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9. 주일설교<요1:1-5. 육신으로 오신 말씀, 예수그리스도>
프롤로그] 사라지는 것 가운데 우리가 서 있고 우리 역시 사라지지만 구원받은 영혼은 영원하신 하나님 품 안에 들어간다는 이 소망 하나로 오늘 우리가 주를 찬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은 날들이 있는데 마치 계속 꺼내먹는 봉지속의 비스켓처럼 언젠가는 바닥이 드러날 것입니다. 관계에서 소유에서 삶에서 우리의 남은 날들은 지금 꾸준하게 줄어들고 있는데 언젠가 우리는 모두 헤어질 것이고 사라져 흔적조차 없을 것입니다. 소중한 날들을 영원한 생명을 향해 모두 투자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복음서에 이름대신“그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소개되는 제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본서의 저자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공생애의 처음부터 십자가아래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총애받는 충실한 제자였습니다. 당시 잘못된 가현설과 그리스도를 배척한 유대교를 지적하고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고자 성령께선 요한을 통해 본서에서 믿음의 실체를 보다 선명하게 밝힙니다.
본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믿음(faith)은 요한복음의 일관된 중심사상입니다. 믿음의 헬라어 어원은 실생활에서 바른 지식에 의해 분명한 한 가지를 택해야 할 때 요청받는 과감한 결단을 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최종목표는 인격도 부강도 명예도 아닙니다. 믿음의 최종목표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그리스도십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목표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더 가까이서 만나 뵈는 기쁨과 성장과 평강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1절을 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본문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는 것으로 세상만유의 근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과학의 근거요, 진리의 근원이 되는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먼저 본문에서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분명한 개념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와 말씀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태초부터 살펴봅니다.
창1:1과 요1:1은 창조의 시점을 꼭 같이 태초란 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태초, 히브리어 “베레쉬트”는 시간을 포함한 만유의 원점, 시작점을 말하지만 본 요한복음의 태초, 헬라어 “엔 아르케”는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기 전의 영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태초란 시간과 공간의 시작을 말하는데 고대 그리스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라는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백과사전에는 “성서의 개념으로서 시간을 초월한 절대적 시점, 즉 만유의 처음을 뜻함”으로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태초”란 말은 모든 존재의 첫 시작이란 말로 정리됩니다. 더 이상의 시점이 없는 최초의 시작점, 영원보다 더 이전, 이 영원 이전(永遠以前)의 첫 시점(時點)에 만유의 근거로 말씀이 계셨다는 것이 본문의 선포입니다. 그렇다면 태초에 계셨다는 말씀이란 단어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어 헬라어 “로고스”는 목록 또는 말 등의 의미로 그리스철학에서는 세계의 법칙성을 말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 오시기 전까지 말씀은 율법과 언약과 선포로써 그것은 그대로 실천적 삶의 모든 잣대로서 갖는 최상의 심판권,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이었습니다.
무릇 세상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자신을 표현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표현방법 중에 말과 글과 표정과 소리가 있습니다. 말이란 글과 달라서 기록되지 않고 기억됨으로 그 내용을 보존하게 됩니다. 글이 눈에 뵈는 흔적을 증거 삼는다면 말은 마음에 기억돼 증거하기 때문에 신뢰와 정직 없인 증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의 능력이란 반드시 신뢰와 정직이라는 전제를 요구하게 됩니다.
창1: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니라.”
요1: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이 두 개의 성구를 하나로 묶어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초부터 계셨고 세상은 이 말씀, 곧 그리스도로 인해 창조됐다.”
2.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금방 태초와 말씀이란 단어를 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언약과 선포로 날마다 들리는 하나님의 실체입니다. 여기서 말씀이 하나님의 실체라는 말, 즉 하나님의 실존실재가 곧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그리스도이신 줄 믿으면 아멘입니다. 이제 말씀에 대한 정의를 확인합니다.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존에 대한 선포이며 살아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말씀은 단순한 소리, 목소리 voice가 아닙니다. 성령의 내재가 증거되는 하나님의 선포라는 데에 가장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실체는 하나님이 타락한 인생들에게 가장 절실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화목의 말씀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아울러 우리 앞에 나타나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현된 언약, 즉 하나님의 신실이요, 하나님의 권능이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완성시키는 목적으로 화목제물이 되어 말씀은 완성된 것입니다. 본문3절을 함께 읽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3. 만물이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신실이요, 권능이라고 금방 들었습니다. 신실은 선언한 내용이 끝내 지켜지는 것이고 권능은 권세와 능력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권능은 그것을 대항할 아무것도 세상엔 존재하질 않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권능이 돼 그 권능으로 세상만유를 창조하신 겁니다. 지금 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말씀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눈에 뵈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을 구하시려 보이는 말씀, 그리스도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창조의 거룩한 권능의 도구인 말씀이 죄로 죽은 피조물 인간들을 다시 살리시려고 재창조의 권능으로 오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십니다. 그러므로 창조 여섯 번째 날의 본 창조와 골고다언덕에서의 재창조는 모두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창조의 사건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축복합니다. 그리스도는 창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말씀으로 죽은 영혼들을 재창조의 옷으로 입히시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만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권능을 보십시다.
1) 말씀은 창조의 권능이십니다. 창1:3절에“빛이 있으라.” 존재를 명령하시고 5절에는 “부르시니라.” 존재의 이름을 정하셨고 6절에서 “나뉘라.”계획하셨고 계획대로 이루셨습니다. 9절에 “뭍이 드러나라.”명령하셔서 그대로 됐고 11절에서도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아무 것도 없는 데서 씨가진 열매나무가 생겼습니다.
