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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6.10.23. 주일 낮예배<아4:15-16. 너는 동산의 샘이요.>

by 설렘심목 2016. 10. 23.

2016.10.23. 주일 낮예배<4:15-16. 너는 동산의 샘이요.>

 

들어가는 말> 가장 편한 말, 쉬운 말로 말씀 전하기를 소원, 생각이 뭐냐고 어린이에게 질문, 생각없는 질문에 자기가 자기에게 말하는 거라고 답, 바울사도의 두 법을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는데 우리는 이 두 자기의 대화에서 악한 일에서는 부정적인 내가 이겨야 하지만 긍정적인 자아가 이기도록 해야 함.

몸은 현실에서 살지만 마음은 미래에 사는 성도들의 힘은 믿음과 소망에 있음>

 

세계역사상 솔로몬왕처럼 복받은 인생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도, 영광도, 원수갚음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해 지혜를 구한 일천번제가 복된 솔로몬 평생의 출발이었습니다. 솔로몬이 받은 복가운데 지극히 개인적인 게 하나 있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술람미여인과의 순수한 사랑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솔로몬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인해 근동의 최강국이 됩니다. 주변나라들이 솔로몬과 혈맹이 되어 자국의 안전과 발전을 보장받고자 어떤 방법으로든 가까워지려했습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젊은 솔로몬에게 매력적인 처녀나 공주를 보내서 후궁으로 삼게 하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후궁감으로 바치는 마차행렬이 사흘이 멀다하고 궁전에 들어왔습니다. 솔로몬은 그저 얼굴만 한번 보고 승인하는 정도였습니다. 일일이 만나볼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술람미 처녀 한 사람은 그렇게 정략적이거나 국익에 볼모잡힌 여인이 아닙니다. 신하들과 밖을 돌아보다가 술람미 마을의 포도원에서 오라비들과 포도원 일을 하던 처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은 한눈에 끌려 프로포즈를 했으나 일단의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왕권으로 강제할 수 있었지만 솔로몬은 꾸준하고 진실한 구애로 결국 성공합니다.

 

아가서는 그 해석법에 있어서 다양한 장르들이 있습니다. 가장 으뜸은 솔로몬의 개인적인 에로스의 사랑에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애틋한 사랑을 담아 예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표(豫表)라는 것은 어떤 한 사건이나 사물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후대의 어떤 사건 또는 사물과 동일한 유형을 갖는다는 것에 근거합니다. 이렇듯 예수그리스도와 교회를 예표하는 아가서의 본문을 통해 오늘 우리는 우릴 향한 그리스도의 애틋한 사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릴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존재를 어떠한 것으로 선포하고 있습니까? 15절입니다.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 흐르는 시내로구나.”그렇습니다. 우리 작은 교회들과 이 교회는,

 

1. 그리스도의 동산이요, 동산의 샘입니다.

 

동산의 원형은 어디입니까? 에덴입니다. 에덴, 곧 기쁨이란 뜻의 동산은 진선미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담이 타락하니 에덴이 골고다를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에덴과 골고다라는 두 개의 동산은 인류역사에 흐르는 죄와 용서, 구원 그리고 화목에의 필연적인 만남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솔로몬에게 술람미여인은 동산의 샘입니다. 동산에 있는 샘은 동산을 촉촉하게 적시는 생명수의 근원입니다. 메마른 동산에 물을 적셔 기쁨의 동산-생명이 깃드는 동산-노래하는 곳이 됩니다.

