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30. 주일설교<출5:1-3. 광야에서 지키는 절기>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 우리가 있음. 뵈지 않는 것에 깊은 고찰이 있다면 뵈는 것으로부터 상당부분 자유하게 됨.>
육체를 지닌 인생들은 아무리 영적이고 고상한 인격이더라도 육신 때문에 많은 제약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채워주어야 하는 여러 가지 문제로 종종 비통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가 우리 인간들의 교만을 결정적으로 막아준다고 볼 때, 우리인생 모든 것은 모두 서로 절묘하게 어우러져 하나님 솜씨를 증거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물들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증거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3개 구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 험한 인생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삶의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 그 목적과 가치에 대하여 극명하게 답을 주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오늘 날의 교회는 누구입니까?
1. 하나님이 불러내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누가 누구를 불렀습니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들입니다. 누가 불렀습니까? 마약 왕이 불렀다면 우리는 마약중독자의 소굴에 살면서 마약밀수꾼이 되고 마약중독자가 되는 겁니다. 요즘 국제전화사기꾼들이 중국을 아지트로 극성을 부립니다. 거기서 왕초가 한국표준말을 잘한다고 누군가를 거액에 불러갔다면 그는 거기 가서 국제전화사기꾼을 교육하는 사기꾼교사가 될 것입니다. 누가 불렀는가?
죄와 사망아래 죽어있던 우리를 불러내신 분은 어떤 재벌가도 아니고 권세 있는 세도가도 아닙니다. 덕망있는 평화수호자나 정의에 불타는 혁명가도 아닙니다. 우리를 불러내신 분은 100년 안팎에 죽는 인생이 아니십니다. 재벌가나 세도가나 선구자나 혁명가가 모두 이 땅에서 사라질 때 그들을 받아 심판하시고, 애초 그들을 창조하셔서 세상에 보내셨던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십니다. 1절 뒤쪽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어디에서 무엇을 위해 부르셨는가?
2. 예배를 위하여 광야에서 부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급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의 백성들이 제사, 곧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출2:23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소리가 하나님께 들렸다.”고 했습니다. 3:9절에서도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들리고 애급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듣고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이집트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자로 구원하신 것은 그들의 신음소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애급에서의 불러낸 목적은 단순하게 노예에서 풀어주는 게 아니라 풀려나 예배자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애급의 고통은 자유를 그리워하게 하였고 자유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했습니다. 40년간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갑니다. 그리고 그 자유가 결국 예배를 위한 자유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광야의 자유는 예배할 때 완성되는 하나님과 우리 모두의 공동목표이고 기쁨입니다. 여기서 우리 “광야”라는 말을 살펴봅니다.
애급은 당시 최고의 문명국이었고 강국으로 기름지고 풍부해 없는 게 없었습니다. 애급은 그들이 일군 부강과 문명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모두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수많은 우상을 섬기며 음란한 가운데 풍성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오염과 고통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으신 겁니다. 그들은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언약(2:24-25-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을 불러내셨습니다. 어디로 불러내셨습니까?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하오니”
3. 광야에서 예배로 만나는 하나님이십니다.
1)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적합한 곳입니다. 배부르고 등 따듯한 곳에서는 하나님을 만나기 힘듭니다. 하나님 없이도 눈에 뵈는 좋은 게 넉넉하게 나를 위로합니다. 풍족한 물질과 부드러운 인격과 손만 내밀면 잡히는 좋은 환경에서 예배란 어쩌면 상당히 성가 싫은 행사일 수 있습니다. 아쉬운 게 없고 없는 게 없는데 뭘 달라냐는 겁니다. 배부른 사람에게 예배는 하나님께 뭘 얻어내는 정도지만 광야에서 지키는 예배는 생사의 문제로 절대 무능한 자신을 통째로 바치는 번제의 제사가 됩니다.
