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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7.02.05. 주일예배<롬14:7-9.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여

by 설렘심목 2017. 2. 5.

2017.02.05. 주일예배<14:7-9.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여>

[로마교회가 부패하자 로마가 망했고 러시아정교회가 망하자 러시아가 망했다. 로마멸망 전 로마교회는 바늘 끝에 천사가 몇이나 날아와 앉을 수 있을까를 놓고 3일간이나 논쟁했고 러시아멸망 전 러시아교회는 미사집례시 황금색가운을 입을 것인가 붉은 색 가운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7일간 다퉜다. 교회가 본질 외의 것에 매달리면 결국 교회가 망하고 나라가 망한다.]  

사도바울은 여러 곳에 교회를 개척하여 세우면서 로마를 보기 원했습니다. 세계적인 도시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불러 친히 사용하시기로 작정된 바울은 피고인의 몸으로 묶였지만 결국 군사들에게 안전하게 호송되어 로마에 들어갑니다.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바울의 생애는 로마교회를 세우고 지속적인 양육을 통해 그의 감동적 신앙고백은 서신마다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몸을 던져 천신만고 끝에 세운 교회가 유대교의 전통의식과 율법, 그리고 거짓교사에 의해 늘 흔들리는 것에 바울은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주로 식생활문화와 절기 지키는 것에 대한 사소한 견해차가 교회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정녕 중요한 게 무엇인가를 본서를 통하여 지적하고자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특히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성도가 삶의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본문 7절부터 9절까지 위하여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인간이 살면서 누구를 위하여 사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차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은 그 본질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본문 7-8절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구세주의 소유된 자, 구세주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워진 생명들입니다.

 

본문 7-8절에는 살고 죽는다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생사에 무관하게 그 의미가 분명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 성도의 삶은 모든 세상의 기준과 상관없이 절대적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성도의 삶이 지니는 가치와 의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설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2:20절에선 성도의 삶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아멘.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아 거듭나는 순간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그리스도께 붙들린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때 그 새사람은 오직 예수를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분명하게 죽어야만 비로소 맛볼 수 있는 새 생명의 기쁨인줄 믿으면 아멘입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새롭게 태어난 성도가 사는 목적도, 죽는 목적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성도에겐 목적이 예수그리스도이고 방법으로서의 삶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목적이 예수이며 방법이 복음인 성도의 삶이라면 당연히 그 결론도 복음이 예언한 예수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벧전2:9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

 

2. 죽으나 사나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1) 죽어도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살아서 뿐 아니라 죽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를 섬기며 살다가 혹 그리스도를 위하여 (옛사람이든 육체든)죽어야 할 일이라면 성도는 순교의 영광을 안고 기꺼이 사라져가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지명하여 부른 자들이고 그의 소유된 백성들입니다. 본문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한 것은 7절 말씀처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다.”는 그 이유가 우리들의 존재뿌리는 그리스도에게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어도 주를 위해 죽을 것이고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사는 인생이 성도의 삶인 것은 성도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 안에만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성도는 몸을 버린 뒤 영원한 세계에서 주를 찬송하게 될 텐데 몸을 버려야 할 이유가 자연사를 포함한 모든 죽음이 모두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떠나야 그간의 삶이 바른 삶이요, 성도로서 의미있는 삶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2) 살아도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야 할 이유가 몸이건 내면이건 그리스도의 영광과 연계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옛자아의 죽음을 기꺼이 자청하는 것은 또 하나 우리가 짊어져야 할 거룩한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쳐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삶이야말로 주를 위하여 사는 일입니다. 왜 바울을 통해 주님은 왜 이토록 죽어도 예수그리스도, 살아도 예수그리스도를 강경하게 선포하셨을까? 9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3)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승천하셔서 천국과 음부의 모든 통치권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주님은 그러므로 살아 이 땅에 있건 죽어 저 하늘에 있건 모든 자의 주가 되셔서 찬송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렇듯 살아있는 자들은 보혜사 성령으로 계신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시고, 죽은 자들에게는 부활의 영광과 영생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분의 통치권아래 놓여 공평의 왕, 평강의 왕,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만 바라보면 생사여부에 무관하게 찬송하는 영생의 길을 갈 수 있음을 잊지 않게 되기 바랍니다.

 

3. 성경적인 방법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7절에서 바울은 성도가운데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되어 있다면 살아가는 방법역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이미 기억하듯이 그리스도는 복음 그 자체이심으로 성도의 삶은 말씀의 실현을 향한 구체적인 노력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매순간 순간마다 성경의 사상이 행동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말처럼 간단치 않아서 늘 우리의 비성경적인 생각과 언행은 성경과 부딪치게 됩니다. 내가 복음과 부딪치는 한 인생은 변함없이 항상 고달프고 외로운 길을 갑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주님이 우리들의 길이십니다. 길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 복음만이 우리들 삶에 최선이요, 가장 선한 방편(方便)이 되기 축복합니다.

성도여러분. 복음을 따라 가는 길은 예수 따라가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희생의 길이요, 섬김의 길이요, 양보하며 불편하고 손해를 보아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세워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아닌 세상의 방법은 다른 사람을 누르고 나를 드러내며 내 이름을 높여서 스스로 기뻐하고자 합니다. 이렇듯 성경적인 삶과 세상적인 삶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자신을 섬기는 자기우상으로 구별되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구원받은 천국을 바라보는 삶이요, 다른 하나는 불신앙으로 인한 우상숭배로 슬픈 길을 가는 것입니다. 길은 길인데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로 갈라집니다. 이런 일은 구원 안에도 있습니다. 분명 모양은 구원인데 내용은 간신히 받은 부끄러운 구원, 슬픈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소속감은 중요합니다. 소속감은 자존감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가 내 인생과 인격의 바탕색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통치아래 살게 됩니다. 본문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자기의 존귀함이 그리스도의 존귀와 함께 합니다. 자신의 생명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죽는 것이 바른 존재의미가 됐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극히 단순명료하여 말씀 그대로가 설교입니다. 본문7-9절을 읽어 다른 언어로 듣기 원합니다.

7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 성도가 살거나 죽거나 그 마지막 표준과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그리스도처럼 살고 예수그리스도처럼 죽어야 한다. 그것은 수고 끝에 영광이요, 죽음 뒤에 부활이요, 인내 후에 그 인내의 열매를 맺는 성도의 길이요, 그것은 화목과 기쁨이다.

8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 성도의 삶은 예수 중심적, 즉 예수께 묶여야 하며 죽음조차 주를 위하여 받아들이는 종의 겸손한 마음과 청지기된 정신여야 한다. 성도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니 몸은 물론 모든 소유, 관계가 다 주의 것이다. 거듭되는 강대상의 기도, 이제 내 인생 더 이상 내 것이라고 말하지 않게 하소서.

9 :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은 자의 주가 되셨고 부활하실 때에 모든 산 자의 주가 되셨으니 죽은 자에게는 부활의 소망으로 영생을,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성령의 통치로 구원의 소망을 갖게 하셨다.

 

성도여러분. 죽든지 살든지 모든 자의 소망이요,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 남은 생애를 온전히 바치기를 예수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헌신이 정직하게 이뤄진다면 이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우리들의 것이 아닙니다. 받으신 분이 당신의 영광과 명예를 걸어 친히 주장하고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실수해도 그분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인생은 불완전하지만 주님은 완전하십니다. 가능한 한 훌훌 털어내어 텅 빈 마음, 가난한 심령으로 믿음의 좁은 길을 지나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가 계신 평강의 숲에 다다르세요. 남은 생애가 기쁨으로 주를 노래하는 날들이 되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