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17.주일예배<룻1:16-17(12-18). 룻의 절개
사사시대, 그러니까 주전 12~300년 전쯤에 베들레헴에 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네 가족이 배고픔을 면하고자 고향땅을 떠납니다. 모압지방은 그나마 가뭄이 덜해 이럭저럭 호구지책을 찾아 헤매는 중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두 아들은 나이 들어 결혼을 하게 됐는데 두 아들마저 세상을 떠납니다. 참으로 기구한 나오미와 두 며느리의 인생입니다. 졸지에 세과부만 남게 되자 비장한 마음으로 나오미는 귀향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두 며느리에게 각각 자신을 떠나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간절하게 권합니다.
두 며느리 중 한사람 오르바는 시모 곁을 떠났지만 한 사람 룻은 떠나질 않겠다고 결연한 말로 나오미의 입을 막습니다. 이 여인 룻을 성경은 왜 소개하고 있을까? 룻은 모압여인입니다. 당시의 신앙관습으로는 이방여인을 사람취급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압여인 룻이 훗날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요, 다윗의 자손 중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십니다. 덧붙인다면 룻의 남편이 된 보아스의 어머니는 여리고성에 살던 가나안의 기생 라합입니다.
이방여인 룻이 역시 이방 가나안의 기생출신인 시어머니 아래서 결국 메시아 족보에 들게 된 것입니다. 룻이 이방여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됐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입니다. 룻이 가난한 젊은 과부의 신분으로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기까지에는 하나님의 어떠한 은혜가 있었는가?
본문 14절입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붙좇았었더라. 붙잡고 따라갔더라. 중차대한 갈림길에서 누구를 붙잡고 따라 가는가 그게 여러분의 인생이 됩니다. 주님 우리에게 손 내미셔서 그 손잡고 저 천국 향해 갑니다.
1. 붙잡고 따라가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두 며느리 중 한 사람 오르바는 작별인사를 했지만 룻은 시모 나오미를 붙잡고 따르기로 했습니다. 인생 살면서 누구의 손을 붙잡고 어딜 따라 가느냐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손을 붙잡고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까? 그마나 주님 손 잡았으니 이제 이후로 우리들은 더 이상 우리자신에 관한 것에 노예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인생 앞으로 누구에 관한 것입니까?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오르바는 시모를 택하지 않고 고향친정으로 갔습니다. 이후로 오르바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그는 하나님과 무관한 이방사람으로 이방신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 성경과 무관한 사람, 하나님의 생명책에 누락된 사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복된 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람, 말씀에 묶이는 사람, 하늘생명책에 그 이름이 있는 사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룻처럼 주님을 확실하게 붙잡고 따르는 은혜가 넘치기 축복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은 이미 저와 여러분을 붙잡고 이끌어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 손을 자꾸 놓치고 또 놓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어린 애기들을 보세요. 왜 자꾸 붙잡은 손을 놓치게 됩니까? 한눈을 파는 겁니다. 내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게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유혹이 안 보이는 주님 손을 놓게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기도는 쓴맛인데 세상은 달콤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룻은 시어머니를 단순하게 붙잡고 따른 것이 아닙니다. 16-17절을 다시 읽기로 합니다. “룻이 가로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2. 절개를 결단하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당시 룻은 매우 젊은 여자입니다. 남편이 죽고 과부된 시어머니를 붙잡았다는 것은 시어머니와의 신의가 돈독함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신의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계획을 봐야 합니다. 룻에게 절개를 주신 것은 저들의 인격보다 앞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룻을 향한 구원의 계획입니다. 룻을 통해 보아스에게 영광을 베푸시고 나오미를 구원하셔서 빈핍한 자의 하나님, 기업 돌려주시는 자의 하나님이 드러났습니다. 여기 룻을 통해 극명히 보여주신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룻에게 먼저 아무도 못 꺾는 절개와 결단을 주셨습니다. 어떤 절개와 어떤 결단입니까?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영원한 내 소속교회 내가 섬겨야 할 몽돌비전교회”
1) 소속에 대한 절개와 결단입니다. 룻의 고백은 자신의 속한 바 유숙할 곳과 백성 곧 나라에 대한 소속감과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신앙의 소속입니다. 내가 어디에 속한 자인가? 내가 누구 편에 서 있는가를 분명히 밝히는 룻, 룻은 먼저 시어머니가 길을 떠나 어디에서 몸을 눕히든 거기 함께 눕겠다고 말합니다. 여인이 어디에 눕느냐는 여자로서의 모든 가치와 품격과 미래를 말합니다. 누운 곳이 어디인가 그것이 그 여인의 인생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누워 쉼을 얻는 소속된 교회, 여러분의 영혼 그 모든 것, 여러분의 믿음과 기도와 충성과 헌신과 미래를 말합니다. 영혼이 쉼을 얻고 말씀으로 힘차게 늘 새로 출발하는 내교회가 당당하게 충성된 여러분을 자랑하게 되기 바랍니다.
