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26. 주일예배설교<사61:1-3. 아름다운 구원의 기쁜 소식>
2017.02.24. 평생에 한 사람이라도 절대적인 교훈과 진리의 전달자(mento)인 스승이 있다면 그의 인생은 성공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시작된 성공의 지속적 성과여부는 그 스승과의 관계유지에 달려있다. 우리의 스승이요, 생명이신 예수 곧 복음과의 관계는 그러므로 불변, 유지돼야 한다.
내 허물로 아파한다면 그 고통의 목적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의도는 어디 있고 나의 바람은 무엇인가? 고통과 역경은 그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고 나는 설교했다. 그것은 그것을 딛고 일어서며 간절히 바라는 소망에 목적을 갖고 있고 그 소망은 항상 복음과 연결되지 않으면 함정이 될 것이다.
[악<혈기.분노.수군수군.야합.시기.게으름.무례함.불의.추악.탐욕.분쟁.교만.배약.무정함>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의 대상이며 악을 향한 우리의 목표는 건강한 회생(회복재생)에 있다. 방향성의 문제]
주전722년, 북 이스라엘은 주변의 강국 앗수르에 의해 무너집니다. 유다도 당했지만 유다는 히스기야의 회개로 인해 하나님께서 구하신 후 나중에 친앗수르정책을 썼다가 후발강국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이사야선지자는 분열 두 왕국을 향하여, 심판받을 열방에게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경고하다가 결국 므낫세의 톱날에 순교당합니다. 이사야서는 구약선지서 중에서 매우 특별한 점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탄생을 여러 군데에서 선명하게 예언하고 있다는 것과 전체가 66장으로 되어 있어서 마치 66권의 축약된 작은 성경 같은 맛을 낸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해당하는 39장까지는 심판을 예언하고 있고 신약에 비견되는 나머지 66장까지 27개장은 메시야도래를 알리는 소망의 메시지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러니까 당시 곧 임할 두려운 심판의 날에 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영광으로 임할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하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언서들이 갖는 특성은 보통 그 한가지 사건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어떤 특정시대에 일어날 일들과 아울러 개인적인 삶과 그리스도 재림에 이르기까지 일관성있는 경고나 소망의 예언을 담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당시 선민 이스라엘뿐 아니라 현재 우리들 개인과 가정을 향해 여전히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드러내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믿는 자에게 전하는 이사야의 메시지 어떻게 시작합니까? 1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1. 주의 영이 내리셨고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아름답고 복된 소식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오직 의로우시고 능력이신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임을 본문은 증거합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져 흙을 밟고 살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는데 그 모든 삶은 수고와 한숨과 슬픔 뿐, 돌아보아 잠시요. 그 모든 것이 허망한 것들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아름다운 우리들의 소망이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비천한 인생에게도 영생이신 하나님의 영이 내리시면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복된 도구가 될 줄 믿습니다. 본문을 통해 이사야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에는, 인간에게 주의 영을 부으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드러납니다. 즉 성령을 부으시는 목적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려 함이요, 또 파송하시는 목적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게 하시는 겁니다.
요6:29절 말씀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 즉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한편, 바울은 3차 전도여행시 에베소에 와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주님을 바르게 잘 믿는다는 건 성령을 받음으로 시작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삶의 뿌리와 목표가 복음이 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이 임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행1:8절에서는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는다고 함으로 본문과 같은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권세와 능력을 왜 주십니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사람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면서 기쁜 일입니다. 친밀도와 모양새는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우리는 모두 주의 영이 임하셔서 함께 하시는 줄 믿기 바랍니다. 성령, 즉 성신이 내리시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신에 의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부족하고 결단이 무너져 낙심하게 되는 것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성령의 동행을 잠시 잊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을 절실하게 사모하시고 체험하기 바랍니다. 다시 본문 1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리면 가난한 자에게, 또 마음이 상한 자에게, 포로 된 자에게, 갇힌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한 히브리인들을 찾아 어디까지 가야 합니까? 방금 들은 행1:8절에서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고 함으로서 온 세상 구석구석 모든 땅을 말하고 있습니다. 밟는 모든 땅에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절로 파견됐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주님의 거룩한 나라확장과 그 통치를 확산시켜나가기 위하여 택한 자들에게 당신의 영으로 기름부으시기 원합니다. 여기서 기름부음이란 지목하여 특별한 권세와 이름을 부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황제의 대관식에서 왕관을 머리에 올리는 취임식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기름을 붓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 안에 오심으로 복음을 세상에 전달하는 하나님의 외교관(대사.<특명전권>공사.영사.참사.)이 되는 것을 말하고 특히 기름부음으로 인한 형통과 권세와 책임의 부여를 동시에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렇듯 본문 1절의 내용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찬 내용으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영광중 가장 위대한 영광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받아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인생보다 더 귀한 인생은 없습니다.
