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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6.08.14. 주일예배<고후 4:7-12. 보배를 담은 질그릇, 그 영광>

by 설렘심목 2016. 8. 14.

2016.08.14. 주일예배<고후 4:7-12. 보배를 담은 질그릇, 그 영광>

 

프롤로그 [갈 때 두고 갈 것과 가져갈 것 중에 두고 갈 것은 모두 후손에게 빌려 쓴 것이고 가져 갈 것은 삶의 주요한 목표가 돼야 함. 순간을 바쳐 영원을 획득하는 죄고의 인생운영지침서 복음]

 

고린도는 로마의 식민지 아가야지방의 행정수도입니다. 로마최초로 검투사 경기가 벌어진 고린도지방은 인류역사상 최초로 도로통행세를 스트라보에서 받아 큰 부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이 부요함이 예외없이 모든 고린도를 부패하게 했습니다. 상인들의 최상의 거주지가 되어 빈부의 차이는 심했고 그 유명한 아프로티테 신전 1000명의 여사제는 말 그대로 신전매춘부로 귀한 신분을 자랑하며 육체의 쾌락과 물질의 풍요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3대여신. 지혜-아테네. 여신의 주관자이며 제우스신의 아내 헤라. 사랑과 미모의 아프로디테<비너스> 셋의 아름다움 중 제일을 아프로디테로 판정한 제우스의 스승 파리스. 비너스의 허리에는 캐스트라는 수치의 띠가 띠워져 있었다.)그럼에도 아테네처럼 식자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방만한 종교와 예술적인 발전은 있었지만 지식적으론 빈약한 도시였습니다. 여기에 교회에 남아있는 유대주의자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늘 흔들어댑니다. 성령께선 바울사도의 자서전적인 고린도서를 통해 복음의 진실한 가치와 성도의 삶의 향방에 대하여 애절한 마음으로 본서를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오늘은 본문이 밝히는 질그릇과 보물의 관계를 말씀을 따라 살피며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1.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입니다.

 

귀한 명품보배는 천한 질그릇에 보관하지 않고 비싼 금고에 겹겹이 채워 보관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보배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금이나 은보다 훨씬 더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천한 질그릇에 담겨 있습니다. 본문에서 밝히는 질그릇 안의 寶貝는 이미 증거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구원이 행위나 율법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에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한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요,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인 것을 성경대로 우리가 믿습니다.

 

이 복음은 온 인류에게 마지막 소망이요,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된 영생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가치요, 생명인 복음이라는 보배가 가장 낮고 천한 질그릇에 담겨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파돼 갑니다. 복음이 금이나 은그릇에 담기지 않고 질그릇에 담긴 이유를 본문은 심히 큰 복음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밝힙니다.

먼저 질그릇을 살펴봅니다. 질그릇은 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조금만 충격을 주어도 쉽게 깨집니다. 내려놓을 때도 곱게 다뤄야지 덜컥 내려놓으면 깨어집니다. 다음은 투박합니다. 불가마를 거치지 않아 흙의 특성을 그대로 지녀 연약한데다가 세련되지 못합니다. 두드리면 영롱한 소리를 내지 못하고 둔탁한 소리가 납니다. 볼품도 없습니다. 반면 뜨거운 불가마에 구워낸 자기류는 두드리면 영롱한 소리를 냅니다. 본문은 우리를 질그릇으로 표현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예민하게 반응도 하지 못하고 좀 불편하면 그나마 있던 믿음도 금이 가고 경건의 모양조차 어려운 질그릇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마나 천하고 형편없는 질그릇들인지요?

주님은 이러한 질그릇에 복음을 담아주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렇게 볼품없고 연약한 질그릇을 언약의 금향로로 변화시키신 주님을 찬송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연약한 질그릇임을 기뻐해야합니다. 본문은 우리가 질그릇된 것은 더욱 하나님의 심히 큰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 모두에게 알리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질그릇을 생각할 때 우린 호렙산에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의 불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무 쓸데없고 모양 없는 가시떨기나무에 임하신 언약의 하나님 히브리인의 왕께서, 질그릇에 보배인 복음을 담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가시나무에 오셔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언약처럼 연약한 질그릇에 담긴 채 선포됨으로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금이나 은그릇이 아니고 청동이나 백자, 청자가 아닌 못생긴 오지항아리에 복음을 담으셨을까? 여기서 우리가 얼른 떠올리는 간단한 답이 있습니다. “히브리인의 왕, 못난이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고전1:27-29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이렇듯 질그릇을 통하여 그 안에 담긴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셨고 그것은 그 질그릇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영생의 권능이 여실히 증거 됨을 통해 하나님의 높으심과 친히 일하신다는 것을 세상만방에 알리고자 하신 겁니다.

 

한 구절 더 봅니다. 고후12:7-10절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려고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지극히 연약한 자신에게서 주의 영광이 더욱 극대화되는 것을 깨닫고는 도리어 자신의 질그릇 됨을 기뻐하는 바울의 고백을 우리도 즐겨하길 원합니다.

