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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5.11.29..주일설교<요4:20~24.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by 설렘심목 2015. 11. 30.

2015.11.29..주일설교<4:20~24.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군인에게 건강 다음으로 중요한 건 무기입니다. 그리고 무기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는데 그건 보이지 않는 두 가지입니다.

무기를 다루는 방법숙지와 명령에 순종하는 애국심과 필승의 투지입니다. 앞의 둘 곧 건강한 몸과 무기는 보이는 것이고 후자의 충성심과 무기사용법은 안 보이는 무기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전투력이 보이는 전투력을 주장합니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제 일의 예물은 예배하는 당사자 자신이라는 사실 당연히 아멘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귀한 예물,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예물로서의 자신을 이 시간 함께 살피며 경건을 새롭게 하는 말씀이길 바랍니다.

 

16:16b~17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다시 마621절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아멘. 왜 예물을 몸과 함께 바쳐야 하는지를 한마디로 정리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원하시는 주님이 몸과 예물을 원하시는 겁니다.

 

천하보다 귀한 여러분, 한 영혼, 한 예물, 한 인격과 신앙을 말할 때 뚜렷하고 단순하게 한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입니다.

보이진 않지만 삶으로 드러나는 속사람, 속마음입니다.

자신의 생각은 자신의 인격을 따라 삶의 줄기를 찾아갑니다.

여러 감정을 통제하고 처리, 조절하면서 말과 표정과 행동으로 결국 자신을 나타냅니다. 이 자기라는 존재를 최고의 예물로 바쳐 주님의 보혈이 관통하는 성경적인 참 인격, 예수사람으로 한발 한발 다가서려는 몸부림이 우리 예배 중 최상의 신앙고백인 줄 압니다.

 

예배는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인가에 묶이고 붙잡혀 노예가 됐던 자신을 복음에 붙들어 매는, 묶인 소속의 이전작업이기도 합니다. 430년간이나 애굽의 노예로 살아 노예라는 비참한 신분이 마치 본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체질화 돼 무감각해진 이스라엘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몸으로 깨닫는 중차대한 사건이 출애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의 테마는 어디로부터의 자유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였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 시간 세상 사람들은 즐겁고 재미나고 짜릿한 관능을 즐기며 삶을 마음껏 만끽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모든 즐거움 다 뒤로 하고 오직 하나님께 집중해서 자신을 바치는 일에 몰두합니다. 제사에서 드리는 희생이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화목하게 하듯이 예배로 우리는 우리 몸을 드려서 하나님과 화목합니다. 세상에서 즐기는 모든 것들을 제단에 희생으로 바쳐 성령의 불로 태워 미련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 즐거움을 희생으로 태워 바치는 거기 영생이라는 놀라운 약속의 상급이 믿음으로 확정되는 이 영적기쁨은 세상이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간혹 신앙생활이 답답하게 느껴지고 억울합니까? 죽은 줄 알았던 옛사람이 정신 차리고 고개를 드는 겁니다. 허망한 지옥을 향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과거지향적 믿음은 설죽은 옛 자아의 모습입니다.

 

20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율법시대에는 보이는 것에 무게를 둔 의례중심적 제사였다면 믿음으로 열리는 은혜의 구원시대는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예배의 무게가 옮겨왔습니다. 그만큼 단순해지면서 내면화한 예배는 어쩌면 구약의 제사보다 더 깊은 자기고뇌와 자아죽음의 어려움이 따른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던 때보다 알아서 해야 하는 자율적 믿음이야말로 차원높은 자기훈련과 스스로 찾아 해결해야 하는 많은 내면적 부담이 더한 믿음입니다. 즉 진리로 자유하려면 진리의 사람다운 격조높은 책임감과 성실이 따라야 하는데 이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는 도저히 헤쳐 가기가 어려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0절에서 지적되듯이 내면화된 깊은 영의 예배자는 눈에 뵈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대신 직접 예물이 돼 하나님을 뵈는 놀라운 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이는 모리아 산보다 더 높은 헌신과 시내산보다 더 절실한 언약, 그리고 그리심산보다 더 기쁘고 떨리는 선포로 다가온 골고다 언덕의 희생과 그 보혈로 가능해진 지성소의 만남인 것입니다. 골고다는 이제 우리의 심령 가슴 깊은 곳으로 옮겨져 예수님이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릴 때 활짝 열어 맞아 드리는 자마다 지성소가 되는 영광을 허락하셨습니다. 골고다에서 휘장을 찢으신 후 이제는 누구나 주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성전이 되고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으로 왕 중 왕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창조주 하나님 앞에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나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인생에서 이와 같은 영광과 이와 같은 경사와 한 평생을 근본부터 바꾸는 큰 사건은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수믿는 일보다 더 귀하고 절박하며 중차대한 어떤 일도 우리에게 없는 줄 믿습니다. 생명보다 귀한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22절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우리 조상들처럼 아덴 사람들도 종교성이 짙어서 어디든 빌고 절을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행17:23절에서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하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영으로 깨어있지 않은 자들이 어딘가 빌고 싶은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으니 예수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당시 본문의 현장 아덴 거리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 종교를 전했지만 진정한 구원은 유대나라 나사렛마을로 오신 예수님 외에 없다는 것을 역시 알지 못했습니다.

