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5.주일예배<출23:1-12. 공평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실 때 “스스로 있는 자” 또는 “히브리인의 하나님”“만군의 여호와”등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전쟁터에서 말씀하실 때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상숭배하는 범죄의 현장에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선으로 악을 갚고 가난한 자를 돕는 하나님이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칫 공정치 못한 판결을 종종 받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사에 부패하지 않은 곳이라곤 엄밀히 말한다면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언제나 무고한 자 곧 억울한 자를 살피시며 약한 자를 도우라고 합니다. 오늘 배우는 하나님의 성품 첫 째,
1. 히브리인의 하나님이십니다.
1) 억울한 자의 하나님
1절과 2절을 함께 읽습니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아멘.
세상은 다수의 악으로 구성되어 있고 교회는 소수의 선과 진리로 세워집니다. 교회가 진실한 이치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한다면 세상은 악한 음모와 꾀로서 육신의 쾌락과 안일을 위해 방법 무관한 승리를 추구합니다. 과정이야 어떠하든 육신으로 이 땅에 있는 동안 남보다 많이 먹고 남보다 잘 입고 남보다 많이 즐겨야 한다고 믿는 게 세상 삶의 공식입니다. 그러다 보니 남의 형편을 살펴줄 여유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남보다 앞서가야 합니다. 할아버지 노아의 벗은 것을 소문내기에 신속했던 니므롯의 조상 가나안처럼 남보다 빠르고 정확하고 많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다수의 보편적 욕구가 공산혁명을 일으켰지만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운동은 교회를 통하여 시공을 넘어 오늘도 소수의 헌신된 사람의 희생과 섬김으로 펼쳐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한 마귀의 영은 어리석은 다수의 사람들을 이용하여 소수의 진리를 따르는 자들을 공격합니다.
우리는 악한 다수에를 합류하지 말고 소수의 진리수호자가 돼야 합니다. 근거가 없는 헛소문을 듣고 퍼뜨리지 말고 남을 모함하고 해치는 악한 증인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악한 무리를 따라 군중심리에 속아 약하고 선한 자를 죽이는 일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불행은 주님의 십자가사건이고 시대와 내용은 좀 달라도 얼마 전 우리나라 광우병소동, 싸이의 말춤, 레이디가가 마돈나공연 등도 규모만 달랐지 모두 마귀의 선동으로 군중을 송두리째 바보로 만드는 일입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교황방문의 반응을 보면서 열광하는 한심한 영혼들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반짝인다고 다 보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주변에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면 자세히 살펴보세요. 그분에겐 냉정한 객관성이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금보다 더 소중하며 많은 재산보다 유익합니다. 신명기 5:32절에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이어 뒷 절에서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고 합니다. 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순종하여 아무도 힘들게 하거나 억울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받을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2) 가난한 자의 하나님
본문 3절을 함께 읽습니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그렇게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시각과 바른 판단, 정직한 증언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굽은 판단과 그릇된 증언은 그것으로 인하여 무고한 생명들이 억울하게 죽거나 깊은 불행의 수렁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되듯이 가진 자라고 하여 공연히 미워하거나 불평등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970년 캄보디아엔 시아누크정권을 둘러엎고 론놀이 이끄는 우익구테타가 성공합니다. 그 론놀정권을 다시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즈군이 뒤집게 됩니다. 1975년 4월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이 완전장악되었습니다. 그 이후 캄보디아는 말할 수 없는 피흘림의 소용돌이에 들어갑니다. 크메르루즈군은 평균연령 14세의 소년소녀들로 구성된 무자비한 군대입니다.
그들은 비판력이 없는 나이에 배우기를 돈가진 자본가들이 사회를 좀먹는 악의 근원이라고 세뇌돼 철없이 불타는 적개심에 1977년부터 1999년까지 20여 년간 상상하기 어려운 만행을 저지릅니다.
특히 1977년부터 2년간은 하루에 약 3천여 명을 죽이는데 총알을 아끼느라고 비닐봉지로 뒤집어 씌워 죽게 하고 예리한 사금파리나 유리조각으로 목을 그어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죽이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개발하여 즐기기에 이르렀습니다. 기타를 칠 줄 알거나 피아노연주를 하거나 안경을 쓰거나 손이 곱다거나 얼굴이 하얀 사람도 사냥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헬로우”라는 영어인사를 알아듣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처형했습니다.
