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19. 주일설교(레20:27.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자녀가 장성하여 짝을 찾을 때 장로가정과 무당집이 있다면 불신자도 무당집은 피합니다. 그래서 무속인들은 자기들끼리 사돈을 맺습니다. 무당하던 엄마는 죽은 후에도 그 이름이 따라다녀 허물이 됩니다. 반면 장로출신이나 목사출신 윗대가 있다면 그건 가문의 영광이고 자랑거리가 됩니다. 여기에 신자 불신자가 따로 없다는 건 사람에게 오욕칠정의 본능이 있듯 영적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에겐 축복권만 있고 저주권이 없지만 무당은 종종 저주권을 사용해 어리석은 영혼들을 벌벌 떨게 합니다. 목사의 저주명령은 마귀에게만 하고 사람에게 안 합니다. 무당도 목사를 저주할 순 있어도 예수님이름을 거들먹거리지 못합니다. 끝장인 걸 마귀가 알기 때문입니다. 반면 목사는 모든 마귀와 귀신을 직접 공격하는 특권이 있습니다. 정말 신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구약의 말씀대로 우리가 무당을 돌로 쳐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은 여전히 신약가운데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돌로 쳐 죽이라는 것은 우리 심령 속, 깊은 영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 안에 교묘하게 숨어 하나님을 방해하고 주변과 자신을 병들게 하고 힘들게 하는 무당 닮은 간교하고 비열한 영의 흔적을 찾아내야 합니다. 찾아내서 쳐 죽여야 합니다. 죽이려면 먼저 찾아내야 합니다. 복음으로 비추어 샅샅이 뒤져보기로 합니다.
갈라내는 빛, 예수의 영, 그 빛이 아니고는 도저히 구별이 되질 않아 사이비 영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기도 열심히 해도 여전히 우리가운데 악한 영, 점치듯 예수 믿는 허약한 영성은 어떻게 형성됩니까? 그 주범은 세상도 아니고 환경도 아닙니다. 겁 많고 나약하고 어리석은 자신이라는 존재입니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살아있는 생명은 모두 어딘가 의지하려는 본성이 강하고 낯설면 즉시 피해 숨는 자기보호본능 때문입니다. 본능을 나무라선 안 됩니다. 그 본능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점보고 굿하는 것도 이런 본능적 자기보호의식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칼에게 죄를 묻지 않고 칼을 잘못 사용한 사람에게 죄를 묻듯이 우리가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에게 물어보고 누구와 통하는가는 매우 중대한 갈림길이 됩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대상10:13-4.) 이렇게 누구에게 묻느냐에 따라 상벌이 갈라집니다.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무당을 다 쫓아냈을 때 받은 칭찬이 다 소용없게 됐습니다.
사울이 무당을 통해 사무엘을 불러올렸는데 문제는 자신이 직접 사무엘을 외쳐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울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쫓아냈던 엔돌의 신접한 여자를 다시 불러들여서 자신의 장래를 묻는 일에 개입시킨 것입니다. 바른 믿음이라면 침묵하는 하나님 앞에서 밤을 새워서라도 울부짖고 하나님의 암묵적 인도를 받아야 했습니다. 죽음 앞에 긴박한 건 얍복강 나루터의 야곱과 다를 게 없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응답하지 않으면 보내드리지 못하겠다.”며 놔주지 않고 씨름한 야곱처럼 사울도 생명을 걸고 매달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 하나님이 침묵하신 적은 한 순간도 없다는 것을 잊지 않는 모두이길 축원합니다.
즉 하나님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침묵하신다면 그 순간 하나님은 그 침묵을 통한 현실과 정황과 환경으로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내 환경은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이며 그 사실 앞에 조건과 관계없이 감사하는 심령으로 겸손하면 그 과정을 통해 하신 주님의 음성은 머지않아 놀라운 열매로 증거 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은 우리 가운데 교묘히 숨어들어 똬리를 틀고 있는 뱀 한 마리, 포도원을 허는 여우 한 마리씩 다 잡게 되길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무슨 여우입니까? 교회를 허물고 가정을 무너뜨리고 자신을 망치는 여우와 뱀은 바로 분별없는 영적욕구입니다. 그 철없는 영적갈급과 욕구로 더 깊은 말씀 더 신령한 말씀을 원하면서 장래 일을 자신과 교회 안에 숨어있는 접신자와 무당을 찾아 헤매는 방황입니다. 여러분의 영혼과 인생 통째로 망치는 말의 사례를 먼저 살핍니다.
1) 어디어디가면 아주 신령한 목사님(교회)이 있다네. 아주 훤히 내다본대요. 딱딱 맞춘대요.
2) 아, 그 사람.. 대단한 은사자라고 소문났어요. 정확하게 맞추니 거기 가서 기도 한번 받아봐.
3) 집사님, 내가 기도해봤더니 주님이 그건 아니라고 하시네.(그게 틀림없다고 하시네.)
4) 하나님이 나보고는 뭐라고 하셨어요?
5) TV로 예배드리는 사람도 있지요. 결국 인터넷 뒤져서 족보없는 설교로 이상한 영을 받게 됩니다.
다음엔 조심해야 할 단체나 교회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1) 자기교회 설교와 외부 행사용이 따로 있다면 거기 다분히 위험합니다. 주일예배설교와 수요일과 금요일과 새벽기도 모두 만천하에 공개돼야 합니다. 인터넷시대에 간단히 공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온라인에서도 내부용 외부용이 따로 있다면 거긴 정직한 교회가 아닙니다.
