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04. 주일예배<요14:1-7. 길과 진리요, 생명되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울러 영생의 명령인줄 우리가 믿습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영생의 은혜가 모두에게 넘치기 원합니다. 주님이 잡히시기 얼마 전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강론을 통해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계속해 떠난다는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은 근심하며 질문을 합니다. 오늘 주제말씀은 길을 묻는 도마에게“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인데 주님은 그 말씀 전에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면 근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 근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2~3절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근심하지 않아야 할 분명한 이유, 그 첫째,..
* 주께서 예비해 두신 영원한 성도들의 거처입니다.
주께서 예비해 두신 천국의 영원한 우리들의 집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있는 힘 다해 집 하나 마련하면 보통 성공한 서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이 살아가는데 먹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집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주거개념이나 정서는 외국과 달라서 소유와 정착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작아도 내 이름으로 등기가 나있는 내 집이라면 부자가 된 듯 안정감을 갖게 됩니다. 반면 임대주택은 아무리 좋아도 마음이 뿌리를 못 내려 자리가 잡히질 않습니다. 언젠간 떠날 남의 집이라는 고정관념이 마음에 안정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서구의 주택문화는 소유가 아니라 거주의 개념이라서 우리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임대문화가 대세인데 우리도 서서히 집은 단순히 거주공간이라는 생각이 점차 확산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주택개념이란 육신의 장막을 말 그대로 천막집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몸을 가릴 수 있고 언제나 주의 명령에 따라 즉시 떠나기에 편리한 게 장막입니다. 벽돌로 지은 집은 여기가 내 영원한 집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집착하게 하고 이생에 안정감을 가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간절함이 그만큼 느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작으나마 집 한칸 마련하는 게 평생소원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곧 떠나신다는 거듭된 예고에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베드로도 도마도 마음에 근심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모두 생업과 관계를 버리고 삶의 모든 기대와 소망을 그리스도께 걸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주께서 신변에 불이익을 당하거나 변고가 생기면 제자들은 희망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자칫 자신들의 안전도 보장받기가 어렵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불안한 것입니다. 그렇게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신뢰는 불안을 해소시키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못 믿을 때 불안한 겁니다. 사방 둘러보아 믿을만한 구석이 없으면 이때부터 인간은 불안한 겁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저와 여러분. 근심이나 염려가 엄습할 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축복합니다. 그 이유를 2절과 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습니다.
청년시절 등산하면 산에서 아파트단지를 내려다봤습니다. 성냥갑을 차곡차곡 쌓은 듯 수백수천의 아파트들이 떼를 지어 단지를 이루고 있는데 저 많은 것 가운데 내 집 하나가 없다는 사실 앞에 맥이 빠졌습니다. 개미떼같이 줄을 지어 달리는 수많은 차량행렬에 내차가 하나도 없다는 데도 힘이 빠졌습니다. 무능, 무력감과 열등감으로 세월은 왜 그리 더디 가는지 어서 늙어 빨리 가야하는데 하던 철조망같던 젊은 날이 엊그제 같습니다. 보통 무주택서민이 느끼는 허탈한 무력감,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아멘. 그러나 사랑하는 믿음의 내 동지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집없는 설음에서 자유하기가 쉽질 않은 것은 웬일입니까? 월세보단 전세가 부럽고 같은 세를 살아도 방 하나만 더 있어도 얼마나 좋을까하면서 살아갑니다. 믿음은 천국의 소망으로 활활 타올라도 여전히 육신의 감각을 어찌합니까? 우리는 고단하고 서러운 이 땅에서 습관처럼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현실적 삶이란 각 사람의 영혼의 상태와 항상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가슴 깊은 곳 심령중앙에 하나님의 지성소, 하나님의 동산이 다시 세워져가는 에덴회복이 이뤄질 때 여러분의 가정과 집이 새로 건축되는 줄 믿기 바랍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둘째 강의 이름을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렀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부라데더라.”정금과 호마노보석이 있는 강들과 아시다시피 인류4대문명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에덴으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기쁨의 동산에서 생명의 물줄기 넷이 흘러나오던 그 에덴이 주께서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 심령 가장 깊은 곳에서 다시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눈에 뵈는 우리들의 장막집은 그렇게 먼저 무너진 에덴의 지성소가 다시 세워짐으로 시작하는 줄 이제 우리가 믿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더욱 마음 써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집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소가 우리 가슴에서 세워지는 일입니다. 본문 2절의 뒷부분을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둘째, 주님이 먼저 가셔서 거처를 준비하십니다.
