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25. 주일설교<민21:4-9(a). 그것을 보면 살리라.>
애굽을 나와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백성들은 오랜 날을 걷습니다. 처음엔 애굽의 노예로부터 풀려났다는 벅찬 감격에 힘든 줄 모르고 걸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몸은 지치고 갈 길은 멀고 험한데 끝이 보이질 않자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4절에서 백성들의 마음이 “길로 인하여 상했다.”고 합니다. 저들은 에돔땅을 통과하는 지름길로 가고 싶었으나 에돔의 저지로 홍해길, 즉 아카바만으로 향하는 광야 길을 가게 됩니다. 왕의 대로와 광야길은 말 그대로 아스팔트길과 진흙길의 차이입니다. 길가에 물과 초목이 있는 왕의 대로를 원하던 백성들은 물조차 구하기 힘든 뙤약볕의 모래먼지 길에서 기어코 약한 믿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식품 만나를 불평합니다. 이 불평으로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백성가운데 보내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대신 불평으로 바꿨다가 불뱀에 물려 죽는 현장을 우리가 말씀 중에 함께 가게 됩니다. 주님은 요3장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모세가 들어 올린 놋뱀은 그리스도와 깊은 영적의미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불뱀과 장대위에 달린 놋뱀을 상고하며 주님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깨닫는 귀한 은혜의 시간되기 바랍니다. 본문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1. 불뱀을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불뱀을 보내신 이유는 백성들의 불평이었고 불평의 내용은 길과 떡의 문제였습니다. 길은 광야길이요, 떡은 매일 꼭 같이 먹는 만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면서 베푸신 은혜가운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자라면 이 광야길과 만나는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이미 베푸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따라 길과 떡도 의심치 않고 신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한 바람에 불뱀 떼에게 당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방에서 불뱀 떼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공격하자 이스라엘은 삽시간에 초상집이 되어 갔습니다.
1852년 오스트렐리아 동물원에서 파충류 사육사 걸링이란 사람이 친구송별회에서 술에 취해 친구들 앞에서 모로코산 독사를 손에 들고 목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놀라는 친구들 앞에서 다시 제자리에 집어넣었습니다. 파충류사육사인 걸링은 소리를 쳤습니다. “이번엔 코브라다.” 그는 잠자고 있는 코브라를 꺼내어서 두 손에 거머쥐고 목에 또 걸었습니다. 코브라는 낯선 자의 접근으로 인해 잠이 깨어 살피는 듯 했습니다. 걸링은 코브라머리를 아래로 다시 위로 하면서 재주를 피듯 이러저리 꼬며 친구들 앞에 뽐을 냈습니다. 숙였던 코브라머리를 다시 들어 자신과 마주보게 했습니다. “oh, my friend." 순간 코브라는 순식간에 걸링의 두 눈 사이를 찍었습니다. 코브라는 바닥에 던져져 다음 공격대상을 찾았습니다. 걸링은 도와달라고 소리쳤지만 말리던 조수와 구경하던 친구들은 모두 도망쳤고 뒤늦게 달려온 의료진에 의해 응급조치가 됐습니다. 피범벅된 얼굴을 닦자 아주 작은 잇자국 두 군데, 독은 이미 온 몸으로 번져갔습니다. 걸링은 의자에 앉았고 코브라는 원래 위치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는 듯 했습니다. 온 몸이 부어올랐는데 기도가 부어 간신히 숨을 쉬며 입술이 파래집니다. 의사가 파이프를 기도에 꽂아 강제로 호흡했지만 그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여 눈이 안 보인다고 했고 곧이어 들리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몇 분후 그는 온몸이 늘어지면서 떠났습니다. 광야 한가운데서 이런 죽음의 불뱀독이 온 몸에 퍼져 여기저기 죽어가고 있는 현장을 본문은 간단히 한 줄로 소개합니다. “죽은 자가 많은지라.”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여기저기 죽어갑니다. 참혹한 일입니다. 불뱀은 그 색깔이 불빛처럼 현란하고 붉은 색이어서 불뱀이고 그 독이 몸에 퍼질 때 불처럼 급속해서 타죽듯 순간에 죽는다 하여 불뱀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뱀에 말씀의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그 불뱀은 한낱 도구에 불과합니다. 즉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미물이라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불뱀을 보내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보다 더 두려운 건 사실 자신의 교만입니다. 숙제를 못 했을 때 몽둥이가 두려운 아이는 생각이 짧은 아이입니다. 몽둥이가 아니라 몽둥이를 들 수도 있고 내려놓을 수도 있는 선생님이고 더 큰일은 게으른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아이가 지혜로운 아이입니다.