고후16:9절에서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밝힙니다. 성령의 전, 즉 성령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우리의 몸과 삶의 한 가운데 우리 주님은 늘 함께 계시기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들의 메마른 삶과 영혼은 골고다 즉 해골처럼 죽은 뼈, 마른 뼈가 산처럼 쌓여있던 에스겔골짜기였습니다. 그러한 골고다에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죽은 해골에 십자가를 꽂으셨습니다. 죽은 해골에 그리스도의 보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동산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 솟는 샘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게 됐습니다. 예수님 날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게 됐습니다. 죽은 영이 살아난 것입니다. 생수가 위로부터 흘러내려서 강을 이루고 거기 온갖 생명들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의 동산, 무너진 에덴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의 단비를 날마다 적셔주십니다. 벧후2:17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해 어둠이 예비 돼있다고 합니다. 15:23-25절엔 마라의 쓴물에 모세가 나뭇가지를 던져 생수가 되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나무가 던져지기 전 죄로 죽은 샘, 사망의 독이 있는 우물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보혈로 살려내신 죽은 동산, 거기 생명을 전하는 생명의 전달자, 생수로 우리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 생수라는 샘물은 우리에게 이미 주님 주신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우리가 이렇게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만드신 하나님의 동산에 생명이 되는 말씀 그분은 예수그리스도십니다. 우리가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죄인들에게 죄를 씻고 다시 사는 영생의 능력이요, 주님 앞에선 우리들의 순종과 헌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생수 한잔입니다.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샘에 와서 생수를 마시는 자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우리는 생수를 받은 자요, 전하는 자들입니다.

생명의 말씀 원천이신 주님이 우리를 주님 닮은 많은 우물, 생명을 살리는 우물로 부르십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교회들을 만나는 자마다 주님의 복음을 듣게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만나는 자마다 주님의 복음을 듣게 되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고 메마른 영혼들과 생수를 시원하게 나누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6절 앞쪽을 함께 읽겠습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2. 남풍과 북풍이 불어 향기를 날리는 교회입니다.

 

여기 문자로는 북풍은 찬바람으로 솔로몬의 간절함을 말하고 남풍은 따스한 바람으로 술람미처녀의 반응을 말합니다. 한편 북풍은 예리하고 냉철한 분별력을 말하며 남풍은 다분히 감성적이며 서정과 포근함을 말합니다. 주님은 본문처럼 북풍과 남풍, 곧 성령의 강하면서도 생명의 따스한 바람을 고루 불게 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를 잠자는 동산에 날리라고 노래합니다.

 

1) 바람이 일어나야 합니다. 동산에는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악한 바람이 아니라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2:2-3a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성령의 바람이 일어나면 거칠 것 없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의 영이 사람 안에 들어오시면 그 사람은 이제 예수그리스도가 의도하고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기를 즐거워하게 됩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도저히 해낼 수 없었던 일들이 신기하게도 가까워지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바람, 예수님의 지혜와 담대하게 하심과 거룩하게 하심이 성령의 바람 안에 모두 실려 옵니다. 남풍과 북풍이 골고루 불어오는 겁니다. 차가운 이지력과 따스한 온유가 함께 하나님의 동산 교회들을 덮기를 축복합니다.

 

2)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한 가정과 교회입니다.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는 갖가지 남풍과 북풍이 불어서 날마다 새로운 영으로 노래하게 됩니다. 새노래는 거듭 일렀듯이 새로나온 노래가 아니라 새로운 영의 새로운 감동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세상이란 사막의 광풍은 죽음을 몰고 오는 죄의 바람입니다. 치열한 경쟁의 바람, 균열과 분리의 바람, 갈등과 타락의 바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동산 교회와 성도에게 불게 하시는 성령의 바람은 성령의 향내가 나는 바람입니다. 37:9절에서는 사망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 앞에서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고 생명의 바람에게 명령합니다. 생명의 바람은 교회에 부는 성령의 바람입니다. 이 바람이 저와 여러분의 심령 안에서부터 시작해 가정으로 직장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번져 일어나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후2:16절에서는 세상에 있는 두 가지 냄새를 지적합니다. 하나는 사망을 따라 사망에 이르는 냄새. 또 하나는 생명을 따라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증거합니다. 고후2:14-16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생명을 따라 생명의 향취를 세상에 뿌리는 그리스도의 사절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향취라는 상당히 추상적인 단어에 대한 분명한 동감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의 향취 그것은,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영생에 대한 소망과 그 기쁨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이고도 실질적인 생활에서 영생에 관한 소망과 분명한 확신, 그리고 거기 따른 기쁨을 삶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몸으로 고백하는 진정한 거듭남의 삶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과거와 전혀 달라진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가장 큰 기쁨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바람으로 인하여 모든 내면의 세계가 변화한 것을 말합니다.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성도여러분. 5:22절에서 밝히는 성령의 열매 아홉가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3. 성령의 열매가 달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잘 익은 열매는 맛도 있지만 향기도 아름답습니다. 열매가 잘 익으려면 먼저 줄기에 단단히 붙어있어야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절입니다.

