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8.주일예배<민20:2-9. 사막의 생수는 명령으로>
백성들은 조금만 불편해도 아우성입니다. 심지어 돌을 쥐고 모세지도부를 해치려고까지 살벌합니다. 오늘 짧은 본문은 사막에서 물이 모자라자 흥분한 군중들이 모세에게 심한 불평을 하는 장면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허락해 모세가 물을 내는 데까지입니다. 먼저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이 물없는 사막 한가운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 부족으로 인해 생존의 위기를 만나 흥분한 군중입니다. 그리고 꽉 막힌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두를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등장과 모세의 혈기입니다.
5절을 함께 읽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1. 메마른 나그네길입니다.
함께 읽은 본문처럼 세상이라는 사막은 나쁘고 힘들고 악한 곳입니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이 나쁜 곳으로 우릴 인도했냐?”며 불평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생길 험한 길 나그네 길은 악하고 모든 조건이 나쁜 사막길입니다. 그래서 사막은 인간에게 삭막한 곳의 대명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 파종할 곳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씨를 뿌려야 미래가 있습니다. 곡식이건 사람이건 기술이나 재물이나 관계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씨는 미래입니다. 파종은 미래를 심는 것이고 그래서 곡식의 파종은 1년의 희망입니다. 성도는 복음이라는 생명의 씨를 뿌리는 이들입니다.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고 도우며 사랑을 행하면 이웃에게 사랑이라는 씨를 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얻은 이웃에게는 복음이란 씨가 심겨집니다. 장래에 하나님의 나라들이 세상을 밝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미래는 그렇게 어떤 씨를 심어 가느냐에 따라 다른 삶이 열리고 그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겁니다. 한편 믿음이 신앙인격이 부족해서 심는 미움과 원망의 씨는 관계파괴와 서러움과 분노를 낳아 자신과 이웃의 삶을 피폐한 사막으로 만들어 갑니다.
사막은 물이 없어 씨를 뿌려도 나질 않습니다. 어찌보면 인생은 사막을 가는 나그네처럼 씨 뿌릴 마땅한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방랑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막과도 같은 인생길에 단 하나, 생명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 곧 복음입니다. 요4:13-14절을 함께 찾아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2)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예수님의 말씀이고 말씀은 예수님 살아계신 실존의 증거이자 실존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말씀이 닿는 곳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말씀에 부딪치는 자마다 깨어져 가루가 돼 그 피로 새로 빚어질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인생을 온전히 거듭나게 하는 신령한 떡입니다. 그 피가 예배하는 모두의 심령 밭에 진하게 적셔지기를 축복합니다.
2. 사막에 샘을 내는 하나님이십니다.
메마른 사막을 가는 인생길, 소망은 단 하나 그리스도십니다. 모래바람 몰아치는 황량한 세상길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죄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단 한분이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인생을 죽음에서 구할 자가 없습니다. 본문 7-8절을 함께 읽습니다.“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라.”
단단한 바위에 명령하여 물을 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 없는 돌같이 굳은 심령들이 많습니다. 돌밭같은 심령에는 어떤 설명도, 설득도, 진리도 생명의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죽은 돌이기 때문입니다. 가루가 될 때까지 부서져서 생명의 물을 품을만한 흙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부서진 흙과 썩은 퇴비가 품습니다. 돌같이 딱딱하게 굳은 심령은 생명과 무관한 것에 비견되는 흙과 썩은 퇴비입니다. 바위가 얼마나 많이 부서져야 흙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아무리 고통의 세월이 흘러도 예수보혈이 스미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 아시면 아멘하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고통과 세월이 녹아든 흙과 퇴비에 예수의 붉은 핏줄기, 오직 성령의 단비가 내려야 돌밭심령이 녹고 썩었던 퇴비에 생명이 움을 트고 싹이 올라와 줄기와 잎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셔서 굳은 바위를 열어 물이 솟게 하심으로 갈증으로 불평하는 백성들을 만족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 바위처럼 굳은 심령도 얼마든지 열고 하나님말씀에 목말라하는 구도자요, 전도자가 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목마름만 면하기에 바빴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히4:12) 했습니다.
3. 사막과도 같은 인생길에 복음된 생수만이 답입니다.