불뱀을 보내셔서 백성들을 죽게 하신 이는 다름아닌 이스라엘을 애굽의 학정에서 구해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셨다면 불뱀에 이어 또 다른 빙책과 목적이 있다는 것을 우린 믿음으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불뱀을 보내신 하나님은 불뱀을 통해 불평하는 백성들을 책망하고 바른 신뢰의 관계를 유지하려 하셨습니다. 즉 믿으면 살고 못 믿으면 죽는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시고자 한 겁니다. 바른 삶과 풍성한 삶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게 참된 부모의 사랑이며 의무입니다. 그리고 그 교훈을 가르치는 방법 중 비록 가혹한 것이 있다 해도 생사에 관한 교훈은 반드시 시행돼야 합니다. 불평으로 인해 죽은 자가 많았다는 것은 잘 가르쳐 신앙을 회복해 살려낼 자가 많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징계는 또 다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불뱀을 보내신 하나님, 치료의 놋뱀을 명령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2. 놋뱀을 만들어 높이 들게 하신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1) 놋뱀입니다. 놋뱀은 그 만든 목적이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려는데 있습니다. 놋뱀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상징입니다. 세상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뱀에 물려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게 죽어가는 현장에서 치료의 방법을 하나님은 놋뱀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놋뱀은 백성들을 징계했던 도구, 뱀의 형상입니다.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은 (1)죽은 뱀입니다. 뱀을 바라보는 자에게 놋뱀은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은 뱀으로서 이제 하나님의 징계가 멈추었다는 선언이 됩니다. 뱀을 보내셔서 백성들을 죽이신 하나님께서 그 뱀을 죽은 뱀으로 보여주심으로 징계가 끝난 것을 선언하신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우리들의 죄악도 죽여 높이 달아버렸습니다. 십자가는 죄와 사망권세의 종말을 알리는 죄를 향한 저주의 선포였습니다. 롬6:6절에선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죽여서 다시는 죄에게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증거합니다. 갈5:24절에서도 “그리스도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죽은 놋뱀은 우리들의 죄와 죄의 본산지인 육체와 사단의 사망을 선고했고 빛을 받아 번쩍이며 달려 있습니다.
(2)빛나는 죽은 뱀입니다. 놋뱀은 멀리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번쩍입니다. 징벌의 도구를 죽여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 그 의의 빛이요, 영광의 빛입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려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구리 빛으로 빛나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축원합니다.
2) 높은 장대에 매달아 올렸습니다. 구원의 깃발은 모든 죄인들이 보도록 높이 달았습니다. 선악과로 세상을 죽음으로 몰아간 뱀, 그 독이 무섭게 퍼져가는 세상 사람들이 더 많이 살아날 수 있도록 높은 장대에 매달아 올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소식, 복음은 누구나 다 듣도록 해야 합니다. 큰 거리에서도 골목에서도 우리는 쉬지 않고 외쳐야만 합니다. 복음은 오늘날까지 숨겨진 적이 없었습니다. 만인이 듣고 알고 보아 죄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복된 새 생명으로 거듭나길 주님은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높은 장대에 구리뱀을 만들어 더 이상 죄를 책망할 어떤 것도 이렇게 죽은 뱀처럼 사라졌다고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이 구원의 복음을 자신의 가슴속 어디에 담아두고 살아갑니까? 가장 깊은 곳에서 날마다 진액을 우려내어 현실과 미래의 비젼에 최선책으로 적용하며 순종으로 살아갈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의 상징 표지를 장대에 달아 높이 올렸다고 증거합니다.
어떻게 높이 올려 달까? 우리가 낮아질수록 복음의 기는 높이 올라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운데 주신 복음을 가장 높은 데에 올려서 가장 귀한 소망이 되기 바란다면 복음보다 앞서가는 어떠한 이치나 도리도 저와 여러분 안에 일체 없기를 간곡히 주의 이름으로 청구합니다. 가장 높은 곳엔 단 하나, 하나님의 말씀, 구원의 복된 소식, 죄와 사망권세의 종식선언만이 깃발을 펄럭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3) 바라보는 자마다 살아났습니다. 뱀에 물려 빠른 속도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겐 약초도, 어떤 구급행위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방금 전 소개한 실화의 주인공은 의자에 앉은 채 죽었다고 합니다.