그리스도께 잘 붙어있는 삶은 작은 계획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해도 먼저 성령님을 초청하는 삶입니다. 자신의 이윤만을 추구하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일에 이미 익숙합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가능한 한 부딪치지 않으려고 많은 양보를 즐겨합니다. 참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하게 잘 버티며 견딥니다. 어진 마음을 가지려 노력합니다. 맡겨진 일에 성실합니다.

까칠하지 않고 부드러워서 가시돋힌 독한 말을 피합니다. 절제된 언어생활과 절제된 미소, 절제된 욕구, 곧 할례의 표가 드러납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언제나 입술의 열매가 찬미의 제사로 고백돼야 합니다. 입술에 찬미예수가 붙어있는 귀한 성도는 또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둡니다. 5:8-9절에서도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거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열매없는 무화과나무(21:18-19)는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마3:10절에서 밝힘으로 그 종말의 비참함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 몽돌비전성도 여러분.

예배하는 여러분, 일상사에서 늘 그리스도의 향기로 이웃을 감동하는 저와 여러분이시기 바랍니다. 몇 마디하지 않아도 교회 다니시지요. 어쩐지예수님의 냄새가 난다는 것을 이웃이 증거하게 되길 바랍니다. 뭔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속이려 해도 속일 수 없는 것이 성령의 열매로 인한 그리스도의 향내입니다.

 

아로마쎄라피란 말을 아실 것입니다. aroma()therapy(치료)의 합성어인데 식물의 향내로 몸과 마음의 질병예방과 개선과 건강증진을 꾀하는 민간요법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마다 어머니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향의 냄새, 어린시절 다락방의 냄새, 퇴빗내 등 여러 가지 추억의 냄새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안정된 마음에서 호르몬계의 분비를 개선하게 됩니다. 히포크라테스도 아로마쎄라피를 잘 활용했다고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모두 그리스도의 아로마가 되어서 나름대로 쎄라피스트(치료사)들이 다 돼야겠습니다. 우리를 만나는 자마다 우리한테 풍겨나는 그리스도의 아로마로 인하여 모두 치유 받기 원합니다. “. 그 사람하고 있으면 뭔지 후련해지는 거 있지. 거 참 신기해요.” “, 그 사람 정말 훈훈해요 고향에 온 거 같아.”

 

어떤 청년 일기에 이런 게 적혀있었습니다. “아스팔트 위 태양이 작렬하는 도심 한가운데 포로가 돼 있어도 언제나 나는 퇴빗내가 나는 시골친구이고 싶다. 그렇게 늙고 싶다. 잘 삭아져 누구든지 와서 고향의 내음을 맡고 푸근해지는 그런 퇴빗내가 되고 싶다. 그리고 언제나 맑게 웃고 싶다. 시냇가에서 붕어 잡아 끓여놓고 친구를 불러서 세상 뭐있냐? 넋두리도 하고 싶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아이처럼 경탄하련다. 잠시 지나는 나그네 길에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로 찬란하게 하셨나이까? . 라보니여. 이 메마른 삭정지에 예수의 피 부으소서. 부으소서.” 이 청년, 세월이 지나도 청년인줄 인정합니다. 청년과 우리들의 고민은 한결같이 아직도 예수의 향내가 나질 않고 종종 인간의 악취가 난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엎드리는 일 외에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16절 뒤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성도여러분. 주님이 요구하신 의와 평강과 일치가 이 죄악된 세상에서는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이 먼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다만 믿어 구원받고 의에 이르는 화목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실과를 맺는 게 아니라 말씀대로 우리는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열매가 달리면 향기는 나게 돼 있습니다. 향기가 나면 기뻐하시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 더욱 오래 머물러 계십니다. 주님이 머무르는 한 우리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함께 기뻐하며 천국의 모형을 몸으로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로서는 할 수 없지만 오직 믿음으로 주를 바라며 간구할 때 할 수 있거든이라니 그게 무엇이냐. 믿은 대로 될지어다.”주님선포가 남김없이 이뤄지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가정과 직장과 교회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