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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7.06.18 주일설교<딤후1:15-18. 부겔로와 허모게네 그리고 오네시보로>

by 설렘심목 2017. 6. 18.

2017.06.18 주일설교<딤후1:15-18. 부겔로와 허모게네 그리고 오네시보로>

[천국 가는 확실한 방법, 천국에 갈 자격이 없음을 인정(3:23) 예수님만이 당신의 유일한 희망인 것을 믿어야(3:16, 14:6) 당신의 믿음을 그리스도에 두어야(1:12, 6:23)/의에 주리고 목마름-의로운 삶을 선택할 때 주어지는 불편과 고통을 감당할 힘을 간절히 원함으로 목이 마름]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탁월하도다.”(1: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가운데 백합화요, 남자들 가운데 내 사랑하는 자는 수풀가운데 사과나무 같도다.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내사랑, 내생명이여.” 읽기만 해도 사랑하는 이로 인한 기쁨과 감동이 전해져 오는 아가서의 노래입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랑의 절규를 들어봅니다. “오 나의 생명, 나의 사랑, 나의 작은 아기야. 차라리 네 대신 내가 죽었더라면”3천년 된 아기 미이라 앞에 적혀 있는 글입니다. 아기의 관 앞에서 오열하는 부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행불행은 이렇게 관계 속에서 익어갑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5:17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인생의 진정한 기쁨이 사랑하는 관계에서 시작되고 하나님의 사역도 행복한 관계로부터 큰 힘을 얻고 있음을 바울의 고백을 통해 보게 합니다. 바울사도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거의 유언같은 마지막 편지를 써 내리는 중에 자신의 아픔과 기쁨을 몇몇 관계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바울의 인생여정 사역의 현장에서 어떤 기쁨과 어떤 아픔이 누구를 통해 교차했는지를 살피며 우리들 주변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15절을 함께 읽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1. 바울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입니다.

 

바울사도가 옥에 갇히는 과정에 대부분의 교인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서거나 그를 면회하는 일에 몸을 사림으로 바울에게 깊은 아픔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특별한 관계였지만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로마당국의 눈치를 봐 바울을 못 본 척 팽개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더욱 큰 상처가 된 것입니다. 당시는 네로황제가 로마시에 불을 내고 기독교인에게 덮어씌워 박해가 한참이던 때였습니다. 교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쫓기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짧은 믿음으로 간신히 버티던 대부분의 성도들이 환경에 눌려 바울의 곁을 떠나고 마는데 그중 특별히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거론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렇게도 충직하던 부겔로와 허모게네마저 떠나다니크게 허탄해 하는 바울의 심경입니다.

 

