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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6.08.03 주일예배설교 <삼하 6:7-11. 웃사, 다윗, 오벧오뎀>

by 설렘심목 2016. 8. 7.

 

2016.08.03 주일예배설교 <삼하 6:7-11. 웃사, 다윗, 오벧오뎀>

 

 

법궤를 다른 말로 불순종의 증거궤라 해도 고백적 측면에서 무리가 없습니다. 이는 법궤 안에 있는 항아리 안의 만나,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두 번째 십계명 돌판 등이 모두 백성들의 불순종과 함께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의 전체외부는 금으로 덮여있습니다. 그리고 뚜껑은 두터운 순금으로 되어있고 이곳을 시은좌 또는 속죄소라고도 부릅니다. 즉 인생들의 불순종과 죄를 용서함으로 은혜가 부어지는 곳입니다.

순금의 궤 뚜껑위에 희생제물의 피가 뿌려지면 지성소는 온통 죄악의 고약한 피비린내로 대제사장의 마음은 숙연하게 조여들 것입니다. 백성들의 죄를 한 몸에 안고 하나님 앞에 선 자의 심정이 죄의 피비린내로 움츠려드는 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법궤가 20 년간이나 기럇여야림에 머물러 있다가 드디어 예루살렘의 다윗 성으로 옮기는 과정에 일어난 불경한 일을 배경으로 합니다.

웃사는 죽었고 다윗은 놀랐으며 오벧오뎀 가문은 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종은 주님주신 감동을 따라 본문에서 세 가지의 중요한 교훈, 곧 바른 위치, 바른 자세, 바른 중심이란 작은 주제 세 개를 취하여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3절을 함께 읽기로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1. 바른 위치입니다.

 

사랑이신 우리 하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샬롬이 뭡니까? 샬롬은 제자리운동이라고 했습니다.

아빠가 아빠위치에, 엄마가 엄마자리에, 집사가 집사 위치에, 권사님은 권사님위치를 잘 지키면 거기가 어디라도 평강입니다. 언약궤는 제사장들의 어깨위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블레셋에서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 암소가 끄는 수레위에 올려놓은 것과 같이 한 것(삼상6)은 옳지 않았습니다.

당시 언약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도,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도, 블레셋을 칠 때(삼상4.5.6)도 하나님의 언약궤는 항상 승리를 선포하며 앞에 섰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궤는 항상 레위인이나 제사장의 어깨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세상과 사람을 다스리시는 절대적인 생명의 법으로 마땅히 인생이 존중하는 최고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마치 궤짝 다루듯이 달구지에 올려놓는 게 아니라 사람 어깨 위에 메어 모셔야 한다는 겁니다.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119:142>” 세상 법은 사람이 연구하여 만들었지만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이 만드셔서 인간에게 내려주신 영원한 의와 진리요, 복의 근원, 절대명령입니다. 때문에 어떠한 인간의 것보다 앞서게 됩니다. 본문 1-5절에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법궤가 나올 때 저들은 나름대로 최선과 성실을 다 했습니다. 3만 명의 출중한 인물들이 동원되었고 새로 만든 새 수레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각종 악기로 찬양을 했습니다. 그러나 웃사가 죽었습니다. 언약궤가 바른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제사장의 어깨 위에 올려있어야 할 궤가 짐승이 모는 수레위에 있었으니 이는 마치 블레셋인들이 하나님의 궤를 짐짝 취급한 것과 꼭 같이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개척동지 여러분. 본문에 나타난 다윗과 웃사와 그 무리들은 말씀의 궤를 수레위에 올려놓는 실수를 했습니다. 주변을 보면 오늘날에도 웃사의 실수는 흔하게 일어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삶의 목적이 되지 못하고 말씀과 신앙을 삶의 한 방편과 수단으로 삼아 교회출석으로 인해 좀 더 유익하고 더 편하고 더 풍족한 삶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어깨 위로 높이 올려 말씀만 바라보며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말씀의 종들이 다 되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15절입니다.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2. 바른 자세입니다.

 

웃사는 급한 상황에서 그만 율법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명령에 의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만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 성물입니다. 그렇습니다. 상황이 말씀을 침범하게 하면 안 됩니다. 즉 어떠한 상황이더라도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말씀이 앞서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이 말씀대신 성도와 교회의 길을 인도하게 됩니다. 성물 중 성물은 뭡니까? 성경과 성경을 따르는 우리의 몸, 육체입니다.

상황따라 적용을 달리하고 상황따라 미뤄질 수 있는 말씀이라면 그 말씀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이 보실 때 진주를 돼지에게 준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상황에 밀려난다는 것은 성도의 삶과 교회의 행보에 있어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다급해도 말씀의 법을 침범하는 웃사같은 사람, 우리 중에 없는 줄 압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 바른 자세란 어떤 자세일까?

 

말씀을 바로 받아 바로 전하고 바로 행하는 자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르치는 자의 고민은 자신이 선포하고 가르친 말씀을 자신이 다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웃사는 고핫자손의 레위인입니다. 20년간이나 법궤를 지켜온 자입니다. 율법에 나름대로 능통합니다. 그럼에도 다급하자 사소한 일에 그만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도의 작은 일을 세상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경을 종종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의 실수를 보면 즉시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매우 부담스런 일입니다.