어떤 분의 특별한 신앙고백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24년 이상을 남편없이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열악한 경제사정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혼 이후 자정 이전에 자본 적이 없었고 새벽 4시면 추운 겨울이나 여름이나 어김없이 일어나 일하러 나간다고 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일이 싫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낮에 늘 졸립고 앉기만 하면 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제겐 성경처럼 가슴에 깊이 박혔습니다. “참 감사뿐입니다. 안 그랬으면 죄짓고 살았겠죠.” 주님이 저에게 들려주신 천상의 음성이었습니다. 환경이 좋았더라면 필경은 육신의 요구를 따라 죄짓고 살았을 거라면서 지금의 이해할 수 없는 환경, 불행하고 가난한 삶의 질곡 한 가운데서 그는 주님 앞에 죄지을 틈조차 없는 고단한 환경을 진실로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우리가 따듯한 아랫목에서 부패한 삶으로 변질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한평생이 잠시지만 하나님품안에 안기면 영원한 삶을 주님 앞에 살 것입니다. 그 때의 끝이 없는 삶을 지금 우리가 짧은 인생 잘 인내하고 감사하면서 나를 절제하고 준비하는 겁니다. 우린 주님을 사랑한다하면서도 끝내 육체를 힘겨워합니다. 주님사랑은 희생입니다. 그 희생 후에 오는 기쁨이 주님의 선물입니다. 거긴 안방 아랫목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광야에서 절기를 지킨 후 비로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2) 예배승리는 인생승리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 나가기 전에 이미 우리들의 승부는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로 벌써 판정이 났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삶의 성패여부가 이미 예배의 현장에서 결정 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승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성공한 것이며 하나님과의 화목은 모든 것과의 형통을 열어주는 능력의 시작인 것을 잊지 않기 당부합니다. 왜 잊지 않아야할까?
예배의 승리가 세상을 이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승리로 불신앙과 의심이 사라집니다. 각종 병마가 떠납니다. 얽힌 문제와 우울증과 귀신이 예배 중에 떠나는 줄 믿고 아멘. 성령이 친히 인도하시는 승리의 예배는 모든 더럽고 부끄럽고 악한 것들을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도의 능력은 어디서 옵니까? 거룩함과 순결입니다. 거룩함과 순결은 어디서 시작됩니까? 예배입니다. 예배가 살아나면 세상과 마귀가 교회와 성도와 그 가정 앞에 힘을 못 씁니다. 예배는 성도의 능력입니다.
잊지 마셔요. 언제나 성도가 갖는 삶의 수준은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수준을 결코 넘어서지 못합니다. 예배의 깊이와 폭은 예배자의 삶에 있어서 그 깊이와 폭의 수준을 결정해가게 되는 줄 믿어야 합니다. 본문 3절의 끝부분은 예배가 막혀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모세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예배승리 인생승리며 예배실패 인생실패 믿고 아멘입니다. 본문 3절 앞쪽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4. 제사, 곧 예배는 희생입니다.
1) 희생이란?
보통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말은 죄가 없는데 죄를 덮어썼다는 겁니다. 그렇게 문제가 풀리면 그는 희생양이 된 겁니다. 희생양은 본래 기독교용어입니다. 희생제물을 말하는 희생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 갚아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당한 예수님을 말합니다. 제사에는 제물이요, 예배에는 예물이 핵심을 이룹니다. 희생, 곧 제물은 내가 치러야 할 것을 뭔가로 대신 치른다는 대체의 의미를 갖습니다. 내 죄 대신 양을, 또는 내 빚 대신 다른 걸 드리는 대속, 희생이요, 대신 갚는 입니다. 그래서 제물의 목적은 죄로 인해 깨진 관계 곧 죄라는 빚을 청산함으로 일어나는 관계회복이고 관계회복으로 인한 화목의 지름길입니다. 한마디로 희생의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관계의) 회복인 것입니다.
2) 희생이 없어 실패하는 예배들.
사랑하는 동지여러분. 간혹 예배에 실패합니까? 살아있는 감동의 예배가 아니었습니까? 어떤 봉헌보다 더 중요한 저와 여러분 자신을 죽여서 제단에 올리는 희생이 부족함을 깨닫기 축복합니다. 그래서 제단에 올리는 제물, 예배의 예물을 드리기 전에 내안에 있는 하나님의 반대와 대적을 죽이는 죄 죽임의 칼, 성령의 검을 드시기 주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에 분별의 날선 검이 들어가야 합니다.
올려드리는 찬송의 내용과 감동 그리고 강대상의 말씀과 기도에 있어서 뿐 아니라 예배자세와 마음가짐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는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엄숙한 영적전투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요소들, 개인적이고 육신적인 모든 것을 철저히 부수고 밟는 파쇄기능을 주님이 주실 줄 믿습니다. 렘24:7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려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또 렘29:13절에는 “너희가 온맘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전심은 순결과 연결됩니다. 불순한 게 전혀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온 맘 가득히 주님이 내안에 꽉 차는 성령의 충만으로. 집중, 또 집중 아멘으로 우리 예배당과 가슴이 차고 넘쳐나길 축복합니다.
