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04. 주일예배설교<마13:24-30.36-43. 추수 때까지 함께 갈 가라지>
[최고급향료는 병든 고래의 기름에서 추출, 빼내지 못한 이물질을 품은 조개는 자신이 진주조개임을 모르고 큰 돌맹이를 아프게 품고 있는 것, 지워지지 않는 열등감 등 고통이 훗날 인격의 향기가 됨.]
진짜라는 말은 가짜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 말입니다. 본문의 가라지는 밭에서 나는 볏과의 한해살이 풀인데 벼 사이에 자라 알곡을 바라는 농민들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해초입니다. 이 가라지를 논에서 솎아내는 게 피사리입니다. 쌀가마를 열어 거뭇거뭇한 이게 많으면 쌀 등급이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밭에 난 알곡과 가라지를 예로 천국을 설명하십니다. 37-39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1. 좋은 씨를 뿌리는 그리스도와 악한 씨를 뿌리는 마귀입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예수님과 악한 씨를 뿌리는 마귀가 세상이라는 밭에서 벌이는 전투가 인생입니다.
1) 좋은 씨를 뿌리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라는 모판에 씨를 뿌려 키웁니다. 모를 내기 전에 씨를 틔워 싹이 나게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말씀으로 제자를 양육해 어린 티를 벗으면 세상이라는 밭을 향해 나갑니다. 심겨진 씨앗들은 나름대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려 가지를 뻗고 잎을 냅니다. 그리고 꽃을 피워 수정을 한 뒤 열매를 맺습니다. 수정을 위해 향내를 내 벌 나비를 오게 해서 암술머리에 수술의 꽃가루를 접촉시키는 걸 보면 어찌나 신기한지요? 동식물이 한결같은 이 생명의 신비 앞에 누가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을까? 생명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후손을 퍼뜨려가듯이 하나님의 아들들도 이 땅에 지속적으로 심겨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2) 악한 씨를 뿌리는 원수 마귀, 사탄입니다. 간교한 마귀는 교회보다 부지런하고 교회보다 영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본문 40-43절을 통해 마지막 결산을 어떻게 예언하고 있습니까? 41-42절입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교회는 무능력해보이고 미련해보여도 주께서 지도하시고 이끄셔서 끝내 마귀를 누르고 승리하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그럼에도 악한 씨는 여전히 번성하여 좋은 씨를 괴롭히는 가시가 되어 평생을 힘들게 하는 정말 반갑지 않은 동반자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가라지를 뽑아버리길 바랬던 제자들의 질문에 주님은 추수 때까지 곡식과 함께 두라고 하십니다. 가라지 뽑으려다 알곡도 뽑힐까하는 것이었고 추수 때 가라지는 먼저 거둬들여 불사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눈으로 악한 자의 멸망을 볼 것입니다.
2. 곡식을 보호하기 위하여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놔둡니다.
오른 손에는 사랑을 왼손에는 공의를 쥐고 인생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찬송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매우 길게 참는다고 여러 곳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행13:18절은 광야에서 약 40년을 참아주셨다고 했고 롬3:25절과 벧후3:9절에선 각각 그 길게 참으심이 죄인들이 하나라도 더 회개하여 주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의로우심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와 여러분 우리에게도 확실한 증거가 충분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공의가 정확무오하게 발동된다면 그 공의의 심판아래 과연 살아남을 자가 있을까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가? 이미 우리가 잘 아다시피 죄뿐인 인간에겐 여호와의 공의를 만족시켜드릴 아무런 의가 없습니다. 결국 속죄제물에 의존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자와 제물의 온전한 연합, 즉 예배자 자신이 제물이 되어 번제단에서 성령의 불로 태워져 옛자아의 화형이 이뤄지면 그때 완성된 대체공의에 의해 새 영, 그리스도의 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났다 해도 우리가 세상에서 땅을 밟고 육신의 옷을 입고 있는 한, 꾸준히 자라나 끊임없이 올라오는 육체라는 죄성은 죽기까지 계속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육체는 먹고 누어야 하고 사랑하고 애기를 잉태하는데 이 일들을 피할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먹고 눕는 일이 욕심과 만나 제자리를 떠나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욕심없는 사람없고 육체를 이길 자 없으니 인생마다 죄를 떠나 자유롭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라지 태우려다 알곡이지만 종종 가라지 역할을 하는 성도까지 태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여기 교회를 이뤄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매우 길게 참으시는 결과의 증거인 줄 알고 백번감사입니다. 왜? 우리 모두 종종 하나님과 교회를 힘들게 했던 가라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생명의 예수보혈 알부민, 곧 말씀을 먹고 알곡이 돼 이렇게 예배합니다. “그러면 이 가라지들을 우리가 가서 뽑을까요?” “아니 놔 두어라. 가라지 뽑다보면 성한 곡식 뽑힌다.” 