본문 8절 둘 째 줄부터 읽습니다.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지금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반석에게 명령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모세는 분노가 극에 달해 치명적인 실수로 결국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지만 오늘 우리는 바른 말씀을 교훈으로 받아 바로 지킬 터이니 그 약속 우리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
중요한 말씀, 먼저 바위에게 명령하라는 것입니다. 명령은 결코 타협이나 권고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복음 앞에 돌 같은 자신의 심령과 삶에 우리도 모세처럼 분노하게 되지만 말씀은 모세처럼 때리지 말고 명령하라고 합니다. 물이 솟아오르기 전에 먼저 혈기가 치솟아 반석을 무자비하게 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명령한다고 자신이나 전도대상자가 과연 변합니까? 쉽지 않습니다.
바울사도 말년 이태동안에는 대단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자 유대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도 예수이름으로 악귀를 나무라는데 악귀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들은 누구냐?”하면서 올라타 두들겨 패니 상처투성이로 벌거벗은 채 도망칩니다.
바위에게 명령해서 모세처럼 생수가 솟아오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마귀가 “넌 누군데”하면 참 곤란하게 됩니다.
한번은 중요한 기도모임에서 귀신들린 이가 요망한 말로 모임을 제압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귀신잡는 은사자가 대적기도를 하고 순식간에 기도모임이 영적전투장이 됐습니다. 한쪽에서는 “나는 여호와니라. 너희들 지난주에”하면서 여러 가지 주관적인 책망을 하고 한쪽에선 방언과 대적기도를 합니다. 9명 모두 전력기도에 땀을 흘리는데 그래도 소위 영으로 힘 좀 쓴다며 교회에서 한 가닥 들 한다는 사람들입니다. 소란스런 기도가 한참인데 팀장이 “자, 자.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저를 지목하면서 “아무개 순장님 마무리기도로 정리하세요.”합니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넌 누군데” 귀신이 대들지 않을까? 주의 영은 그 잡신을 따끔하게 야단치고 여집사를 위로했습니다. 다시는 그 여집사 부부를 교회에서 못 봤습니다.
두 번째 모세의 혈기입니다. 모세가 왜 야단맞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까? 자기의 감정과 분노로 바위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형편없는 백성들 하는 짓을 보면 어찌 울화가 치밀지 않겠습니까? 지금껏 힘을 다해 구해줬는데 조금만 불편하면 돌을 들고 대드니 세상에 이런 악종들이 어디 있나? 충분히 헤아려지는 모세의 분노입니다. 그러나 순종을 그르칠만한 분노는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올라오는 혈기 죽을힘 다해 누르고 하나님 시키는 대로만 했으면 모세는 죽지 않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죽을 때 그 눈이 흐리지 않았다는 성경의 지적은 아직 건강했고 죽을 정도로 늙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바위같이 단단히 굳어버린 심령을 대할 때 하나님의 권세와 크신 이름으로 명령만 조용히 하면 됩니다. 명령의 권위가 명령권자의 권세와 명예에 있는 것이지 고함친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권세가 이미 말씀으로 임한 줄 믿습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악한 것이 예수이름으로 간단하게 물러가는 것 믿고 힘있게 그 이름과 권세로 명령하면 됩니다. “내가 나사렛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 옛사람. 죽은 꺼풀, 보기흉한 꺼풀, 너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말지어다.” “시기와 질투와 분노혈기와 원망과 열등감 온갖 더러움은 사라질지어다. 예수보혈로 다시 태어난, 예수생명이 담긴 거룩한 그릇, 새 하늘 새 땅 너는 영원할 지어다.”아멘. 기도합니다.
살아계신 주님, 활동하시는 말씀 우리의 생명 우리의 기쁨 되시는 주님. 주님말씀만이 우리의 답이고 힘인 줄 우리가 믿사오니 주여! 말씀 앞에 순전한 심령 돼 부끄러운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옵소서. 오직 우리를 구하신 주님만이 나타나 나남 없이 감동하며 주 뜻을 높여 순종하고 준행하기 원합니다. 혈기와 분냄과 좌절과 울적함이 떠나가게 하옵소서. 나사렛예수의 이름만이 권능인 줄 알았사오니 그 이름의 권세를 붙잡을 때 깊은 영의 간곡한 믿음이 주의 기쁨과 권능 되게 하오시며 명쾌하고 힘차고 기쁜 노래가 멈추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하실 주님을 찬미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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