거듭 일러드리지만 생활하다가 예배드리러 잠시 온 것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태어났습니다. 살기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드리기 위해 살아있고 그래서 건강해야하고 그래서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과 그 능력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할 때 드러나고 그 의탁은 예배를 통해 더욱 강화되어 간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되기 바랍니다.
이미 알고 있지만 다시 일러드립니다. 예배 마치고 집에 갈 때에 “다녀오겠습니다.” 예배당 왔을 때는 “다녀왔습니다.” 우리 본향은 여기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여러분의 본가 영적주소지는 그래서 주민등록의 주소지가 아니라 주님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교회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본가로 가려는 이스라엘에게 애급 왕 바로는 끈질기게 집착합니다. “너희 남자만 가서 예배하라. 소와 양은 두고 가라” 가족일부나 가축을 볼모로 잡으려합니다. 세상인맥과 여러 정황이 교회가는 걸 늘 반대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명령에 따라서 모든 사람과 가축을 다 데리고 예배하러 갑니다. 짐승도 사람도 산천초목도 다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모든 것을 드리는 온전한 희생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전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삶의 어느 순간이 아닙니다. 어느 부분은 드리고 어느 부분은 남겨놓는 게 아닙니다. 온 삶으로 드리는 겁니다. 온 몸으로 드리고 전인격적으로 드리는 게 예배입니다. 취미활동, 특기, 계획, 기질, 성향, 자존심, 수치, 혈기와 부족, 아름다운 추억과 부끄러운 기억들, 시간, 가치관, 소유개념, 습관, 정서와 문화, 마지막엔 안타까운 인격까지도 다 드리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생활예배라는 말이 맞습니다. 생활이 예배인 인생, 예배가 일상이 되는 게 성도의 삶이고 그러한 전적 헌신의 삶은 죽음을 이기신 부활예수의 동행으로 비로소 가능합니다. 거긴 자신이란 존재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고 무능한 자신에게 의지할 마음도 없습니다.
자신감이 없는 것과는 다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전능하신 그리스도께 의뢰한 후 주님이 하신다면 부족한 종을 통해서도 놀라운 일을 하시리란 확고한 믿음을 갖는 담대한 용기와 능력입니다.
4) 예배는 헌신의 결단과 거기 따른 순종까지를 말합니다.
사무엘선지자는 불순종으로 범죄한 사울왕에게 불행한 종말을 예언하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명령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굿은 보러가지만 예배는 드리러 갑니다. 예배의 근본은 드린다는 데 있습니다. 뭘 먼저 드립니까? 자신입니다. 다시 확인합니다. 능력은 어디서 옵니까?
거룩함과 순결에서 옵니다. 그렇다면 능력있는 예배는 거룩한 영에 의지해 드리는 것과 오직 말씀에 근거하는 순결한 신앙에서 오는 것입니다. 불경건한 드림과 불순한 동기의 예배에서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불순한 동기의 예배란 드리려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만을 채우고자 하는 예배, 받는 게 목적인 예배를 말합니다. 자원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으로 자신과 자신의 모든 걸 하나님의 소유라고 고백하는 예배가 최선의 예배요,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하게 받는 예배인 줄 믿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을 기름진 애급에서 메마른 사막으로 불러내셨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절박한 신앙은 위대한 신앙고백을 낳고 위대한 신앙고백은 위대한 삶을 만들어 갑니다.
오늘 우린 하나님말씀을 통해 우리를 광야에서 부르신 뜻을 알았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기뻐하며 하나님께만 드리며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로 살기를 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인간 스스로는 생존자체가 불가능한 곳,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적합한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운데 하나님 외에는 전혀 기댈 곳도 없고 소망이 없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라는 것을 감사해야겠습니다. 사55:6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할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풍요와 평강의 하나님은 우리가 절박한 광야에서 절망대신 주님을 깊이 알아가며 친밀히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하오니” 그렇게 광야로 불러내셔서 히브리인임을 고백하게 하신 뒤 그 손에 가득한 풍성과 평강과 기쁨으로 우리 삶을 주장하시기 원하십니다. 광야 길을 함께 가는 사랑하는 길동무여러분. 광야는 단순히 메마른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날만한 곳입니다. 광야에서 주님만나 머지않아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땅에 들어가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받아 기쁨으로 주님을 자랑하며 선포하며 나누는 저와 여러분인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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