 전도집회에서 개그를 하고 목사님이 청바지에 티를 입고 나와 설교를 합니다. 힙합가수가 랩을 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흑인교회에는 일주일 간 온몸을 땀으로 목욕하듯 열정적으로 흔들며 노래합니다. 브라질 삼바축제처럼 보입니다. 우리교회, 춤추며 찬양하며 선교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끼 있는 친구들을 많이 보내주실 것입니다. 춤쟁이가 와서 구원받으면 춤추며 선교합니다. 어떤 형식도 어떤 규율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유를 막지 못합니다. 성경이 허락하는 한 우리는 즐겁게 자유롭게 주를 섬길 수 있습니다. 믿음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있어 기도회에 못 오면 집에서 더 진한 기도를 하면 됩니다.
복음으로 자유롭게 된 자유위에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죄의 노예당시 메었던 그 멍에를 메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를 결박하고 있는 율법의 오랏줄을 끊어내야 합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거나 해야만 된다는 것이 주님의 사랑에 감동함으로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열정과 기쁨이 되기 바랍니다. 세상일에 설레거나 흥분하지 말고 그리스도에 관한 일, 교회에 관한 일에 설레고 흥분하기 바랍니다. 그것은 진정 여러분을 자유롭게 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여러분의 삶이 자신의 죄성과 교만으로부터, 세상 죄의 유혹으로부터, 모든 옥죄이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선포하게 할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자유를 선포할 때 원하시면 아멘하기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율법에서 자유한 자 복음에 묶여 행복한 그리스도의 노예로 남은 평생 후손과 함께 평강할지어다. 오직 복음에 삶을 의탁하고 복음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하는 여호와의 백성들, 예수그리스도의 고결한 신부된 자들, 세상으로부터 자유할지어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 자유롭게 된 자들 오직 예수만이 소망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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