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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6.06.05. 주일예배설교<사66:1-4.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방문>

by 설렘심목 2016. 6. 5.

2016.06.05. 주일예배설교<66:1-4.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방문>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그 관리자로 세우신 하나님은 무엇보다 그토록 사랑하시는 인간과의 관계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게도 중요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그만 에덴의 범죄로 인해 정상궤도를 벗어나 죽은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끊어지고 막힌 관계를 다시 화목한 관계로 회복하는 길은 죄를 용서받는 제사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제사 곧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사가 됐습니다. 한 민족이나 가정이나 개인의 영적인 건강상태를 점검하려면 예배가 어떠한가를 보면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예배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과연 하나님이 예배에서 진정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지 예배자의 면모를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예배를 새롭게 하시길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인지를 먼저 간략하게 알아봅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1. 예배의 본질은 장소와 무관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뭐라고 하십니까? 하늘이 내 보좌요, 땅이 내 발등상인데 내가 지은 만물 중에 내가 거할 처소가 어디냐고 하십니다. 칼집은 칼보다 커야 합니다. 즉 피조물 중엔 하나님을 담을만한 그릇, 하나님을 모실만한 마땅한 집이 없다는 겁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늘 내가 누구이기에 어찌 능히 그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대하2:6, 솔로몬의 고백입니다.

4장에서 예배의 장소에 대해 묻는 사마리아여인에게 주님이 말씀합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장소와 무관한 예배의 본질을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이 장소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예배역시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수십억짜리 고급인테리어 건축물에서 휘황찬란한 조명과 고급 파이프올갠의 장엄한 소리에 마음이 녹아드는 것이 성령의 감동일까? 예배에 도움은 줄 수 있지만 진정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의 가슴으로부터 시작하는 구원의 감동이 천국의 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절 말씀입니다.

본문 2절에서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심령은 가난한 심령이라고 밝힙니다. 2절 뒷부분입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권고(眷顧:visitation-방문,문병)란 하나님이 찾아주신다는 어원적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방문은 하나님의 온전하게 하심과 채우심이 이뤄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에게?

 

2. 마음이 가난한 심령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5:3절에도 심령이 가난하면 천국을 소유한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심령이란 절박한 심령입니다. 육체는 밥을 먹어야 살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공급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진리를 간절히 구하는 심령이 자신 안에 있는 악과 싸우며 말씀의 도우심과 능력주심을 간절히 바라는 상태가 가난한 심령입니다. 즉 자신 안에는 악을 이길 힘도 없고 진리만이 능력인 줄 알며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원하는 심령, 그가 천국을 소유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피 튀기는 영적전투가 일어날 때 진리 없인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사람은 영적으로 늘 굶주림을 느끼며 진리를 원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진리를 향해 굶주린 듯 가난한 심령으로 간절히 말씀을 사모하는 천국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본문이 전하는 하나님의 방문 두 번째는..

 

3. 통회하는 심령을 찾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마5:4절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돌이키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거듭합니다. “죄를 지어서 망하는 게 아니라 회개하지 못해서 망한다.”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던 탕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찾아주셔서 회개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2:21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지혜자나 야만인이나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다 구원(1:14)을 받습니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십자가에 매달린 악당 한 사람은 이 한마디 회개로 구원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 법에서도 죄를 지으면 그 죄질과 죄목에 따라서 다른 형벌을 받습니다. 가벼운 것은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몸을 가둬서 외부세계와 격리하여 모든 자유를 박탈합니다. 그리고 형기가 긴 사람들은 돈을 주며 일을 시킵니다. 탈옥을 막으려고 머리를 삭발합니다. 때로는 옆으로 누워 칼잠을 자고 어떤 땐 앉아서 자야할 경우도 있습니다. 화장실은 따로 없고 큰 통을 구석에 덮어놓아 늘 악취가 풍깁니다. 요즘은 인권시대라 선진국에선 실직자나 노숙자가 일부러 물건을 훔쳐서 형무소에 들어가 푹 쉬었다가 나올 정도로 환경이 좋다고 합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형무소의 고통은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허용된 운동시간 외에 하루 종일 꽉 막힌 작은 방에 앉아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죄를 지으면 대가를 치르면서 가만히 앉아 주는 밥을 먹으면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는 시간 외에 대부분의 자유와 활동이 차단됩니다.