2.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십니다.
가난한 자의 원문에는 겸손하게 낮아진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와 포로되어 갇힌 자에게 전할 복음은 가난과 비천을 면하는 풍성이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자존감의 회복이요, 결박을 풀어주는 자유와 해방입니다. 사52:7-8절입니다.“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그렇습니다. 겸손하게 낮아진 자가 풍성을 약속으로 받으며 마음의 상처가 떠나가고 묶인 자가 놓임을 받는 이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길은 지극히 아름답습니다.
복된 소식,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러므로 염려의 산과 근심의 늪을 지나서 스스로의 아픈 함정에 빠질지라도 위대하신 능력의 손에 붙잡혀서 끝내 아름다운 발로 드러나게 됩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우릴 부르셔서 결국 아름다운 자의 산을 넘는 발이 되게 하실 주님을 찬송합니다. 오늘 말씀이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우리가운데 임하여서 부조리와 불평등의 험악한 능선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는 믿음의 결단 하나로, 지치고 외로운 발이 아름다운 발길 멋진 인생여정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으로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심으신 영광의 나무, 의의 나무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과 요르단 중간에 위치한 곳인데 성경은 시온을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으로 일컬어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곳과 문화까지를 의미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슬피 우는 자에게 그 슬픔이 변하여 찬송과 기쁨이 되게 하시리라고 예언합니다. 중요한 것은 슬퍼하는 인생이 아닙니다. 인생은 나남없이 슬픈 일을 종종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슬퍼하는 장소가 본문은 시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슬퍼하는 자를 말합니다. 시온은 믿는 자들이 있는 모든 처소를 말하고 더 크게는 하나님의 품안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슬픔을 토해내는 인생은 하나님께만 의지하려는 그 믿음으로 인하여 머리에 화관을 얹어 슬픔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어떤 아픔과 서러움과 외로움도 다 주님 앞에서 먼저 토설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뵙기 전에 사람에게 먼저 말하지 않게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 앞에서 울지 말고 시온에서 우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근심과 슬픔이 변하여 하나님을 노래하는 찬송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모든 고통을 아뢰고 눈물 흘리면 하나님은 그를 의의 나무라고 불러서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삼으신다는 것이 본문의 증거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성경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 앞에 예배드리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들은 우리에게 임하신 여호와의 신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본문의 증거처럼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에게 온전한 기쁨의 치유를, 슬픔대신 화관의 영광으로 바꾸셔서 우리로 하여금 의의 나무를 삼으시는 주님 앞에 최소한 우리들의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충분한 가치를 측정하는 네 가지 질문입니다. [그대들에게 ⇨ 그들 앞에서]
그대들에게 흔들 수 있는 깃발이 있는가? 그대들에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는가?
그대들에게 붙잡을만한 약속이 있는가? 당신에게 목숨을 버려 지킬만한 진리가 있는가?
세상 다 변해도 변할 수 없는 게 있는데 너를 택하고 나를 택하여 이 교회를 세웠다는 하나님의 사건.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불러주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영을 내려주시고 의의 나무라는 이름으로 시온언덕에 심어주신 복음의 등불이요. 전달자인 대사관들입니다. 슬픔의 산을 넘고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아름다운 발이 될 줄 믿습니다. 그 믿음대로 되는 놀라운 기쁨이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위에 기름부어 주신 주님을 찬송합니다. 주의 뜻을 따라 아멘이 이뤄질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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