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21. 주일예배설교<신10:12-13. 성도의 행복은,>
[궁핍은 영혼과 정신을 새롭게 하고,<잠7:14> 난세가 잠자는 영웅을 깨운다. 우리가 종종 만나는 불편과 부조리는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태어나진 않는다. 다만 받아들이는 자세 따라 달라진다.]
소원, 소망, 절실함, 바램, 요구사항, 희망사항을 한마디로 모으면 “간절히 바라는 목표”가 됩니다. 평생 살면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목표를 갖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인류의 공통적인 소원은 공평하게 잘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 소원이 과연 주님 앞에 어떤 것인지를 살피고 또 주님 소원이 우리가운데 뚜렷하게 심겨져 한평생 주의 소원을 이루는 귀한 성전들이 다 되시기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이 밝히는 하나님의 소원 그 첫째는 무엇입니까? 본문 12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우리 인생의 행복을 위한 그 첫 번째 요구,
1.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평생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 떨리는 마음자세를 요구합니다.
산업혁명 이후 물질과 지식이 풍요해진 인생들은 대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의 개방문화로 교회도 자유분방해지면서 죄에 관해 관대해졌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죄를 허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폭과 수준에서 세상과 별로 다를 게 없어 교회와 세상은 구별이 쉽지 않게 됐습니다. 진정 주님이 말씀하신 일곱에 일흔을 곱한 무한대의 죄용서는 인간이 죄와 유혹 앞에 얼마나 약한지를 지적함과 동시 거듭남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방탕한 이 시대는 죄에 대하여 너그러워 남의 죄는 물론 자신의 죄까지도 절대성경의 잣대로 보질 않고 상대적인 세상에 비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릇 하늘에 머리와 가슴을 향한 신실한 자라면 남의 죄에 대하여는 관대하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는 매서운 채찍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 가난한 이웃과 쓰러지는 교회를 돌보지 않고 유람선에서 샴페인을 마시는 성도와 실내수영장 옆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교회지도자들의 삶에서 이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모든 죄악은 사실 하나님을 안 보이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히11:6절에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고 합니다. 또 삼상2:30절에선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경외라는 말은 존중을 넘어 더 할 수 없는 깊은 존경과 사랑과 앙모함이 사무쳐서 두렵기 까지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말씀처럼 지금 여기 내 곁에 그리고 나와 함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누가 감히 범죄 앞에 서며 누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문제는 눈에 뵈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심령 안에서 세미한 소리나 환경을 통해 또는 관계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앞서 이른 대로 물질과 지식의 풍요로 나약한 성도들이 돼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하도 부패했으니 교회가 이 정도면 그래도 천국 가는데 큰 지장이 없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잠30:8은 말합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조금만 넉넉하면 대번 교만해지고 엉뚱한 데로 가는 게 인간이라 성경은 늘 말씀 앞에 두려움으로 살기를 권합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행복을 위한 두 번째 하나님의 요구는,
2.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하나님이 일러주신 모든 도를 몸을 움직여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인생이 행복하게 되는 비결인 하나님의 소원을 듣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다음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그를 사랑하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본문 12절에 명령되는 경외함과 순종과 온 중심을 다한 섬김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가능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순종과 복종은 다릅니다. 본문의 명령은 복종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복종은 강제이지만 순종은 거역할 의사가 없이 기쁨으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사랑이 앞서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신5:29절 말씀처럼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10절에서 그 복이 천대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이토록 간곡히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손대대로 행복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오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요구 세 번째는,
3.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이란 단어만큼 우리 삶에서 많이 쓰이는 것도 흔치 않습니다. 그 의미와 수준에 있어서도 매우 다양합니다. 이기적인 집착에 가까운 것에서 품격있는 용서와 덮음과 베푸는 희생적인 사랑에 이르기까지 천양지차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비로소 경외와 순종과 헌신이 가능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어디까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요일5:3-4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그의 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거운 것이 아니며 무겁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믿음으로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위로부터 난 자라야 세상 이기고 계명을 지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것은 1) 하나님이 택하신 자요 2)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요 3) 예수를 믿는 자입니다. 곧 저와 여러분 우리 성도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하고 또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입술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육체로 율법과 계명을 지켜내기가 어려운 인생들에게,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복음, 십자가에서 대속 보혈을 흘려주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불러주신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를 찬송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지금은 거룩한 영, 보혜사 성령으로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본문 12절 뒷부분입니다.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오늘 우리들의 행복을 위하여 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4. 하나님을 향한 최선의 헌신입니다.
주님은 본문을 인용해 마태복음에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지목하신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한다는 것은 전인격적이요, 전 생애요, 삶의 모든 것을 다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드리라는 헌신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중심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하나님께 바쳐진 하나님의 소유이니 우리들의 소유가 있을 리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주신 것 앞에 청지기로서 맡은 자의 성실과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빈손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진정 우리의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평강을 확장시켜 나가기 위해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헌신에 따른 소유와 사용에 대한 개념이 분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필요한 만큼 서슴없이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즉 부요란 소유가 아니라 선한 사용의 풍성을 말합니다. 우리가 선한 사용을 통해 부요를 누릴 뿐 아니라 우리자신이 어딘가에 선하게 사용돼야 부요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돈은 많은데, 어디 쓸 줄 몰라 쥐고만 있거나 바르지 못한 곳에서 사용한다면 그는 부자가 아니라 가난하고 천박한 사람입니다.
아프리카 북서부 콩고에 세워진 로버트 알링턴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콩고의 영혼과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친 거룩한 수전노, 알링턴 여기에 잠들다.” 알링턴은 평생 지독한 구두쇠였습니다. 그러나 매력 없는 구두쇠 알링턴이 예수를 안 뒤에는 영혼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기 시작합니다. 아낌없이 선교를 위해 모든 소유를 드리면서도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질 않아 여전히 변함없는 구두쇠였습니다. 그가 평생 걸친 옷이나 구두, 가방, 필기구 모두 너덜거렸습니다. 늙어 거동이 불편해진 후에 주변에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들, 제자선교사들과 현지신학생들, 많은 성도들 그리고 특별한 구두쇠를 보러 오는 기자들과 여행객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주변사람들에게 쉬지 않고 근검절약을 외쳤습니다. 알링턴 어록엔 멋진 단어가 별로 없습니다. 그의 어록에 적힌 말들입니다. “그렇게 치약을 많이 짜다니” “껍질을 그렇게 많이 벗겨? 과일 깎기 다시 배워라.” “이 셔츠 10년은 더 입겠다.” “그 자전거 이제 길이 났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성도가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을 듣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은”이 말씀을 바꾸어 들어봅니다. “우리가 오늘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께 받은 이 명령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모든 길로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까지 드려서 네 하나님을 잘 섬길지어다. 그렇게 하는 게 저세상에서는 물론이요, 눈물 많은 이 땅에서도 풍성하고 편안하게 잘 사는 행복의 지름길이니라.” 아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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