의지하기 위해 믿고 만나야 할 분이 하나님이라면 인간은 속고 실망하고 채워주려고 만나는 겁니다. 그래도 인간은 서로 뭔가를 기대하고 설레면서 만납니다. 그러나 여전히 실망을 주고받게 되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관계입니다. 처음 만날 때야 제법 그럴싸해서 상대방을 사로잡거나 즐겁고 가슴 뛰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본색은 드러납니다. 긴장이 풀리면 보통 드러나고 그 때에도 드러나지 않은 실망스런 부분은 거의 심한 바람이 불 때에 부끄러운 실체를 드러내서 실망을 안겨줍니다. 오늘 바울이 거명하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관계 속에서 일하고 사랑하고 죽어가는 인간에게 실로 적잖은 아픔과 실망이 늘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하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렇게도 굳게 믿었던 사람들, 그렇게도 다정하게 지내던 사람, 그렇게도 다짐했던 혈맹들이 어느 날 다가온 파도에 밀려서 신의를 저버리고 나만 살겠다고 멀리 달아날 때의 그 허망함, 배신감, 상실감을 어떻게 말해야 옳을까? 성경에도 인간의 배신은 수없이 기록돼 있습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왕위를 빼앗겨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모세는 믿었던 동족에게 배신 당해 미디안광야로 도망갑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자신이 생명 걸고 구해낸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깁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백성을 구하러 오신 그리스도가 당한 배신은 인류가 당한 배신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악한 배신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이 당신의 아들을 등진 이 엄청난 사건을 1장에서 어떻게 소개합니까?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건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하나님은 오늘도 어둠에 묶인 자들에게 빛으로 오셔서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그런데 자기 땅에 오신 자기들의 구세주를, 택함 받은 그 백성들이 환영하지 않았고 오히려 돌을 던져 십자가에 달아 참혹하게 죽여 등을 돌렸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최대의 만행과 배신, 바울사도는 그렇게 비통한 길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종, 곧 노예로 부르신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피땀 흘려 키운 교회로부터 상상치 못할 상처를 입어도 그 고난을 주를 향한 충성과 영광으로 삼았습니다. 그 고난을 통한 충성과 기쁨과 영광은 주께서 친히 찾아주시고 택해주신 자 외에는 허락되지 않은 시온의 영광이라는 바울의 고백에 아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 앞에도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언제나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다 떠나도 그 사람만은 내 곁을 지켜주리라 믿었던 그 사람도 내 등에 칼을 꽂을 수 있습니다. “브루투스. 너마져시이저가 아들처럼 아꼈던 브루투스마져 역모자 가운데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사역 앞에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은 브루투스가 나타나도 우리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남겨진 그리스도의 고난을 택함받은 자답게 담담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귀한 종에게 주시는 기쁨이 오늘 끝으로 소개할 오네시보로의 집입니다. 16-17절입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바울사도를 등지고 떠나 그를 많이 아프게 한 아시아인들이나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는가 하면 한편 바울을 자주 찾아와 격려해주고 사역과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준 믿음의 동지가 있었습니다.

 

2. 바울을 찾아와 자주 격려하며 힘을 북돋아 준 오네시보로입니다.

 

바울은 이 오네시보로의 집에 주께서 복주시기를 빌었습니다. 바울의 축복은 오네시보로가 아니라 오네시보로의 집이라는 점입니다. 복은 개인이 받는 게 아니라 가정이 함께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 바울의 고백을 보면 오네시보로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동지였습니다. 먼저 그는 로마에 수감된 바울사도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주 격려했습니다. 그는 바울사도가 사슬에 매여 죄수복을 입고 있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끼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가 어찌해야 오네시보로같은 자가 되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1) 바울사도가 사슬에 매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1:8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건 떳떳하게 여겨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죄인을 면회하러 갈 때는 얼굴이 밝지 못합니다. 죄인의 친지 가족으로서의 죄책감과 고통이 느껴져 눌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거리낌없이 도리어 떳떳하고 자랑스러워합니다. 복음으로 넘치는 구원의 감격이 복음의 사환으로 부름받은 바울사도를 자랑스럽게 여겼기에 그 얼굴조차 환했던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특별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오네시보로로 하여금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바울사도를 만나게 한 것일까? 그것은 복음에 대한 확신과 구원에 대한 감격,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살아계신다는 확고한 믿음, 즉 하나님이 보내셨고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신 역사적인 사실에 따른 흔들림 없는 믿음이 그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과 주께서 친히 불러 세우신 복음의 나팔수요, 증인된 자 바울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말할 수 없는 기쁨이요,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에게는 가까이하면 위험하고 수모를 당할 수 있는 바울이란 존재가 오네시보로에겐 이와같이 더없이 자랑스러운 이름, 당당한 이름, 영광된 이름이었습니다. 우리도 오네시보로처럼 그리스도가 자랑스럽고 늘 선전하고 싶은 저와 여러분 모두의 높은 자존감이 되기 바랍니다.

