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28. 주일예배<삿7:2-8. 기드온의 삼백용사>
[어린 시절 제가 바이올린소리를 매우 좋아했는데 친구어머님이 이 앓는 소리가 그리 좋으냐고 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누구에겐 황홀한 음악이지만 누구에겐 이 앓는 소리입니다. 지구에 60억 인구가 살아가는데 모두 모양이 다르듯 생각도 다르고 사는 게 다릅니다. 삶이 달라 전혀 다른 세상에 살며 믿든 안 믿든 알든 모르든 예수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과 증거로 우릴 찾아오셔서 천국과 영생을 열어주셨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나온 후 모세의 지도권을 여호수아가 받아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한 뒤 여호수아, 왼손잡이 에훗, 여선지자 드보라에 이어 다섯 번째 사사가 된 기드온의 이야기는 다음 사사 입다와 삼손과 함께 널리 알려진 사건입니다. 기드온의 삼백용사하면 대단한 위용과 헌신의 대명사이듯 기드온도 매우 용맹스런 지도자인데 그 시작은 그렇질 못합니다.
농사 짓던 청년으로 기드온은 매우 신중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고 할 때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서 밀 타작을 조용하게 하던 중입니다. 점령자 미디안 사람들의 약탈이 심해서 생활이 말이 아닌 이스라엘백성들은 타작이나 농사추수에 늘 조심하지 않으면 뵈는 대로 뺏겼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널 택했다는 말을 듣고도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그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해 바위위에 올려놓은 제물이 불로 태워지는 것을 보고서야 아버지 집에 있는 바알과 아세라 상을 찍고 제단을 헐어 버리는데 그것도 동네사람들이 두려워 밤에 몰래 도끼를 휘두릅니다. 성경은 이어 양털로 또다시 확인하는 소심한 기드온을 소개합니다. 이 정도라면 신중한 청년이라고 하기 보다는 겁이 많다고 봐야 합니다. 용기란 확신에서 나옵니다. 기드온은 돌다리를 두드리듯 제단의 불과 양털의 기적을 확인한 뒤에야 미디안과 싸울 용사들을 모집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기드온의 삼백용사입니다.
1. 턱없이 부족한 숫자, 인간의 불가능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듭 승리를 약속받은 기드온에게 모여든 사람의 수가 3만 2천입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연합국 군대의 수가 13만 5천이니 3만 2천으로는 많이 부족한 숫자입니다. 거기서 다시 줄어든 삼백 명, 13:1입니다. 그냥 서있기만 해도 무릎을 꿇릴 수 있는 숫자지만 인생만사가 보이는 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거듭 일러드리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것에 의해 움직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래서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밝힙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이라면 기드온의 300명도 대군이었습니다.
성도여러분. 교회가 눈에 보기에 작다고 낙심하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의 진정한 능력은 우리를 들어 당신의 나라를 세워 가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내 능력은 부족한 내가 아니라 내 믿음보시고 나를 통해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삼백용사는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숫자입니다. 그러나 그 삼백이란 적은 수 뒤엔 안보이나 막강한 힘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왜 적은 숫자를 원하셨는지 본문 2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2. 구원은 오직 당신께만 있음을 알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 때도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비롯한 그 모든 일 뒤에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는 뜻을 밝혔습니다. 하나님은 왜 자꾸 자신을 드러내려하십니까? 인간이 (하나님과 사람을)몰라서 망하기 때문입니다. 사 5:13입니다.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며” 한편 호세아선지자를 통해서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지식과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아는 것,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마음과 몸을 드려 절하고 가까이 하는 것을 결코 놔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멀어진다는 건 타락이요, 멸망이요, 심판이요, 모든 불행의 시작이 분명한데 그것을 책망과 징벌로 막으시는 것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인 것입니다. 애가서 말씀처럼 하나님의 본심은 인생들이 근심하거나 고통하지 않고 주를 잘 섬김으로 기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첫 시작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군사모집에 급히 달려온 백성들의 수는 3만2천명입니다. 적군의 수에 비해선 많이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기엔 그것도 넘치는 숫자입니다. 아직도 미련한 백성들에겐 어떤 정황에서도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수가 너무 많아 내가 이기게 하면, 이긴 뒤에는 너희들 힘으로 이겼다고 하며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수를 바짝 줄여서 누가 봐도 전혀 승리가 불가능한 소수로 만들어라. 부족한 숫자로 내가 이기게 하리라.”
3. 삼백명, 소수의 정예를 골라 세웁니다.