2) 자기경험 또는 타인의 영적경험 특히 자기의 신비체험을 성경보다 더 굳세게 붙잡고 강조하거나 중요시한다면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의존하지 않고 간증에 의존하는 것 매우 위험합니다. 개인간증 놀라운 게 많지만 이거 자주 말하면 성경을 앞서 가고 그건 망령된 일입니다.
3) 교회는 비록 가난해도 재정구조가 정직하고 규모있게 알뜰해야 합니다. 무리한 계획을 믿음이란 말로 밀어붙이면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개인도 가정도 국가도 한가지입니다.
우리교회에 절개의 신앙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회의 신앙고백은 대개 목회자를 따라갑니다. 진실로 저는 부족함을 복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제가 부족해서 교회의 신앙고백도 부족의 유일한 대안은 정직이라고 했습니다. 말씀도 바로 전하고 바로 받아야 합니다. 자기에게 적당히 맞춰 편집해 들으면 정말 곤란하게 됩니다. 설교제목이 뭡니까? 접신하거나 무당 박수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 말씀하신 하나님의 본심은 오직 사랑입니다. “접신하거나 무당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지고의 사랑, 순백의 사랑이기에 너는 나 외에 결단코 다른 어떤 것도 쳐다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니까 하실 수 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에 절대 순종해야 몸을 입고 사는 동안 주의 선하신 뜻을 이루고 그 분의 통치아래 평강과 번성과 나눔으로 증거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린 주변에서 안타까운 이들을 자주 만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택을 입고 구원받아 영생까지 기약받은 자가 더 확실하고 더 깊고 더 진하게 받고자 뭔가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다 결국 접신자가 하는 사이비예수의 이름아래 묶여서 비참하게 세월을 탕진하는 일을 종종 보게 됩니다. 신비현상 얼마든지 있는 일입니다. 믿음생활에 활력소이지만 거기 매달리면 결국 그거 타고 들어오는 마귀에게 당합니다. 신비있는 곳에 귀신이 들끓습니다. 신비밝히면 결국 마귀가 장난해도 하나님인 줄 압니다. 우리고신교단, 신비현상 인정하지만 신비주의는 단호히 배격합니다.
최고최상의 신비, 예수그리스도. 명품신비, 성경. 더 이상의 신비는 없다. 물러가라.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한 즉 사망을 낳으니라. -약1:15.
주님사랑하시는 여러분. 내시처럼 고개 기울여 들으셔요. 문제는 뭡니까?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사이비, 애매모호한 사이비와 이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음식도 완전히 맛이 가면 냄새가 진동하고 역겨워 먹지 않아 사고가 안 납니다. 잘 모를 정도로 아주 살짝 맛이 가면 이게 사람 죽입니다. 측만증은 몸이 살짝 기운 뒤 점점 기울어가는 병인데 이유도 모를 각종 질병이 시작돼 치료받지 않으면 보통 50대에 죽습니다. 여러분, 영의 세계는 선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결국 마귀의 밥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즉 영적인 경계선에 이도저도 아닌 비무장지대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믿고 마귀의 말도 따르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택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마귀의 소원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교회와 교회를 멀어지게 하고 힘들게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오직 당신 한 분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거듭 선언하지만 춘향이가 우리민족 뭇 남성들의 연인이 된 것은 얼굴이 아니라 절개입니다. 춘향이 얼굴은 모두의 마음에 “절개의 여인, 열녀”라고 영원히 새겨져 있습니다. 복습입니다. 쌍꺼풀이 아니라 눈빛이요, 얼굴이 아니라 표정이며, 비싼 침대가 아니라 단잠입니다.) 방언투시예언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적 hungry정신의 절실한 중심입니다. 주신 신비은사는 교회의 덕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방언의 에티켓과 투시은사의 바른 사용법도 알아야 합니다. 품위의 주님찬양!!!
여러분, 하나님 앞에 부족한 우리가 뭐 하난들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 교회 앞에 우리의 헌신과 충성이 어찌 만점이 되겠습니까? 절개입니다. 하나님 아니면 내가 차라리 죽겠다는 에스더의 절개, 소속된 교회 섬김의 정신이, 죽기까지 함께 하겠다는 절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아니라 백번이고 고쳐서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헌신하겠다는 절개, 언젠간 저도 여러분도 떠나가지만 교회는 주님이 그 절개 붙잡고 변함없이 세상 끝 날까지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설교로, 성경으로, 환경과 육체로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접신한 자를 찾으며 무당이 다 된 사람을 찾아 신령한 것만 바라는 어리석음이 결국 마귀를 불러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8:7)”하나님이 알지 못하게 닫아놓은 미래를 사람이 열어 알겠다는 것이 화근인 줄 믿으시면 아멘입니다.
기도합니다. 자비하신 주님, 모두 건강한 믿음이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욕심이 가로막아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우리가운데 없게 하옵소서. 신비한 것 가운데 마귀가 들끓음을 알았사오니 오직 말씀가운데 임하시는 주여! 한 주간을 설교말씀 붙잡고 살아도 다 행하지 못하면서 신비하고 놀라운 것 앙모하는 어리석음을 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뜻만이 우리 교회에 넘치게 하셔서 속한 모든 권속들 힘차고 밝은 증거자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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