 

2) 사슬에 묶인 바울사도를 부지런히 찾아와 자주 격려했습니다.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더 가까운 것은 자주 만나지 않으면 누구나 서서히 잊어가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받는 자보다 더 가여운 이가 버림받은 자이고 버림받은 자보다 더 가여운 이는 잊어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주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눠야 가까워지고 아는 것만큼 사랑하게 되며 신의를 쌓아가게 됩니다. 로마당국이 두려워 찾아주는 이 별로 없는 바울을 오네시보로가 자주 찾아와 대화하고 격려하며 힘을 북돋았습니다. 독신으로 늙은 하나님의 사환에게 자칫 찾아올 수 있는 자기연민과 인간적인 허탈감과 무력감을 주께선 오네시보로를 통해 물리치게 하시고 큰 활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배마무리에서 받는 축도는 사실상 예배의 꽃입니다. 가장 미련한 사람은 예배 잘 드리고 축도 때 나가는 사람이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좀 늦게 와도 축도만은 꼭 받고 가는 사람입니다. 축도는 바울사도의 서신서 끝부분의 인사를 정리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선포하는 순간입니다. 이 때 끝 쪽에 성령의 교통하심이란 말이 반드시 들어갑니다. 서로 통하는 것이 교통입니다. 뜻이 서로 자주 왕래하여 가까워져 화목하게 되는 교통인데 위로는 성령님과 교통하고 옆으로는 지체들과 서로 화목한 교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교통은 오네시보로처럼 먼저 부지런하게 찾아주고 만나야 합니다. 둘이 하나 돼 화목을 이루는 교통이란 말은 첫째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르면 교통하지 못합니다. 잦은 왕래로 흉금을 털어놔야합니다. 다음은 질책과 추궁보다는 위로와 격려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만 먼저 알면 가르치려 합니다. 지적하고 싶어 합니다. 조금만 비뚤어지면 야단치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고쳐주고 싶은 겁니다. 먼저 말없이 본을 보였던 바울은 한참을 기다린 후에 비로소 입을 열었습니다.

사슬에 묶인 노종을 찾은 오네시보로는 허물없이 격의없이 바울사도를 격려하고 벗이 돼줬습니다. 바울사도는 이 오네시보로를 잊지 못해 딤후 4:19절에서도 브리스가와 아굴라에 이어 문안하라고 거듭 당부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건 바울사도의 고달픈 복음사역현장에서 시원한 생수 한잔과도 같은 활력소가 됐던 오네시보로, 그는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신 바울의 친구였습니다. 바울은 그 집에 복을 빌었고 오네시보로는 바울에게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위로하심과 채우심이 이렇게 택하신 귀한 자들을 사용하시니 우리가 늘 그 안에 들기 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양의 문인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들은 예배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자주 만나 깊은 교제를 많이 해야 합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 세미나, 특강, 훈련 아무리 많이 해도 소용없습니다. 바울을 아프게 해서 하나님나라에 힘을 실어주지 못하고 신의를 저버린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아니라 시원한 생수처럼 하나님과 그 사환들을 유쾌히 해드리는 오네시보로. 우리 가운데 이런 오네시보로가 되기를 원하는 분마다 오른 손을 높이 들면 우리 주님 앞에 제가 기도합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좋으신 주여. 잠시 왔다가는 인생길 나그네 길에서 하나님 앞에 진정한 헌신자가 되기 원합니다. 지금 손든 백성들을 받으소서. 자신만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기쁨을 구하는 귀한 자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더욱 잘 섬겨서 상처를 주는 자가 아니라 지친 마음에 환한 얼굴로 희망과 기쁨을 선사하여 주님나라에 큰 힘이 되어드리는 오네시보로같은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그 온집에 복을 받고 위로와 평강이 넘칠 줄 믿습니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비전 믿음의 권속들, 참사랑을 바탕으로 한 희생과 헌신과 섬김이 하나님과 그 나라에서 귀히 쓰임받아 자손대대로 예수로만 살면서 받을 복을 다 받을지어다. 만인이 저들을 보고 예수그리스도가 만복의 근원됨을 알고 주께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