우리가 에덴에서 죄를 지은 죄인의 후예로 태어나 받는 벌은 세상의 형벌과 다릅니다. 세상의 죄로는 세상과 차단당하지만 에덴의 범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차단됐습니다. 그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이 다시 이어주시고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젠 그 골고다의 십자가사건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죄값을 대신 갚으신 것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 구원의 기쁨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요, 가장 복된 소식입니다. 죄로 죽어야 할 죄인이 죄를 깨끗하게 감면받았습니다. 죄만 면제받은 게 아니라 죄를 대신 갚아주신 분께서 시계와 태양과 눈물과 수치와 아픔이 없는 당신의 나라에 초청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젠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할 아무 존재도 없습니다. 사단은 종종 죽음이라는 마지막 카드로 우리를 협박합니다. 그러나 두려워 마세요. 죽음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의 보호자시고 방패가 되십니다. 뭣보다 죽음은 우리들의 새 출발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신 우리 하나님은 이미 아파하는 우리의 회개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린 세상법정의 판결처럼 머리를 삭발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루종일 벽만 바라보고 있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저기 가고 싶은 곳도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아파하며 마음을 돌이키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본문은 통회하는 심령을 기뻐하시며 찾아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죄로 어디에 갇혀 하루종일 앉아 있거나 벌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보다 더 큰 고통과 죽음으로 모든 우리들의 죄를 대신 갚으신 주님 때문입니다. 다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죄와 그리고 더 하나님가까이 가지 못하는 게으른 자신을 마음속 깊이 진실로 뉘우치며 아파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성숙을 꾀하는 자, 끊임없이 고뇌(苦惱)한다는 한마디는 어린 시절 한 청년의 인생을 바꿔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 우릴 환영하시니 우리 인생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통회하는 심령을 찾아 주신다는 오늘 말씀 받은 저와 여러분 안에 통회 자복하는 아름다운 일이 복의 시작입니다. “이대로는 결코 안 된다.”는 절박한 돌이킴과 거룩한 결단을 축복합니다.

 

4. 말씀 앞에 떠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말을 인하여 떠는 자를 찾아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경외심이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두려운 마음으로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왜 말씀을 받을 때 떨립니까? 말씀의 엄위하신 능력과 권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뤄지는 힘이 뒤따릅니다. 믿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기 바랍니다. 위엄과 존귀와 영광의 하나님말씀을 감히 내가 받다니 이 얼마나 큰 기쁨이요, 영광인가? 말씀 앞에 감격과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떨리는 마음이 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덤덤해 떨리지 않으면 세상 앞에서 떨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복종하면 세상이 내게 복종하는 걸 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떠는 마음으로 서 있으면 세상이 우리 앞에 와서 두려워 떠는 것 경험합니다. 4절입니다.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않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5. 불순종과 악의 대가는 유혹과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통회하지 않고 가증한 제사를 드리고 형식적인 분향을 했습니다. 경고하시는 음성을 안 듣고 경외함도 없고 경건도 없이 진실치 못한 형식적인 제사에 하나님은 그 대가로 유혹과 두려움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유혹과 두려움이란 불분명한 판단의 결과로 찾아오는 불행을 말합니다. 잠언10:28에서도 악인에게는 그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뤄진다.”고 지적합니다. 유혹은 절실한 것으로 찾아와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결국 그것은 죄악을 저지르게 해 무서운 결과를 불러옵니다. 불순종과 악의 대가로 유혹과 두려움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진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깨닫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거듭 전하지만 하나님에겐 문제가 없습니다. 끝없는 사랑과 자비뿐이십니다. 하나님의 전체, 곧 하나님의 생각과 행동에는 오직 사랑 뿐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이 고달프고 외롭고 서러운 것은 인간의 악과 게으름과 교만으로부터 시작된 죄의 문제입니다. 아멘입니다. 본문에서 경고하는 불순종의 대가, 유혹의 정체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우린 잘 알고 있지만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끝내 실패를 향해 두려움의 계곡에 떨어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란 것이 애초에 찾아들지 않도록 하는 게 지혜입니다. 일단 유혹이 파고들면 이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후2:11-12절에는 불법의 무리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미 심판하기로 된 자는 하나님께서 미혹의 사건을 그들 가운데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 거짓 것을 믿게 하여 진리를 외면하고 심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밧세바가 샤워하는 모습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삼손도 데릴라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해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솔로몬은 이웃열방이 보여주는 아낌없는 찬사와 존경과 영광을 이기지 못해서 많은 정략결혼으로 결국 나라가 갈라지는 실수를 합니다. 그는 지혜의 총서인 잠언과 전도서를 기록한 세계적인 지혜자였지만 부귀영광 앞에 자신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 유혹과 마주치기 보다는 아예 피해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본문은 하나님 앞에 성실하지 못한 제사와 제물을 드림으로 유혹과 두려움을 대신 주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들으면 유혹과 두려움을 피하는 길은 바른 예배와 순결함으로 주 앞에 살아가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바른 예배와 순결함은 많은 부분에서 욕심을 버리게 합니다. 1:15절에서 밝힌 바, 욕심이 죄를 낳고 죄는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력으로는 욕심을 버릴 수도 없고 그 욕심을 따라 일어나는 유혹을 물리치기도 쉽지 않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 답은 바른 예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교훈삼아 어떠한 경우에도 예배에 실패하지 않기 원합니다. 이스라엘은 가증스런 형식적 예배로 하나님을 우롱했습니다. 그 결과 유혹과 두려움을 받아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받은 우리는 이제 답을 얻었으니 그릇된 예배의 모든 양태를 다 버리고 올바른 예배자로 세워진 줄 믿습니다. 예배에 두려운 마음으로 임하십시오. 유혹과 두려움을 당하지 않고 평화스럽고 풍성하고 악한 유혹이 가까이 하지 못하는 순결하고 복된 삶을 살 것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과 특별히 자녀들 위에 그리고 생업의 현장가운데 예배를 통한 주님의 보호하심이 늘 끊임없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