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14.주일예배<행7:54-60.하늘이 열린 스데반의 순교>
[초등4년 때 이질로 뇌성마비가 돼 목 아래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반 식물인간의 몸으로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 일본을 깨우는 영적거목이 된 우찌무라겐죠. 엄마가 펴놓은 성경 고전12장을 반복해서 볼 수밖에 없었던 소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바울사도의 고백이 자신의 고백이 됐다. 외롭지 않았다면..괴롭지 않았다면..알 수 없었던 사랑들, 그는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더한 이단은 없다고 했다.]
스데반은 기독교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서 그 믿음이 출중해 많은 열매를 맺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의 구제사업을 위해 사도들이 제의해서 뽑은 일곱집사 중 한 사람인 스데반은 구제 외에도 은혜가 충만해 설교는 물론 이적은사로도 탁월했습니다. 주님은 이 귀한 스데반에게 순교의 영광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이 순교하는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 말씀이 주께로부터 우리에게 내리는 순간 우리에게도 스데반과 같은 영의 순결과 놀라운 믿음이 임하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스데반의 순교현장에 어떤 일이 있었나? 행7:54절 본문 첫 구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 천사의 얼굴과 같은 스데반과 성난 군중입니다.
1.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도 같더라.
본 54절 첫머리에서 말하는 저들이 듣고 찔려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게 된 건 51절에서 시작됩니다. 51-53절을 함께 읽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본서 행7장2절에서 50절까지 스데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솔로몬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백성들이 저지른 죄악을 설명합니다. 그리고는 지금 스데반의 변론을 듣고 있는 군중에게 너희도 너희 조상과 다름없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박해하고 그들이 예언한 의인이 왔는데 그 의인을 잡아 죽인 살인자라며 강도높은 질타를 거침없이 합니다.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는 직설법으로 아무리 읽어봐도 부드럽게 돌리거나 조심스러운 부분이 없습니다. 정확간결하면서 단호하기 이를 데 없어 성난 군중들 앞에서 하는 말이라곤 믿기지 않는 말투입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힘은 어디서 왔을까?
6:15절을 잠시 함께 읽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그렇습니다. 스데반에겐 이미 하나님의 영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평화이십니다. 인간에겐 위난이요. 고통이요. 죽음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것들을 다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평화와 사랑을 완성해 가십니다. 알 수 없는 이 하나님의 평강과 능력이 회당의 살기등등한 분위기에서도 스데반의 얼굴을 천사처럼 고요하게 했습니다. 사람의 감정이나 본능적 위기감각으로서는 도저히 고요할 수 없는 현장에서 스데반은 너무나 평온했습니다. 주님주시는 평강가운데 변론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환경과 무관합니다. 물질이 보장하고 뭔가 풍성한 주변이 주는 잠시 후에 사라질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평화가 진정 영원하며 믿을 수 있고 가치있는 것인지 알기 위하여 그것을 제공하고 보장한 존재를 밝히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처럼 썩어지고 사라질 것이 보장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평화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평강은 참된 의미의 진정한 평강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주변의 상황과 아랑곳없는 평강으로 마치 천사와도 같았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히11:38절에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이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나는 오늘 말씀을 받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더하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은 이미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 많은 기적을 일으켰고 전달하는 설교에서 놀라운 그리스도의 능력을 본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랑하시는 스데반을 스데반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하실 순간에 주님은 스데반에게 오셨습니다. 아무도 못 보는 하늘을 지금 스데반은 보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사람의 용기로는 할 수 없는 대단한 설교와 선포를 하게 하시려고 그에게 먼저 하늘의 감동을 덧입혔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힌 자, 그 영에 감동된 자는 얼굴에서부터 감출 수가 없습니다. 파도처럼 밀려들어 막을 수없는 영혼의 기쁨이요, 참 평화였습니다. 스데반이 누린 평화의 근거를 55-56절이 설명합니다. 함께 읽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스데반의 평화 어디서 온 겁니까? 1) 성령의 충만한 임재입니다. 2) 영으로 본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3)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장면입니다. 이 광경을 보게 된 스데반집사, 드디어 평강과 기쁨과 용기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와 용기는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가능합니다. 하늘나라의 보좌를 영혼의 눈으로 보고 믿는 믿음이 있기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기 주목할 건 스데반 눈에 들어온 주님의 모습이 하나님보좌 우편에서, 앉아 계신 게 아니라 서계셨다는 겁니다. 긴박하고 중차대한 순교의 위대한 순간에 사랑하는 아들을 앉아서 맞는 주님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생명을 아낌없이 던지면서까지 선포할 가치가 있는 복음을 위해 스데반은 기꺼이 순교했습니다. 평화로운 천사의 모습으로 시작해서 하늘이 열려 보여주는 광경을 증거하며 떠났습니다. 56-57절을 함께 읽습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2. 이를 갈고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달려드는 군중들.