벧후3:9절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셔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가라지중에는 아직도 회개하고 천국백성 될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죄를 질 때마다 심판하시면 이 땅에는 살아남을 자가 없으니 많이 참고 오래 기다리시는 주님은 그 용서를 일곱 번에 일흔번이라도 해주라고 하십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께 돌아와 불에 던져지지 않기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 앞에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한 가지 일로 여러 개를 거두십니다.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놔두어 멀쩡한 곡식을 다치지 않게 것 외에 우리는 가라지에 대한 또 다른 하나님의 배려를 보아야 합니다. 삼하 7:14절입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3. 가라지를 통한 경건의 연습이요, 거룩함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주시는 복과 권세의 영광을 다 받으려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들이 우리 삶과 몸과 인격에서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몸이 하나님의 전이 되도록 우리를 내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헌신이라고 합니다. 헌신은 거룩한 땅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마귀가 사용하는 범죄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잠시도 죄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는 찾아드는 나태와 육욕과 교만한 자기이름, 자기만족의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을 효과적으로 하도록 하는 것이 가라지의 등장입니다. 염소는 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걸 못 봅니다. 그래서 게으른 양무리 가운데 염소의 뿔은 양들에게 긴장을 주고 운동량을 채워서 건강을 유지시킵니다. 아담 가정에 카인은 선악과의 범죄로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뿌려놓은 가라지였습니다. 지금도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카인은 인간의 원초적인 악을 깨닫게 하는 가시입니다. 믿음으로 얻은 언약의 씨 이삭은 불신의 가라지 이스마엘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열한제자는 가룟유다라는 가라지를 경험하여 더욱 견고한 믿음으로 성장해서 열두사도로 순교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막대기와 인생채찍을 써서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일들을 남김없이 이뤄 가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인간스스로 만든 함정이 가라지 노릇을 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부족과 실수가 스스로에게 가라지의 역할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또 잠언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는 말씀과 더불어 자라면서 꾸지람을 듣지 못한 아이가 어떻게 가라지가 되는지 다윗의 잘생긴 아들 압살롬을 보며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가라지들과 함께 갑니다. 가라지로 인하여 느슨한 믿음을 양질의 믿음으로 유지, 발전시키고 우유부단한 결단을 깨워 야무진 용사로 만들어 가시는 주님을 찬송합니다. 가라지의 모습으로 보여도 알곡으로 태어난 자는 반드시 구원받아 알곡의 사명을 다할 겁니다. 반면 알곡으로 보여도 가라지는 가라지입니다. 가라지를 만나든 내가 가라지가 되든 문제는 그 가라지를 생명의 알곡으로 변화시키는 주님과 어떻게 만나느냐하는 것입니다. 골고다언덕 십자가는 우리가 살며 만나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최고의 순종과 사랑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드리는 최선의 현장, 우리들 본향의 관문입니다. 우린 모두 십자가에서 주님이 피를 흘리실 때 태어났고 육체의 마지막순간 그 분을 따라 천국으로 갑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미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로 율법과 공의가 완성됐습니다. 부활의 주께서 흘린 십자가의 보혈은 죽음을 이긴 확실한 증거로서 대단한 권세를 갖습니다.
“엘리사가 죽으니 그를 장사하였고 해가 바뀌매 모압 도적 떼들이 그 땅에 온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 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왕하13:20-21” 그 보혈, 그 능력이 가라지나 가라지가 되는 모든 정황가운데 접촉되면 절망가운데 소망의 빛이 비칠 줄 믿습니다. 고통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수치가 변하여 영광이 됩니다. 세상 끝날까지 가라지를 놔두라 하신 주님 뜻을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주님 뜻은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거긴 택한 자를 사랑하시고 단단하게 하는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가라지로 인하여 우리는 더욱 좋은 씨가 되기 위해 분발할 것입니다. 느슨했던 모든 자세를 털어내고 허리띠를 바짝 조여 가라지를 통한 찔림과 분노를 도리어 선하게 바꿔서 사용합시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것에서는 성장이 없습니다. 눌리고 아프고 짜증날 때 그 역풍을 도리어 발판삼아 한층 위로 뛰어오르는 믿음의 성숙을 모두 이루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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