웃사가 흔들리는 궤를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손을 댄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지만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지극히 사소한 것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지극히 미세한 것도 주님의 명령을 역행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것도 멀리하셔야 할 줄 압니다. 그럼에도 우린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부족과 무능무력의 유일한 대안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정직입니다. 정직하게 시인하고 엎드리는 길 외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바로 받아 바로 전하고 바로 행하고자 할 때 늘 정직한 영으로 엎드리시는 우리 되길 바랍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않고 치우쳐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3. 바른 중심입니다.

 

중심이 바른 자는 깨닫기를 속히 합니다. 웃사가 죽자 다윗은 즉시 자신의 실수를 깨닫습니다. 금방 읽은 9절에는 다윗이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기가 불편하신 것을 다윗은 즉시 알아차립니다. 그리고는 수레에 올려놨던 궤를 사람에게 메어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기게 합니다. 여기서 다윗의 바른 중심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먼저 다윗의,

 

1)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잘 섬기는 것은 알아서 섬기는 겁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동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자입니다. 이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두려워하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몰라 하나님이 두렵지 않으면 하나님 외에 모든 것들, 곧 세상이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꿇지 않은 무릎은 세상과 환경 앞에 셀 수 없는 많은 세월과 사건에 무릎을 꿇고 울부짖게 됩니다.

12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 새

 

2) 즐거워하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간의 모든 두려움과 죄책감이 사라지고 기뻤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풀리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기쁨과 슬픔은 오직 우리생명이신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하여 살아가면 그것은 곧 내가 기쁜 삶을 사는 첫 지름길입니다.

주께서 기뻐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우리도 기쁨으로 감당하는 모두 되시기 축복합니다.

 

13-14절에 보면 풍성한 제사와 함께 다윗은 베 에봇을 입고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힘을 다했다는 것은 정성과 영혼을 다해서 기쁜 춤을 여호와 앞에 추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령한 춤을 추었습니다. 주님 앞에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특별한 계획아래 그리스도의 종이(신부가) 된 우리들, 기뻐 찬양하며 춤을 추는 듯이 사역()의 현장에서, 정녕 있는 힘과 정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끝으로 11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4.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에덴의 기쁨은 무엇이었습니까? , 거기선 제사가 없었지요. 존재자체가 교제였고 기쁨이었습니다. 관계가 깨지면서 생긴 것이 제사였으니 제사의 목적, 즉 예배의 제일목적은 관계회복이 맞습니다. 사랑은 언제 시작됩니까? 진정한 사랑은 존재자체를 기뻐하면서부터입니다. 네가 뭘 해줘서가 아니라 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기쁨이고 더욱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 사랑 아닙니까? 모든 조건을 뒤로한 순수한 사랑. 중심을 보시는 우리 하나님은 정성이 담기지 않은 어떤 외모에도 관심이 없으십니다.

본문에 오벧에돔의 집이 어떤 중심으로 여호와의 궤를 섬겼다고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정황상 웃사의 죽음을 두려운 경고로 받아 극진히 섬겼을 것입니다. 짧은 3개월간 오벧에돔의 집은 온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법궤는 하나님임재의 상징입니다. 오벧에돔이 복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사람이 인정하든 말든, 믿든 못 믿든, 느끼든 못 느끼든 그런 반응과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이십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복은 세상 모든 복과는 비교조차 할 수없는 하늘과 땅의 복입니다. 오벧에돔이 받은 복은 땅의 복을 말하지만 후에 그것은 여호와의 증거가 되어 자손에게 이어져 하나님을 경배하는 시온의 출발이 됐을 것입니다. 겨우 석달 사이에 그 온 집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웃사를 치셨을 때의 진노가 이젠 풀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머물러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에겐 복이 된다는 것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주님 사랑하시는 성도여러분. 성도란 주님의 존재자체가 성도의 기쁨이요, 능력이요, 말할 수없는 영광임을 순간마다 느끼고자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간곡히 전하고 앞서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린 하박국선지자의 고백과 다니엘선지자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즉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을 다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저것 다 사라지고 없어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는 신앙고백은, 드러난 어떤 정황과 결과보다는 하나님의 존재자체에 우리들의 기쁨과 즐거움이 이유를 찾아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왜 기뻐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베푸신 그것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계신 것 그것 때문에, 할렐루야.

왜 인생 살만한 가치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계시니까,

왜 소리쳐 찬송하고 그분을 전파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하나님은 존재자체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존재자체가 선이시고 온전케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자체가 천국의 운행이십니다.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험하고 열악한 사역()의 현장에서 어떠한 정황과 여건이 우릴 누른다 해도 주님의 존재자체를 먼저 깊이 묵상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잘 참아 머지않은 앞날 이생과 내세에 모두 크신 하나님의 복되신 손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영생이요, 천국이요, 사랑이요, 마지막 우리들의 기쁜 노래이십니다. 그분의 존재자체로 그분을 기뻐함으로 남은 삶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