본문에서 밝힌 바, 우리들의 거처는 우리 주님이 마련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진정 마음써야 할 것은 이 땅에 집이 아니라 주님 내안에 거하실 처소입니다. 날로날로 더욱 정결한 시은좌, 곧 은혜의 대속보혈이 부어지는 법궤의 뚜껑, 불변약속, 금으로 두껍게 입혀진 뚜껑을 열면 그 아래 법궤 안에 불순종이 기억나게 하는 십계명 돌판 두 개,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항아리, 그렇습니다. 그것은 택한 백성들이 불평하고 배신할 때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구원의 증거들입니다. 그 배신의 흔적을 약속의 뚜껑으로 덮어 뵈지 않게 하고 거기 다시 메시야의 보혈을 부어 은총의 좌소가 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온 마음 다해 살피며 아파해야 할 일들 아닙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의 처소가 우리들 내면에서 세워지고 우리들의 영원한 처소가 저 하늘에서 마련되면 이 땅에 장막이야 그건 그림자인데 우리 좋으신 주께서 어찌 살펴주시지 않겠냐는 겁니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님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번엔 3절 뒷부분을 눈으로 봅니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셋째, 주님이 다시 오셔서 그 처소에 인도하여 거기 살게 하십니다.
“내가 다시 와서” 우리들의 영원한 소망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계시록 끝의 말씀에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우리 주님은 분명히 속히 오신다고 했습니다. 믿기를 축원합니다. 벧후 3:9절 말씀처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그 것, 사랑은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해 살게 하실 줄 믿습니다.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할렐루야. 주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셔서 믿음으로 주를 영접한 구원받은 당신의 자녀들을 주님이 예비하신 그곳으로 환영하며 맞아주실 것 믿으시면 믿은 대로 됩니다. 즉 이 땅에서 주님을 영접한 자, 주님이 하늘에서 영접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영원히 살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본문 4절을 함께 읽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넷째는, 주님가시는 길을 우리도 알고 따라 갑니다. 주님가시는 그 길은 십자가의 험한 길이고 그 길은 부활영생을 준비하는 단계로서 영광을 보장받은 인류구원의 기쁜 길입니다. 제자란 뒤를 따르는 자입니다. 그렇게 주님말씀처럼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서 모두 주의 이름으로 순교하는 영광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제자들은 험한 십자가의 길을 주님따라 걸어갔지만 지금 그들은 주의 빛난 보좌 옆에서 영광된 영생의 상급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주님 가는 곳의 길을 알고 그 길을 따라 주의 곁 거기에 있습니다. 당시 도마가 질문했습니다. 5절을 함께 읽습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여기서 13장 36절 앞부분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도마와 베드로가 주님께 가는 곳을 묻습니다. 베드로는 어디로 가시냐고 물었고 이어서 도마는 가는 곳을 모르니 그 길을 어찌 알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멘. 길과 행보를 묻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자신이 곧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섯째, 친히 길이 되셔서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구원주가 되신 그리스도십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행4:12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길을 묻는 도마와 베드로의 질문은 죄로 인해 길을 잃은 모든 인생들의 질문입니다. 길을 묻는 제자들, 길을 묻는 인생들에게 단 한 개의 정답, 유일한 소망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왜 인생이 슬프고 아픕니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자살합니까? 왜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듭니까? 길이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길만 알면 만사가 일사천리입니다. 길만 보인다면 어려울 것이 없는 인생입니다. 가는 길이 확실해서 그 끝이 믿음으로 보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일마다 때마다 순간순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노래부르는 명쾌한 삶이 될 것입니다. 영접하심으로 더욱 친밀한 교제 속에서 속히 길 되신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복된 도구가 되기 바랍니다. 7절을 함께 읽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마지막 여섯째, 예수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것 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하나님을 보려면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을 알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예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즉 예수님의 모든 생애와 사역은 하나님의 실존과 인간사랑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인간의 모든 길로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 영생에 이르는 길, 문제가 풀어지는 길, 엉크러고 부서진 것들로 하여금 온전하게 되는 길이 오직 예수께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들어선 구원의 방주는 예수그리스도를 따라가서 영원한 처소,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를 인도하여 들인다고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그대로 근심하지 않고 근심대신 기쁨의 찬송을 부르는 예배자로 초청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언하고 권면합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님 통해 늘 하나님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나서 영원한 처소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갖고 기쁨의 찬송으로 남은 삶을 하나님의 소원과 기쁨을 따라 살아가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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