룻은 누구보다 어머니 나오미를 잘 압니다. 룻 보기에도 장차 어머니가 누울 곳은 별로 화려하지 않습니다. 가문과 고향을 떠나 남편 아들 모두 죽고 무일푼 과부가 돼 다시 고향을 향하는 시어머니가 누울 곳은 보나마나 누추한 곳입니다. 잘해야 친지들 문간방 신세입니다. 그러나 룻이 지닌 신의와 절개는 환경과 무관한 것입니다. 룻이 바라본 것은 나오미가 당할 환경이 아니라 시어머니의 됨됨이, 즉 나오미 자체였습니다.
사랑하는 동지여러분. 진정한 의리와 절개는 한 사람이 가진 자격증이나 환경이나 재산, 건강 등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리와 절개는 그 사람 자체를 향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보통 우리가 하나님 믿고 섬길 때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그 풍성함 때문에 찬송하기를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의 믿음이 깊고 정직하다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실존자체 때문에 먼저 감동하고 그 분 자체를 기뻐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자체를 앙모하며 감동한다면 저와 여러분을 기뻐하시는 그 분 손안에는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다만 하나 없는 것은 거듭 확인하지만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믿음과 순결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그리하지 아니하실 지라도의 믿음, 하바크가 애끓게 토해내는 텅빈 외양간, 말라비틀어진 포도나무, 태풍에 열매가 다 떨어진 감람나무 앞에서의 신앙고백은 실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도전합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다만 부족은 우리에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의 확고한 신앙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번 살핍니다. 우리에게 환경이 부족합니까? 관계가 원만치 못합니까? 가문과 지식에 자신 없습니까? 과거의 수치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은 부족이기 전에 주님의 구원과 자비가 나타날만한 최적의 조건들인 것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진정 부족한 것은 그러한 외적 조건자격이 아닙니다. 외모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님을 절대신뢰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확실하게 망한 가문에 전혀 가진 게 없는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즉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신뢰했습니다. 신뢰할 뿐 아니라 굳은 절개의 고백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룻이 뭘 보고 뭘 믿고 이런 비현실적인 고백을 담대히 했습니까? 본문 16절 끝부분 제가 읽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리니”어머니의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겁니다. 시모를 신뢰한 룻은 시모의 신앙조차 신뢰했습니다. 즉 두 과부고비, 시어미와 며느리의 텅 빈 가슴, 처절한 심령에 마지막 재산이요, 복의 유일한 통로인 신앙을 하나님이 남겨놓으신 겁니다. 만복의 근원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님. 교창(交唱)합시다. 만복의 근원—예수그리스도, 예수그리스도—만복의 근원. 할렐루야.
자살 왜합니까? 길 없어서 죽는 거지요. 자살 외엔 길이 안 보이는 겁니다. 예수는 우리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와 룻처럼 다 잃어도 길이신 예수님만 붙잡고 황량한 사막, 나그네 길을 믿음으로 자신 있게 새롭게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룻의 절개와 믿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2) 죽기까지 함께 한다는 생명을 건 결단과 그 절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마지막 재산이 뭡니까? 다 빼앗겨도 간직해야 할 것, 생명입니다. 그런데 생명보다 소중한 것을 본문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 절개입니다. 차라리 목숨을 잃을망정 사랑하는 이 외엔 나를 허락하지 못하겠다는 정조입니다. 최고의 신의는 절개를 지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하나님 앞에 믿음의 절개를 지키기 바랍니다. 하나님 외엔 누구에게도 마음 주지 않고 시간주지 않고 물질주지 않겠다는 일사각오의 절개, 우리의 마지막 소유, 생명보다 더한 것은 하나님향한 믿음의 지조요, 절개입니다.
결단을 다른 말로 한다면 “끝내 어떤 일 있어도”라는 것이고 절개는 “죽어도 오직 너뿐, 오직 그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린 절개의 원조 룻을 보고 있습니다. 남편이 죽었어도, 돈 한푼 없어도, 희망이 전혀 없어도 오직 내게 어머니는 당신 한 분뿐 난 당신이 죽는 그 순간 그 현장에 함께 있습니다. 이런 결단과 절개가 하나님 앞에 드려진다면 그 순간부터 그 인생은 그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그 분의 다스림,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롬14: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죽어도 예수, 살아도 예수. 오직예수. 오직성경. 오직 주께만 영광. 우리몽돌교회를 통해 주님께 충성하다가 내 뼈를 여기 묻으리라. 이런 사람 세상이 못 당합니다.
기도합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주님 죽어 피 흘리신 거기 골고다에 나도 죽어 장사되리이다.”주를 앙모하며 전능자의 그늘아래 부르심받아 모인 우리 이제 확실하게 죽은 옛사람을 주님이름으로 선포하나이다. 죽은 옛사람에게 혈기를 부어 다시 고개쳐들고 나와 이웃을 그리고 주님을 아프게 하는 일이 주여! 다시는 없게 도우소서.
룻이 신의와 절개 하나로 비참한 시모를 따랐을 때에 유복하고 괜찮은 사람, 보아스를 만났고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을 낳았던 것처럼 우리도 오직 주님만 붙잡고 허락하신 이 교회, 주님 세우신 이 교회에서 죽도록 충성하며 수많은 영의 자녀를 생산하는 복을 더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받으시고 이루실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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