이 외에도 창조의 기사는 계속해서 단순명령어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절대하신 창조의 권세와 창조의 능력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권능입니까? “있으라. 드러나라.”고 말씀하시니 그대로 됐습니다. 창1장에는 “그대로 되니라.”란 말씀이 6번,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6번, “심히 좋았더라.”가 1번 나옵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실 엿새 동안 그때마다 그대로 되었고 그대로 된 그 엿새마다 보시기에 매우 좋으셨는데 특별히 마지막 날에 당신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는 심히 좋으셨다고 하신 우리 하나님을 찬미 찬송합니다.
2) 세상 만유만사(萬有萬事), 모든 것이 말씀을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본문은 세상에 뵈는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밝힙니다. 지극히 작은 것으로부터 광활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단 하나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시편기자는 인생이 저 하늘 끝자락에 가 있거나 바다 밑에 가서 숨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즉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께 집중하며 살면 세상의 이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직 여기가 죄로 인해 완전하지 못한 곳이어서 모순인 것도 헤아려지고 용납됩니다. 4절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3) 말씀은 생명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생명이 되십니다. 요14:6절에서 주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요4:14절을 찾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주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샘물이 되는 존재의 근원과 힘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천국을 몸으로 증거하며 살아가는데 절실한 것들을 넉넉히 채워주는 생명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4)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빛이십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이제 그리스도가 안 계신 곳, 그분을 제외시킨 어떤 곳에서도 어둠이 활개 쳐 불행과 고통이 난무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어둠의 세력들은 종종 성도들을 공격해 빛의 자녀들로 하여금 빛을 잃은 모습으로 죽은 자처럼 회중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과 멀리 있으면 그 빛은 간신히 보일 듯 말 듯해 우리의 인생살이와 마음도 평강을 잃고 행복이 보일 듯 말 듯 가물가물, 간신히 죽지 못해 살아가게 됩니다. 풍요의 시대 요즘은 먹을 것 입을 게 없어서 간신히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영의 양식, 생명의 말씀이 부족해 마음에 평화 없이 간신히 살아있거나 아예 잠든 자들이 많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편36:9 기자의 고백에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 안에 진정한 빛이 있고 그 빛 안에서 우리도 환하게 살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을 봅니까? 주 예수를 소개해야 합니다. 어둠은 다른 어떤 것으로 해결할 수 없고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즉 말씀에 접촉되면 어둠이 쫓겨납니다. 밝고 명쾌한 삶은 예수를 만남으로 시작하고 그 분을 자주 만남으로 성화되며 그 만남은 예배라는 전형적 교회의 사명을 통해 기초와 성장을 이뤄갑니다.
마지막 5절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4.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을 세상이 깨닫지 못합니다.
어둠은 빛이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모든 게 밝게 드러나 악한 것과 선한 것, 칭찬할 일과 책망할 일이 구별됩니다.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부끄러운 것과 자랑스러운 것이 구별됩니다. 참과 거짓이 드러납니다. 따라가면 죽는 길과 따라가면 사는 길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본문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뭔가 빛을 가로막았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죄와 의심이 복음을 막아 어둠이 어둠인지조차 모르고 평생 살아가는 것입니다.
1) 빛은 영원합니다. 빛이신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 지금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몸이 아니시니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습니다. 아프거나 병들거나 죽음이 없는 분이시며 늘 빛으로 인간의 속을 꿰뚫어 비치십니다. 히4:13절에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했습니다. 다 속일 수 있고 속아도 그 분에겐 드러나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2) 인간의 죄가 말씀의 빛,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밤에 빛이 없어도 태양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어두운 그늘 닥쳐도 하나님은 여전히 빛으로 계십니다. 우리의 의심과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돼 빛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하는 사람은 밤중에 태양이 사라졌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이 없어진 게 아니라 그냥 구름이 해를 가린 것뿐입니다. 악한 영들이 교묘하게 인간의 죄성을 이용해서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가로막아 방해하고 있지만 빛이신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손을 내밀어 주시고 영원히 환하게 비치고 계십니다.
3) 예수의 보혈이 죄를 덮어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허물어 버립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에덴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에덴은 이 지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 완전한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회복, 에덴의 회복이란 말은 완성된 천국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회복에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의 청산이란 절대조건이 있습니다. 절대무능으로 아무 대책이 없는 인간에게 우리주님은 자신의 생명, 이 땅을 밝히는 의의 빛으로 우리들의 죄 값을 조건 없이 대신 치러주셨습니다. 그렇게 죄로 죽었던 우리들의 영혼을 살려내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없애 버렸습니다. 즉 십자가로 인한 관계완성은 사랑의 완성, 곧 주님나라완성입니다.
완성된 나라에 믿음이라는 패스워드로 초청받아 지금 주님나라 예배당에 들어와 말씀이신 주님을 만나고 있는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란 사실상의 문제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거하고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동행을 말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 오늘도 변함없이 밝은 빛,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우리 곁에 함께 계십니다. 의심의 범죄를 결박하고 꾸짖어 내쫓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금도 변함없이 우리를 향해 비추시는 진리의 빛을 따라서 영원한 생명의 길, 기쁨의 길로 나아가십시다. 전혀 다른 길, 시온의 대로가 보입니다. 저와 여러분 가정과 생업의 현장에, 그리고 만나는 관계마다 주님의 빛이 가득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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