 

11:25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고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다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행4:12절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인 것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유대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에 절하고 빌었지만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걸 알게 하셔서 바로 알고 바로 믿어 바로 살다가 천국가게 하시니 구원이 단군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대나라 나사렛사람 예수로부터 온 것을 우리가 믿어 감사하고 놀라울 뿐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공자맹자부처도 탈레스도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진시황제도 클레오파트라도 모르고 죽은 영생의 구원이 아무 공로없는 죄인들 저와 여러분에게 온 것입니다. 주님을 끝없이 찬미합니다. 아멘.

 

23절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짐승을 잡아 그 피로 드리던 제사는 이제 예수님의 거룩한 희생보혈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는 기쁨과 은혜의 예배로 바뀌었습니다.

 

제사가 사라지고 예배가 시작되기 직전 그 사이에 예수님이 자신을 통해 이뤄질 예배에 대해 지금 말씀하십니다. 참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눈앞에 왔다는 겁니다. 성령의 충만으로 감화를 받아 오직 예수의 말씀인 복음을 듣고 그 앞에 순종을 결단하며 찬송으로 드리는 참 예배를 오늘 우리가 드리니 인생 살면서 최고의 복을 받은 줄 믿습니다.

 

본문 끝에 보면 아버지께서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는 예배자입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11:6절에서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데 이유는 너무 기쁘셔서 상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는 지금 상 받을 일을 하고 있고 또 상을 받는 중인 것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 하셨듯이 당신을 바라고 찾는 이에게 예배라는 놀라운 상급을 주시고 예배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상과 약속이라는 상 두개를 주십니다. 그 약속 안에는 천국 갈 보장과 영생이라는 구원이 가득한 줄 이제 우리가 확신합니다. 이 확신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난 확정된 사실이고 아주 구체적이며 불변, 영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예배를 원하시는가? 24절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4절 말씀,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간략하게 알고 있듯이 영은 성령, 진리는 복음이신 예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이 찾는 예배, 먼저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영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그러면 어떤 예배입니까? 육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즉 사람의 생각이나 의지만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우리가 교회 온 것, 그리고 예배하는 것 알고 보면 주의 영이 인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아멘입니다. 그런데 간혹 사람의 생각과 의지로만 하는 예배가 있습니다. 거의 자기중심적이며 의도적인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자의 마음에는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대신 자기가 돼 있습니다. 자기 몸, 자기 사업, 자기 가문, 가족과 남은 생애의 안전과 풍요를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육신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아래 놓이면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과 간절함을 아시니 약속의 실현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일입니다. 우린 다만 그분을 든든히 믿고 기다리면서 그분을 높여 찬양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깊은 데서 올리는 찬미의 예배는 자신을 내려놓고 텅빈 마음으로 오직 주님음성에만 귀를 기울이고 주님만 기대합니다.

그렇게 들려오는 말씀에 집중해서 순종할 결단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건 기도하는 마음으로 듣고 받아들여 생각하는 겁니다.

 

다음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무엇입니까? 진리아닌 것을 다 배격하려는 예배입니다. 정통교단에서는 드물지만 이상한 설교가 충분히 가능한 게 예배입니다. 성경을 붙잡기는 했는데 계속 곁길로 가서 세상이야기와 풍조로 가득하고 결론은 기복을 하나님보다 앞서 내세웁니다. 우리가 예수 잘 믿으면 차츰 복받을 만한 사람으로 바뀌는 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복은 하나님 손에 우리가 확실하게 붙잡히는 바로 그것이 복이지 복 받는 일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돼서는 안 됩니다. 이게 성경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선포되는 설교의 내용이 성경과 무관하다면 그 교회는 불행한 교회이고 하나님을 대형보험사 주주정도로 보는 기복주의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영과 진리로 올려드리는 예배는 자신이 먼저 성령께 잡혔다는 것을 인정하고 온전히 주님께 집중하면서 복음이 평생 나를 주장하기를 간절히 구하는 이가 드릴 수 있는 예배입니다. 우리교회 오래 전부터 선포된 표어, 예배승리로 인생승리하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