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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7.02.19. 주일예배<막4:35-41. 풍랑을 꾸짖는 복음>

by 설렘심목 2017. 2. 19.

2017.02.19. 주일예배<4:35-41. 풍랑을 꾸짖는 복음>

[오래전 설교 중 요즘 각별히 새겨지는 말씀하나를 평생 잊지 않으려 합니다. 괘씸한 자를 괘씸히 여기면 작은 자요, 불쌍히 여기면 큰 자라는 교훈이 결국 자신의 믿음을 측정하는 황금률이라는 사실을 뼈에 새기고 부름 받는 그 순간, 하늘을 향한 영원의 출발을 큰 자로 할 것인가 작은 자로 할 것인가 남은 날을 싸워가는 저와 여러분의 가장 큰 목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더러는 호기심에, 더러는 깊은 도에 매료되어서, 혹간은 정치적인 해방군 대장으로 보아서, 그러나 무엇보다 병든 몸을 고치기 위해서 꾸준하게 몰려들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한 날 배 위에서 군중을 향해 몇 가지 비유로 설교하신 뒤 제자들과 함께 그대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며 잠시 피곤해 누워 주무실 때를 배경으로 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선 수많은 기적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것과 그 목적이 죄인구원이라는 것을 늘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말씀은 험한 인생풍파에서 주님의 말씀이 갖는 권세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저와 여러분 안에 어려운 모든 문제들이 해결받기 축원합니다. 말씀 듣는 가운데 험한 풍랑은 멈출지어다. 본문 36절입니다.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1. 주님을 함께 모시고 가는 인생방주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은 사카무니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을 떼며 외친 말이라고 합니다. 이는 혹자가 불교를 폄하하려고 꾸민 말이고 실상은 사카무니의 어머니 마야왕후가 석가의 태몽을 꾸는데 아기가 일곱 걸음 후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세상에 내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하는 뜻인데 요즘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말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세상에 자기만을 가장 존귀하게 그리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그만큼 외로워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말입니다. 인생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린 진정한 자아의 발견은 관계 속에서 발견되고 그 관계는 사랑의 줄로 연결돼 있다고 배웠습니다. 지금 본문은 성도와 교회가 이 세상이라는 길을 가는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가되,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모시고 가는 인생입니다. 동지들과 함께 주님모시고 가는 길은 그래서 결코 외롭거나 슬프지 않은 길입니다. 직접 주님을 모신 배도 있고 옆에 바짝 따라오는 제자들의 배도 있습니다. 때론 멀리서, 때론 가까이서 주님모시고 가는 길, 인생길,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항해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으면 그 길은 외롭고 고단하며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짧은 일백평생에서 모든 결산을 거머쥐려고 쫓고 쫓기는 삶을 피곤하게 삽니다. 최선을 다해도 언제나 만족함이 없습니다. 끝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허덕이는 것이 영생의 그리스도가 안 계신 세상의 삶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를 배에 모신 채 노를 저어 나가는 제자들의 항해를 소개합니다. 교회나 성도의 가정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를 모시고 산다는 것은 인생최대의 영광이며 자랑이며 능력인 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안에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모든 선한 가치와 진정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저와 여러분의 마지막 불러야 할 그리움의 노래, 사모곡이 있기 축복합니다.

 

2. 인생은 광풍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37절입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쳐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인생은 긴 항해이며 인간은 나그네입니다. 끝까지 순탄할 수만은 없는 게 인생만사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할 경우 문제는 단순치 않습니다. 모든 비상수단을 다 사용해 풍랑을 이겨보려 하지만 종종 배는 완파하고 인생이 몰락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은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불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재해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과연 있을까? 재해대책본부란 엄밀히 말해서 재해복구본부라고 해야 합니다. 천재를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 원인이 인간인 인재의 경우 예방할 수 있지만 자연의 풍파 앞에 인생들은 속수무책입니다. 지진이나 해일과 화산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을이 통째로 갈라진 땅 사이로 사라지고 고가도로가 힘없이 누워 버립니다. 고층아파트가 옆으로 쓰러져 순식간에 떼죽음을 합니다. 쓰나미 피해현장에서 우린 눈으로 생생히 봤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이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겁니다. 졸지에 부모잃고 집잃고 고아원이 붐빕니다. 우리가정이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인재건 천재건, 재해 앞에 슬프다 못해 넋을 잃고 희망 없는 수많은 눈동자가 뉴스기사 속에서 잠시 있다가 몇 달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갑니다. 남은 자들은 그 상처를 품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슬픈 노래를 부르며 인생은 끝없는 함정과 아픔의 연속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요. 병들고 다치고 억울한 일로 분하고 거절당해 서럽고 그러다가 세월이 약이라 까맣게 잊고 또 키득거리며 아무 일도 없는 듯 살아가게 됩니다. 복음 없는 세상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성도여러분. 인생에는 끝없이 밀려오는 크고 작은 파도가 있습니다. 밀려오는 파도가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능선이라면 문제는 인간이 그 파도 앞에 어떻게 어떠한 자세로 서 있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38절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 하시나이까 하니

 

3. 주께 의뢰하는 삶입니다.