왜 그들은 그렇게 흥분했습니까? 6:10-12절입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모함입니다. 세상은 모함을 잘하고 그 모함을 그럴싸하게 위장하는 자들이 으스대는 뎁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공의 앞에 다 드러나 밝혀지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스데반을 향하여 소리치고 이를 갈고 일제히 달려들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하신 임재가운데 있는 평화로운 스데반과는 대조적으로 성난 군중들은 이를 갈며 듣다가 이윽고 1) 큰 소리를 지릅니다. 2) 귀를 막습니다. 3) 일제히 달려들었습니다. 성난 군중과 성령충만한 스데반의 모습은 이끝과 저끝의 대비를 이루면서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스데반이 성령의 충만을 입었을 때 군중들은 이를 갈았습니다. 이를 간다는 것은 공격직전에 분을 한껏 추키는 모습입니다. 짐승들은 갈기털을 바짝 세우고 이를 드러내 으르렁거립니다.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싸우다가 내가 죽어도 물러서지 못하는 분노가 독이 돼 온몸을 휘감아 무서운 용기로 나타납니다. 스데반을 둘러싼 사람들은 종교정의감에 군중심리까지 겹쳐서 큰 위력으로 드러났습니다.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니 그 장면은 잔혹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모세의 법을 고치려는 저 인간 죽여라. 우리가 살인자? 죽여라.”고함을 쳤습니다.
악한 자들이 고함칠 때 성도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성난 군중들이 고함을 쳤다면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군중들은 귀를 막고 일제히 달려들었지만 스데반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놀라운 광경을 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상황이 급박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의 평강이 깨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선한 마음을 잃지 않고 의로운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순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58-60절을 함께 읽습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어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3. 저들을 용서해달라는 기도, 하늘에서 내린 의(義)였습니다.
이 기도는 스데반이 순교의 순간 끝까지 성령의 충만하신 인도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위에서 자신을 죽이는 집행자들과 유대인들을 위해 드린 용서의 기도와 같은 기도를 올리며 떠났습니다. 예수의 영이 함께 하면 급한 상황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평강의 길, 용서의 길, 사랑의 길을 의연하게 갈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실존을 분명하게 경험한 사람, 하늘에 속한 사람은 죽음조차 두렵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8:35, 38-39)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노래를 통해 그리고 기도를 통해 종종 주와 함께 죽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다시 주와 함께 새 생명의 능력으로 거듭나기 원합니다. 이 거듭남은 흙으로 돌아가기 전 이 땅에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고자 하는 수많은 성도들의 한결같은 소망입니다. 그런데 막상 부활을 위한 자신의 죽음 앞에 다 두려워하고 피합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도 스데반처럼 험악한 위난직전에도 여전히 천사와도 같은 평온함을 갖고 하나님께는 기쁨을, 그리고 세상과 주변에는 감동을 전할 수 없을까? 주님처럼 스데반처럼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
오늘 우린 말씀을 통해 그 능력과 평화가 하나님의 살아계신 것과 그 넘치는 사랑을 분명히 체험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 평화, 모든 죄를 용서하는 사랑의 기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자의 것입니다. 하늘 문이 열려야 합니다. 열리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있다면 더욱 깊게 들어가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때론 소리치면서, 때론 묵상의 고요 한가운데 신묘한 곳까지 들어가십시다. 가서 하늘나라를 봐야 합니다. 하늘보좌에 계신 주님의 찬란한 빛을 봐야 합니다.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간절히 원하기 바랍니다. 재벌이나 대통령을 만나려 해도 몇 단계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통하면 만납니다. 다만 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술로 예배시작에 따라한 사도신경의 모든 내용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게 여기 우리에게도 지금 눈앞에 하늘이 열려 펼쳐진다면 우리에게도 매우 놀라운 신앙성숙이 일어날 것입니다.
믿음만 새로워지고 깊어진다면 우리의 얼굴도 스데반처럼 위난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이 될 것입니다. 아무도 미워하거나 저주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무지한 그들을 위해 아름다운 용서의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속히 영의 눈, 믿음의 눈이 열려서 천성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우리 모두이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매우 사랑하십니다. 한없이 불쌍히 여기십니다. 끝도 없이 용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 안에서 이뤄지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더욱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가 돼 하나님의 사람으로 귀하고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시기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일강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05.28. 주일예배<삿7:2-8. 기드온의 삼백용사> (0) | 2017.05.28 |
---|---|
2017.05.21. 주일예배설교<신10:12-13. 성도의 행복은,> (0) | 2017.05.21 |
2017.05.07. 주일예배설교<눅23:27-30.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0) | 2017.05.07 |
2017.04.30. 주일예배<막2:1-5(1-12). 지붕을 뜯은 믿음> (0) | 2017.04.30 |
2017.04.23. 주일예배설교<욥 2:1-10. 천상조회(天上朝會)> (0) | 2017.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