본문 3절입니다.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2만2천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1) 두려워 떠는 자를 돌려보냅니다. 사 41:10절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외에도 많은 곳에서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반복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늘 세 가지로 묶여 있는데 ①두려워 말라. ②놀라지 말라. ③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내용입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 말고 놀라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적군 앞에서 두려운 것은 승리로 이끄실 하나님의 동행을 믿지 못하는데서 온 것이며 그것은 불신앙이니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에게 전쟁을 맡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4:18)” 하나님 동행을 못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하나님의 전쟁이나 하나님의 일에 앞장 세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으시는 줄 믿어 아멘입니다. 먹구름이 가득 덮여 해가 안 뵌다고 태양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근심의 먹구름이 하나님조차 보이지 않게 한 겁니다. 의심의 안개, 염려의 구름이 믿음의 열풍과 성령의 바람으로 깨끗하게 사라지기 바랍니다. 비구름이 내 앞을 어둡게 해서 빛이신 하나님을 가로막아도 그 구름은 반드시 반가운 빗소리와 함께 우리 삶에 풍작을 이루게 하실 하나님의 은혜로 바뀔 줄 믿습니다.
두려워 떠는 자가 돌아간 후 남은 자의 수는 일만 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도 많으니 물가로 데려가 거기서 더 줄이라고 하십니다. 본문 5~6절입니다.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2) 방심한 자를 돌려보냈습니다. 지시대로 냇가에서 물을 먹게 했는데 물을 먹는 방법에서 하나님마음에 드는 자는 삼백 명뿐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처럼 엎드려 입을 직접 대고 먹거나 무릎을 꿇고 물을 먹지 않았습니다.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는다면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없고 엎드린 등 뒤에서 누가 공격을 해도 전혀 무방비입니다.
사막에서 물 한모금은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물 한 모금에 온 민족의 생명과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방심한 자는 정예부대의 수에 들지 못했습니다. 전쟁에 실패한 것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경계에 실패한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이 군에는 불문율입니다. 싸우다 지면 어쩔 수 없지만 보초가 방심해 적의 침입을 못 보면 총 한발 쏴보지 못하고 몰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선 기드온에게 물을 먹으면서 동시에 사주경계를 한 삼백을 따로 세워 앞장선 용사가 되게 했습니다.
여기서 300명 외에 집으로 돌려보낸 수를 살펴봅니다. 두려워 떠는 자는 전체수의 63%, 십 중 칠팔이 두려워서 돌아갔고 방심한 자는 1만중 9,700명이니 방심하지 않은 자는 1만에 300명, 즉 백에 세 명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숫자가 무엇을 말하는가? 즉 두려워하는 자가 절반을 넘어 63%라면 방심하여 싸워보기도 전에 패배할 수 있는 자들의 수는 1백중 97명, “거의 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3만 2천중에 뽑힌 용사는 겨우 300, 100명 중에 한명입니다. 기드온의 용사는 그래서 일당백을 감당하는 용사가 된 것입니다.
이제 숫자가 주는 의미를 정리해봅니다. 싸움을 앞둔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하나님의 동행을 믿지 못해서, 또는 심장 약해 두려워 떠는 자가 절반이 훨씬 넘는 숫자요, 경계에 게을러 방심하는 자로 싸움도 하기 전에 패배할 수 있는 자가 100명중 97명, 거의 다요, 하나님의 동행을 확신하여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깨어있어 사방을 경계하는 자는 겨우 100명중 한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을 기드온의 용사처럼 부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고르고 또 골라서 매서운 신앙훈련을 통해 100명 중 한사람으로 키워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서툴러도 능력은 익숙한 것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그리고 진실한 믿음입니다. 주님 향한 절실함이 사무쳐서 애틋하다면 그것은 주님 앞에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 삼백 외 남은 백성은 겁 많고 느슨하다 해서 다 집에 보낸 게 아니라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들게 했습니다. 후방지원부대가 결성돼 앞에서 칼을 든 자들 못지않게 전투력에 중요한 몫을 감당합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구원하신 자들, 하나님 앞에는 버릴 자가 없습니다. 전방에서 싸울 자는 맨 앞에서 칼을 들 것이고 후방에서는 기도로 물질로 드러나지 않게 귀한 일을 하게 됩니다. 성도로서 한 평생을 살아가는 일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들을 잘 감당함으로 그 진가를 드러내게 됩니다. 100백 명 가운데 뽑힌 한 사람은 앞에서 칼을 들고 적진으로 돌격할 것입니다. 그는 두려워 떨지 않고 깨어 기도하며 최선을 다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적을 이루는 도구가 돼 승리의 전사라는 이름을 받게 됩니다. 일당백의 기드온용사가 되는 겁니다.
한편, 300용사에서 물러난 이들은 양식과 나팔을 잡았습니다. 비록 칼을 잡진 못해도 칼을 쥔 이들을 끝까지 기드온용사가 될 수 있도록 지원에 헌신됐습니다. 전방이나 후방이나 그들은 주의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지친 전방용사들은 후방으로 잠시 올 것이고 후방에서 용기를 얻은 자들은 전방으로 자원하여 칼을 차고 달려갈 것입니다. 고전 1:24절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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