 

제자들은 심한 풍랑에 필시 모두 바다에 빠져 몰사할 것이라는 공포를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습니다. 곧 죽을 것 같은 긴박한 상황을 급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그렇지요. 우리들의 기도는 살펴 달라.”는 것입니다. 현재 당한 이 고통을 좀 살펴서 보아 달라는 겁니다. 봐달라는 것, 이것이 기도입니다. “여기를 보소서.”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여기를 보소서. 여기 주께서 약속하신 주의 백성이 이런 일 가운데 놓였나이다. 보시고 불쌍히 여기소서. 보시고 주의 거룩한 이름이 드러나소서.” 이것이 기도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우며 자신들의 처한 긴급한 상황을 아뢰며 어찌 돌아보지 않고 주무십니까? 라고 한 것은 주께서 이 땅에 오신 본래의 목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선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때에 주님께서 일하시라는 주문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신 본 목적을 잘 이루실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기다리시는 주님이신 줄 믿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을 깨우며 주의 일을 촉구하자 주님은 어찌 하셨습니까?

 

4. 풍랑을 꾸짖는 그리스도이십니다.

 

1) 풍랑을 꾸짖었습니다.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아멘. 파도치는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주님, 이제 말씀으로 날마다 우릴 찾아주시고 함께 하시는 우리 주님이 이 시간에도 우리 가운데 복음으로 분명히 풍파를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정녕 복음을 품고 산다면 하나님의 말씀, 복음이 파도를 꾸짖습니다. “내 피로 사들인 내 백성가운데 파도는 잠잠할 지어다. 크고 작은 풍랑은 고요할 지어다.”

 

48:13절입니다.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 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 주님은 말씀하시고 말씀은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그 어떤 존재도 바다를 꾸짖지 못합니다. 오직 창조주이신 예수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명령입니다. 시편 107:24-5에서 시편기자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물결을 일으키는도다.”노래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풍랑을 꾸짖을 수도 있고 광풍을 일으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풍랑으로 죽어가는 인생을 구하실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십니다.

 

2) 믿음 없음을 꾸짖었습니다.

40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는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믿음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흔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주변에 대한 불신에서 옵니다. 그리고 심한 충격이 후에 두려움으로 자리 잡기도 합니다. 영국 유명한 테니스선수 짐 길버트선수는 5살 때 겁이 유난히 많은 엄마를 따라 치과에 갔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치과치료 중 너무 겁이 나서 쩔쩔매다가 치료 중에 심장마비로 그만 죽고 맙니다. 어려서 이 장면을 기억하는 그는 후에 유명한 선수가 되어 화려한 인생을 살게 되는데 치과에 가는 일만은 죽기보다 싫어 했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치과에 갔다가 너무나 두려워 떨던 중 그도 어머니처럼 치료기가 입에 닿는 순간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TV에서 밀폐용기에 뭔가를 넣고는 손으로 만져서 알아맞히는 게임이 있었는데 출연자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시청자들을 즐겁게 합니다. 이는 그 물체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죽음의 실체를 아는 우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없는 세상에서의 죽음은 가장 큰 공포임에 틀림없습니다. 죽음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육신을 땅으로 되돌리고 영혼이 영원히 하나님 곁에서 찬송하며 산다는 영생의 확신이 없으면 죽음은 그 자체로서 이미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루마니아 공산학정에서 옥살이를 하던 리쳐드 범브랜드 목사님은 옥중에서 말씀을 읽으며 성경에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찾아 봤는데 정확히 365회가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이란 365일 매일 찾아오는 것이고 매일 두려워 말라.”는 주님 말씀을 붙잡고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만 빈센트 펄 박사는 말하기를 염려의 40%는 이미 지난 과거의 것이고 50%는 아직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도 모르는 미래의 불확실한 것이고 나머지 10%만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책망하신 두려움은 주님의 실존에 대한 신뢰가 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누워 주무셨어도 주님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었다면 결코 그렇게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말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아, 구세주가 지금 곁에 계신데 어찌 그 제자들이 죽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진정한 그리스도로 아직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풍랑보다 못한 그리스도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유를 알 수 없는 의인의 고난처럼 두려움의 마지막 답도 역시 골고다에서 풀립니다. 그 답은 죽음조차 이기신 진리의 영, 그리스도예수 우리 주님 안에 분명히 있습니다. 무엇이 두려움의 답인가? 끝으로 다시 40절의 주님말씀을 듣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말씀을 다른 말로 한다면 너희가 두려운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답은 믿음입니다.

두려움을 물리치는 답은 주님을 향한 올곧은 믿음입니다. 정녕 주님 살아계셔서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바로 그 믿음이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는 유일한 능력인 줄 믿기 바랍니다.

 

캄캄한 길도 앞에서 아버지의 음성과 발소리가 들린다면 어린 아들은 두려움 없이 나아갈 것이고 환한 대낮이라도 아버지가 안보이면 아이는 한 발도 안 움직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한척의 배가 바다를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배의 선장이 누구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길로 갑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의 선장되진 않을 줄 압니다. 우리 선장되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믿음을 붙잡고 험한 풍랑 길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지금 여기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저 세상에서도 여전히 능력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이름으로 권합니다. 믿음 붙드세요. 믿음으로 풍랑을 이기세요.

이길 힘주시는 주님이 여러분의 인생방주에 함께 타고 계십니다. 힘들 내십시다. 이길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