뚜올슬랭으로 불려지는 심판센터에서는 14-16세의 심판관들이 절대권력으로 인간사냥을 실시했는데 들어는 가지만 나온 사람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보는데서 아이를 멀리 세워놓고 사격연습 타게트로 사용하는 일도 자행하며 아이가 쓰러지면 깔깔대며 웃곤 했습니다.
지금 캄보디아에는 지식층의 빈곤으로 말할 수 없는 국력의 약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영화 ‘킬링필드’에서 일부 소개됐으나 실제는 훨씬 더 심했다고 합니다. 누가 이 어린 아이들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잘못된 편견교육이 이토록 무서운 죄악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부자는 무조건 보기 싫은 자들, 없애버려야 할 자들이라는 요즘 진보좌파의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3) 나그네의 하나님
9절을 함께 읽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히브리인이 본디 에벨 강을 건너 온 나그네를 의미합니다. 인생이 원래 이 땅을 잠시 지나는 나그네이지만 한 평생 살면서도 어느 한 곳에 정착하기까지는 외롭고 낯선 곳에서 방황하는 나그네세월이 있습니다. 이런 나그네 된 이들을 박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는 하나님이 나그네인 우리를 항상 후대하고 계신 것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우리 모두라면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나그네의 정체성입니다.
나그네의 목적지, 나그네의 소망, 나그네의 사상입니다. 천국을 향해 하나님을 소망하며 가는 나그네는 이 땅에 목적이 없으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관한 한 편한 마음으로 어떤 열매에도 자족하고 묶이지 않는 겁니다. 그 나라를 사모하며 성결한 삶, 세상과는 뚜렷하게 구별된 자세로, 내가 마음 써서 달라질 게 없는 일이라면 속히 내려놓고 평온한 마음을 찾아야 합니다. 현재 그 자리는 잠시 빌려 쓰는, 말 그대로 임대요, 잠시 지나가며 쓰는 임시사용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아멘.
2. 선으로 악을 갚으시라는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쉽지는 않지만 이 말씀은 듣고 행하기만 하면 모두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의 명령입니다. 내게 큰 손해를 끼치고 언제 봐도 싫고 미운 그 인간이 힘든 일을 당해 고생하면 나는 웬일인지 행복해지기 시작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마음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죄성 앞에 만민이 꼭 같은 악입니다.
장마가 와서 내 논이 다 망가져도 그 인간 유산받아 넉넉한 수십마지기 논이 몽땅 망가질 거 생각하면 뭐 비 좀 더 와도 과히 서운하질 않다는 게 고약한 우리네 심보라는 겁니다.
악과의 싸움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은 자신의 힘으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의 힘을 통해 이루는 선한 승리는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대단한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절의 말씀입니다. 사람 머리에 숯불을 올리면 어찌 됩니까?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머리를 싸매고 바닥을 구르는 모양이 머리에 불이 붙는 사람 같다는 겁니다.
쉽지 않고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그러나 그렇게만 한다면 살아계셔서 보고 들으시는 주님은 확실히 명쾌하고 감격적인 답과 승리를 주십니다.
조심스런 자세로 다가서서 곤경에 처한 원수를 돕는 저와 여러분이기 바랍니다. 상대의 머리에 숯불이 지펴지듯 쩔쩔매며 미안해할 때 진심으로 위로하여 주님께 상 받는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3. 골고루 배려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0절에서 12절에는 추수할 때에 7년째의 안식년과 그 때에 가난한 자와 짐승들에게 돌아갈 몫으로 땅을 묵혀두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소외당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먹을 것을 염려하신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추수 때 이삭을 흘리라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또 12절에는 엿새 일하고 다음 날 제 7일에는 일손을 놓고 쉼으로 종이나 주인이나 피차 숨을 돌리라고 하십니다.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안식일제도는 욕심많은 인간들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은 주 5일근무제가 도입되고 있지만 일요일제도가 없었다면 노사 간 노동협약의 기본자체가 달라졌다고 보는 견해가 맞습니다. 사업주는 어떻게 해서든 인건비가 더 나가더라도 더 많이 일해 더 많이 생산하고 싶어 합니다. 여기에 안식제도가 없었다면 과연 지금처럼 5~6일 근로하고 하루 쉬는 것이 가능했을까 의문입니다. 안식제도는 일을 시키는 자보다 일을 해야 하는 자들 편에서 배려한 것입니다. 이 역시 약자들 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억울한 자 편에 서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으로 악을 갚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골고루 배려하시되 약한 자 편에 서 있으십니다.
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 가정에 늘 함께 하셔서
억울한 일 없게 하시고, 선으로 악을 싸워 이기게 하시고,
힘들 때마다 능력되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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