 

다른 말로 전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히 크신 능력, 복음을 나타내는데 질그릇이 금그릇보다 더욱 요긴한 이유는 우리들의 보잘것없는 실체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주님 나라가 확산돼가는 것은 우리의 부족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능력은 엄위하고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 학생들 중에 아주 왜소하고 영리하지 못한 한 학생을 지명해 과제물을 걷어 오도록 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비웃었습니다. 과제물은 석고상이었는데 40개의 석고상을 운반하는 일도 그랬고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두의 염려를 못난 소년은 물리치고 선생님의 심부름을 마쳤습니다. 알고 보니 선생님에겐 성능 좋은 손수레가 있었던 것입니다. 수레는 한 번에 많이 실을 수 있어 아주 편하게 일을 마쳤습니다. 선생님은 만족했습니다. 선생님이 내어준 수레는 이 작고 못난 소년에 의해 확실한 성능을 확인이 된 것입니다. 혹 힘 있고 야무진 학생이 수레를 몰고 일을 했다면 그것은 선생님의 배려보다는 학생의 능력 때문이라고 모두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워낙 작고 못난 친구가 많은 일을 해내니 친구들은 그것이 선생님의 손수레 덕분임을 알게 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의 수레는 선생님의 능력이요, 못난 학생을 택한 배려입니다. 보잘 것 없는 소년 때문에 더욱 그 능력이 드러난 것처럼 하나님의 복음이 갖는 능력은 그것을 담은 그릇이 부족할수록 더 확연해 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이제 다시는 자신의 부족을 탓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부족할수록 더욱 빛나는 주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진실하고 충성되기 원합니다. 늘 부족하지만 곧은 마음에 오직 주님만을 향하는 일편단심으로 성실을 다한 자, 하늘의 상이 그의 것인 줄 우리가 믿습니다. 본문 고후4:8-10절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2. 주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질그릇입니다.

 

한절한절 살펴봅니다. 먼저,

 

1)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습니다. 우겨쌈이란 말은 에워싼다는 것과 약간 다릅니다. 에워쌈은 포위하는 것이고 우겨쌈은 즙을 짜기 위해서 포도틀에서 포도를 짓누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하는 것은 성도가 신앙을 지키려고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잘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성도여러분,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짓눌러도 거긴 죽음이 아니라 신앙의 진액, 믿음의 엑기스가 고여 천국을 깊이 알아가며 영적경륜을 더해 그 나라가 더 가까워지는 현장입니다.

 

2)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치 않습니다. 성도는 답답한 일을 당할 때 결코 세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은 숨이 막힐 것 같은 현장에 우리를 가둬놓고 길이 안보이게 합니다. 힘이 들어 곧 쓰러질 것 같습니다. 본문은 그럼에도 성도는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과연 가능한 일인가? 가능합니다. 그 답답함에 낙심대신 새 힘을 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3분만 숨을 멈춰도 죽는 질그릇, 이 안에 감춰진 보배,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은 언제어디서고 우리 곁을 떠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은 불변하는 약속입니다. 그 언약, 혹시 우리가 잊어도 우리 주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믿기를 축복합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니 답답함도 잠시며 두려움도 순간입니다. 답답한 일이 사라지기 전에 그 현장을 얼마든지 이기게 하시는 우리 좋으신 능력의 주님을 찬송합니다.

 

3)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습니다. 누가 우릴 짓눌러도 주님은 우릴 버리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주님을 멀리하거나 떠날 뿐, 주님은 우리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습니다. 박해는 순간이지만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심은 영원합니다. 주와 같은 이 어디 또 있을까? 없습니다.

 

4)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혹 거꾸로 넘어져도 망하는 게 아닙니다. 믿음의 강화와 훈련을 통해 더욱 견고한 군사로 태어나는 과정일 뿐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다른 말로 해봅니다. “우리가 종종 사방으로 짓눌리고, 답답한 일과 박해와 넘어뜨림을 당합니다. 그때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인 것에 대해 늘 몸으로 갚아야한다는 거룩한 부담을 우린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도 결코 쓰러지거나 패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운데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영, 주의 영이 함께 함으로 죽음과 패배는 예수님의 소유가 된 우리와 이미 무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부활의 권능입니다. 고통과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영이십니다. 본문은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통 뿐 아니라 주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즉 우리의 힘든 상황이 결코 우리를 해치지 못하는 것은 다시사신 부활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우리도 주님처럼 이기고 새 생명으로 일어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이 우리 몸, 우리 삶을 통하여 증거 되도록 하려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후6:9-10절입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안에 계신 주님을 찬송합시다. 십자가아래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 우리주님이 볼품없이 패배했다고 혀를 찼습니다. 로마병사들은 진정 네가 메시야라면 거기서 뛰어내려오라.”고 하면서 그러면 우리도 믿겠다고 조롱했지만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죽음만이 완전한 부활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부활로 말미암아 자신을 믿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대장을 십자가사역으로 보장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여러분. 우리는 늘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진정 스스로도 보기 흉한 자신의 변화 받지 못한 모습에 종종 좌절해 본 사람이라면 거듭남이란 너무나 소망되는 벅찬 일입니다. 인간이 예수믿어 성도되면서 받은 단번의 구원은 평생 이어지는 성화라는 거듭남의 숙제가 있습니다. 성도마다 이 지속적 거듭남을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거듭남이란 거듭나기 전의 모습이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는 엄숙한 전제를 갖습니다.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둔 채 거듭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몸이 서울에 있고서야 어찌 평택으로 옵니까? 두 군데 동시에 몸이 있을 수 없듯이 성화를 위해서는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 죽음은 본문에서 말하듯 우겨쌈과 답답하고 낙심하며 박해와 거꾸러뜨림을 통해 우리를 소망된 하나님의 귀한 자들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받은 저와 여러분. 우리 삶에 쉬지 않고 다가오는 죽음과도 같은 아픔들은 그 아픔 뒤에 성화, 곧 영적으로 인물이 훤해지는(한 인물 나는) 거듭남을 기약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되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인물이 훤해지기를) 거듭나기를 진정 소원하는 분들은 거듭남을 위해 찾아오는 아픔들을 주님향한 감사함으로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뜻 이뤄지기 위해 힘쓰고 아파하는 자마다 하늘의 영광과 땅의 복이 넘칠 줄 믿습니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