의자에 앉아 죽기 직전 어떤 특단의 조치를 해서 살아날 수만 있다면 그는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살고자 했을 겁니다. 본문에서는 단순히 장대에 매단 죽은 놋뱀을 바라만 보면 산다고 선언합니다. 죽음의 덫 앞에 좌절한 사람이 다만 바라보는 것만으로 살아난다는 것은 최고의 복음입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인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1”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를 소망하면 살아납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는 말씀은 믿음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명령입니다. 즉 그것을 보면 반드시 살아난다는 믿음으로 봐야만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장대위의 놋뱀을 바라보는 마음의 자세가, 보면 죽을 몸이 살아난다는 확신과 소망으로 절실해야 합니다. 혹시나 해서 보는 것도 아니고 호기심에 보는 것도 아닙니다. 죽을 자가 살아난다는 절박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하나님은 요구하고 계셨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이러한 확신과 소망가운데 절박한 심경으로 봐야 합니다. 주를 바라는 것, 그리스도를 원하는 마음이 구리뱀을 바라보는 절대 절명의 심경이 돼 바라본다면 그 구원과 감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즉 그것을 보면 살리라는 말씀에는 먼저 (1)믿음으로 보면 살리라는 것과 다음으로는 (2)간절히 소망하며 보면 살리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보면 살리라는 것은 합2:4절 말씀처럼“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인하여 살리라.”는 말씀을 뒷받침합니다. 줄인다면 간절히 소망하되 확신을 갖고 바라보면 반드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곧 믿음으로 보면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과 간절히 소망하면 살리라는 말씀을 다시 연결한다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됩니다. 첫째 불신앙, 곧 의심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거듭남을 체험할 수 없다, 다음 간절히 소망하지 않는 믿음으로는 불뱀에 물린 독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불뱀은 징계의 도구입니다. 불뱀 독은 사망의 독입니다. 온몸에 독이 빠르게 퍼져 몸이 부어 기도와 혈관이 막히고 모든 기능이 상실돼 통증 속에 죽게 됩니다. 불평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셔서 분노하셨습니다. 그 불평은 결국 그들이 애굽을 탐하여 잃게 된 영의 눈과 귀와 온 감각으로 인하여 생긴 것입니다. 그렇게 불신으로 인해 깨진 관계 속에서 불평하는 배신행위, 배신은 의를 향하는 신앙양심감각이 무딜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택한 자녀들이 배신자로 살아가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신뢰,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푸념하고 불평하는 자들을 희생시켜가면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백성들은 이미 경험을 통해 잘 알게 됐습니다. 믿어드려야 할 하나님께는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가 없습니다. 믿고 순종하며 찬양해야 할 백성들의 믿음이 문제였습니다. 불신앙은 기다리지 못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불신앙은 이기심에서 시작됩니다. 불신앙은 끝을 모르는 욕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불신앙은 비교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불신앙은 하나님이 절실할 때 사라집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과거의 애굽시절을 떠올리며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모든 것을 비교해도 출애굽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능력이요,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먹는 것 하나를 오판해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박한 식물이라고 불평한 것입니다. 냉정히 생각하면 먹는 것도 분명히 만나를 따를만한 식품이 없습니다. 아침마다 거저 얻는 만나는 완전식품이었고 몸에 어떤 부작용도 없는 유익한 식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시절의 음식은 기름지고 풍성해보여도 여러 가지 질환을 유발할 수 있는 세상음식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애굽시절의 음식을 찾았습니다.
시집온 새댁이 과거 어떤 남친과 지하 레스토랑에서 먹던 맛진 요리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랑은 아내가 요리이름을 들먹이는 것보다 그 때 어떤 놈과 무슨 말을 속삭였냐는 것에 더 괴롭고 괘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셔서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애굽의 요리, 고기, 부추, 파, 마늘이 아니라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애굽을 고향처럼 의지하고 살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죽일 만큼 진노하셨음을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 평생 살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할 적이 많지요. 바른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길게 참아주십니다. 부족해도 일편단심을 기뻐하시는 주님. 어리석은 인생들은 참아주시는 하나님을 마치 안계시거나 무심한 것처럼 등한시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고없이 닥친 불뱀떼를 만나 심각한 위기 속에서 죽음의 낭떠러지로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달려가는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보게 됩니다. 놀라서 급정차를 시도하지만 이미 징계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동안 불평하며 하나님을 업신여긴 일들을 회개하지만 벌어진 일은 쉽사리 정리가 되지 않고 죽음의 시간을 count down하며 다가옵니다. 불뱀을 보내신 하나님은 다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올리고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징계받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구원받을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예수그리스도 우리 생명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온갖 세상적인 일들, 육체의 길을 따라 죄가운데 죽은 영혼들은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봐야만 살아납니다. 부활의 주님이 죽고 다시사신 것은 불신과 세속과 우상 속에서 불뱀에 물려 죽은 영혼들을 살려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자신의 몸을 드려 스스로 놋뱀이 되어 우리가 바라봐야 할 생명의 부활이 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다만 믿어 받는 이 복음을 바르게 잘 믿어서 사악한 뱀의 유혹과 공격 앞에 든든히 세워져가는 하나님의 집들이 다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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