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15. 주일예배<창5:21-24.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5장 전체가 아담자손의 계보인데 “낳고 낳았으며 죽었더라.”의 반복으로 한절 한절이 이뤄져 있습니다. 낳았다는 말은 28번이 나오고 죽었더라는 8번이 나옵니다. 낳고 살았으며 죽어간 것입니다. 태어나 생명을 얻은 자는 반드시 죽었다는 것이며 이는 죄를 지은 후에 인생이 가야할 종착역이 죽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5장의 인물들이 평균수명 912세였지만 인생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또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인생에서 영원한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깜빡 잠들어 꿈에 보는 허무한 환상이요, 잠시 보였다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낳고 죽고를 계속하는 열개의 계보가운데 특별한 한 사람이 보입니다. 21절에서 24절까지 소개하는 제 7대 에녹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셔서 세상에 있지 않았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하나님과 동행의 삶을 산 에녹을 히브리서기자는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함께 살펴볼까 합니다. 히11:5절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증거를 받았느니라.” 동행하는 임마누엘의 삶 그 첫째는,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동행이란 함께 한다는 것이고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는 그것은 일상의 삶을 통해 그 분의 뜻을 가장 먼저 그리고 소중하게 받들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에녹은 결코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손님은 잠시 왔다가 떠납니다. 그래서 내밀하고 깊은 말을 주고받거나 속속들이 아픔과 부끄러움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보기 좋은 모습만 남기려고 서로 노력합니다. 잠시 만난 순간이 다시 만날 때까지의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행은 볼 것, 못 볼 것 다 봐야 합니다. 다 알아야 합니다. 동행은 잠시 왔다가 떠나는 손님처럼 위장하거나 체면을 차릴 수 없는 일입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면 이는 지극히 일상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살펴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히11:6절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특별한 것으로 올려드리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으로 살아계셔서 당신을 애써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확고히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믿음에 우리는 번번히 실패한다는 것이 얼마나 속상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왜 실패합니까? 꾸준하지 못한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선하고 바른 일에 꾸준하다는 것은 실로 위대한 것입니다. 꾸준하게 하나님을 믿어 성실하게 섬긴다는 것은 전폭적 헌신이 없이는 아무나 쉽게 이룰 수 없는 거룩함입니다. 헌신은 몸을 드린다는 말인데 온 삶을 드리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녹의 삶을 전혀 설명하지 않는 성경의 말씀은 그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한 가운데서 늘 하나님과 교제를 하며 살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은 평상의 삶이 골고루 하나님과의 동행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에녹처럼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1) 생각의 바탕이 하나님우선이어야 합니다. 생각의 시작과 끝이 늘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생각이 하나님으로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생각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맨 먼저에 모시는 것입니다. 이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이럴 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리고 그 현장에서 즉시 여쭙는 겁니다. “아버지, 듣고 계시죠? 보고 계신 줄 제가 아옵나이다. 말씀하옵소서. 귀에 안 들려도 마음으로 주장하실 줄 믿나이다. 아멘.”
2) 행동의 기준이 하나님 앞이어야 합니다. coram deo! 神前思想은 성도에게 큰 경건의 능력이 됩니다. 시편기자의 고백을 들어봅니다. 139:7-10절입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장소불문 어디든지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을 피할 그 어느 곳도 세상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복된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죽음과 무관한 신앙고백적 삶입니다.
예배자 여러분. 한 영혼의 믿음이 어디까지 영글어가고 있는가를 알려면 언젠간 닥칠 죽음이란 단어 앞에 그 사람의 감회와 반응을 보면 됩니다. 깊은 믿음, 세속으로부터 자유로운 믿음 곧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친교의 영성에게 죽음이란 사실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육신의 죽음이 동행의 믿음 앞에 두려움은 물론 아닙니다. 기대하는 이에게 그만큼 특별한 의미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죽음이라 해도 그 죽음이 천국을 향한 설레는 소망과 기쁨을 해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을 하나님이 귀히 여기신다고 했는데 이는 살아 수고할 때 믿음으로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그 신앙의 절개가 결국 영생의 길에 주의 영광으로 영원히 아름답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전혀 변함없는 신앙고백적인 삶, 그것은 동행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의로움이요, 거룩함입니다. 이 의롭고 거룩한 경건의 기쁨과 행복감, 그리고 높은 자존감이 가득한 모두가 되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시대를 읽는 예지의 믿음입니다.
에녹은 흘러가는 세월 그렇고 그런 일상 속에서 시대를 읽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얼마 전 태풍지진과 함께 쓰나미 해일이 오기 전에 짐승들은 모두 산으로 피해 달아났다고 합니다. 미물은 천지의 변화를 예리한 본능으로 예측한다고 합니다. 인간이 지니지 못한 예민한 동물적 감각으로 지구의 흔들림을 알아차리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미물도 이러한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시대의 흐름을 어찌 감각하지 못하겠습니까?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더 살아 365세에 죽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이름은 많은 의미를 함축합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확장하다, 시위먹인 활, 창을 던지는 자, 보내다 등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이름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건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을 때 동행을 통해 무언가 시대의 변화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므두셀라, 무슨 일이 예견되기에 창을 던지는 자인가? 아니면 무슨 일이 있기에 시위먹인 활인가? 아니면 무슨 일이 있기에 무엇을 보낸단 말인가? 등 몇 가지 짐작이 가능합니다.
신기한 것은 므두셀라가 세상을 떠나던 바로 그 해 노아 600세에 홍수심판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면 제일 먼저 자손의 복을 받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아 이름을 지을 때 이 아들의 생전에만은 심판을 미뤄 놓으시리라는 하나님의 긍휼을 담아 므두셀라라고 지었던 것입니다. 동행하는 믿음의 에녹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그 아들에게까지 이어져갑니다. 에녹에게는 죽음을 보지 않은 채 직접 옮겨 데려가시고 그 아들 므두셀라에게는 홍수심판 전에 최장수의 기록을 남기고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에녹으로 하여금 알게 하시고 그 아들 이름에 기억시킨 것입니다. 시위먹인 활, 그 손을 놓은 날, 즉 므두셀라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홍수 심판의 화살은 카운따운을 끝내고 활시위를 떠나 날아가는 것입니다. 심판의 창을 던지는 것입니다. 심판의 큰 물을 온 지구 구석구석에 보내 물난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몽돌비전인 여러분. 다윗의 승리가 새겨진 돌, 몽돌 여러분. 말씀을 요약하여 전합니다.
아멘으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의 기준이 하나님으로 잡혀 있기 바랍니다.
* 세상이 결코 함부로 덤비거나 해치지 못하는 꾸준한 믿음 되시기 바랍니다.
* 세상을 이기는 동행의 믿음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평상의 삶속에서 생각하는 습관이 늘 하나님중심으로 굳건히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죽음도 영향을 주지 못하는 거룩한 영적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분명 시대를 읽어 내릴 줄 아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많지 않은 남은 날들을 우리 함께 몽돌비전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실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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