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1. 주일예배<왕하13:20-21. 죽은 엘리사의 뼈>
이스라엘에 여호아하스왕이 죽자 아들 요아스가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아람군대가 툭하면 쳐들어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이렇게 징계하며 그 때마다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나무라며 경고했지만 여전히 요아스왕조차 바르지 못했습니다. 요아스는 그래도 늙은 선지자 엘리사를 늘 후대했던 왕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신적, 신앙적 지주였던 엘리사에게 어린 시절 많은 교육도 받아 그를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위기 때마다 아버지 같은 스승 엘리사를 찾곤 했습니다. 그래도 어쩐 일인지 남유다나 북이스라엘이 한결같이 우상숭배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회초리삼은 이웃나라에 늘 얻어맞기 일쑤입니다.
선지자들로부터 그렇게 경고를 받고 두드려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몇 년 지나면 까맣게 잊고 또 범죄하고 얻어터지고 하는 것이 소위 선민이라는 백성들의 하는 짓이었습니다. 아무도 돌을 던지기 힘든 인간 원죄의 문제인 것입니다. 바로 살기보다는 재미 따라 곁길을 즐기는 인생들 아닙니까?
<물 튀기며 가는 아이들, 하지 말라는 짓은 유난히 재미가 있어.. 토요오후 재미있는 시간들>
엘리사가 늙어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자 모압이 다시 이스라엘로 쳐들어 왔습니다. 이 때 어떤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던 무리들이, 쳐들어온 모압도적들을 보고 놀라 급한 김에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지고 달아났습니다. 여기서 던져진 시체가, 죽은 지 제법 된 엘리사의 뼈에 닿자 살아나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입니다.
오늘은 이 일을 통해서 기적에 대해 함께 살필 때 위로부터 풍성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진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는 자신의 의지나 요구가 없습니다. 그저 죽은 자기를 장사 치르던 사람들이 강도떼가 나타나자 그만 놀라 마침 가까이 있는 엘리사의 묘실에다가 급하게 던져버린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를 던지고 달아난 사람들은 뭡니까? 그들도 도적떼가 나타나자 놀라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던져진 주사위와도 같은 광경입니다. 아무도 의도한 바 없는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겁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대부분 인생이 이렇게 뜻밖의 틀 속에 종종 던져지기도 합니다. 지금 운명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주도면밀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데 인간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죄로 죽어있던 자들이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조건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멸망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죽은 뼈처럼 알고있던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 삶과 생각과 관계가 부딪치게 되면서 우리는 깨어나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가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진 일은 아무도 해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상황과 배경을 설명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사고능력이 조금만 깊어진다면 우리는 드러난 상황 뒤에 가려져 있는 하나님의 뜻과 손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민한 자는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진 죽은 자는 어디에 닿았습니까? 그래요. 죽은 지 이미 제법 된 예언자, 엘리사의 하얀 뼈에 닿았습니다. 사실 던진 사람들도 자신들이 던진 시신이 엘리사의 뼈에 닿으리라는 것과 더욱이 죽은 자가 살아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그냥 급한 김에 가까운 데 내던진 것뿐입니다. 그런데 묘한 일이 생긴 겁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분명히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연이나 요행이나 운명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무시하는 이런 말은 모두 마귀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인간들이 속고 있는데 우리 중에 속고 사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 없길 바랍니다.
2. 엘리사의 뼈에 닿자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21절입니다.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 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기적입니다. 이럴 수 있는가? 그럴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분명히 이 시간 선포합니다. 기적은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시19:2절입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전하니” 밤은 밤대로 낮은 낮대로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과 증거를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주변은 사실 온통 기적으로 가득합니다. Miracle !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단어입니다.
기적이란 기이한 흔적이고 일상적이지 않은 것들을 말합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있는 일상들이 비록 늘 그렇게 다가오고 있어왔지만 엄밀히 말해서 기적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주변을 끝까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시간차 현상에 늘 속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과 씨를 던졌는데 순간적으로 사과나무가 튀어 올라오면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며 놀랍니다. 그러나 사과 씨를 땅에 묻어 몇 달이 지나서 싹이 올라오고 줄기가 나고 꽃이 피고 시들어 사과가 달리면 그것은 늘 그랬기 때문에 아무런 놀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둘 사이에 시간이 들어간 외에 다를 게 없는 꼭같은 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출애굽이 성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리는 완전식품 만나의 기적을 경험합니다. 이른 아침 밖에 나가보면 쌀알같은 것이 수북수북 쌓여있는데 넉넉합니다. 그대로 먹고, 볶아 먹고, 쪄 먹고 삶아 먹고 빻아서 과자도 만들어 먹는 아주 귀한 영양식이었습니다. 완전식품입니다.
처음엔 놀라 감동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늘 먹는 이 일에 지루함이 느껴지면서 불평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이제 더 이상 만나는 감사거리가 아니고 짜증스러운 일상이 된 것입니다. “애굽처럼 뭐 딴 것 좀 없어?”
그렇습니다. 온갖 기적인 하나님의 은혜 한가운데서 우리가 이젠 무감각한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현상이 당연한 것이고 신기할 것도, 감사할 일도 없는 듯이 살아갑니다. 잠들어 버린 영의 감각이고 잠이 길면 죽은 것입니다. 끝까지 분석되지 않고 해명할 수 없는 신묘한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들은 늘 우리 곁에서 무한한 가치를 지닌 채 우리들의 믿음과 만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숱한 기적을 바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보다 높은 품격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관점이 달라지면 눈앞의 모든 장면이 바뀝니다. 바뀐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주변은 온통 엘리사의 뼈에 닿아 벌떡 일어서는 시체들의 부활과 같은 놀라운 은총으로 가득할 줄 믿습니다.
엘리사선지자가 수넴지방을 지날 때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줄 알아보는 어느 가정에서 극진하게 대접(왕하4:8)했습니다. 엘리사선지자가 고마워서 뭐 도울게 없나 게하시를 통해 알아보니 그들에게 아들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들을 약속합니다. 노부부인 그들은 믿지 않고 사양했지만 1년 후에 아들을 낳아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잘 자라다가 어느 날 머리를 잡고 신음하다가 엄마 품에서 죽었습니다. 이 아이를 살려내는 엘리사의 모습이 특이합니다. 왕하4:34절에 보면 아이의 몸에 자신이 몸을 포개어 엎드립니다. 두 번 그렇게 하자 아이가 7번 재채기를 하고 살아났습니다. 4복음서에선 예수님이 말씀만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마8:13)과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떠나는 것(마14:36)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살았을 때도 죽었을 때도 그 몸으로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민족의 위난을 경고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만으로 명령하여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여기서 공통점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말씀을 듣는 여러분. 세상에 많은 종교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종교는 세상에 없습니다. 어떤 종교도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힌두교나 불교의 윤회설은 죽은 뒤 다른 짐승이나 사람으로 환생한다는 것인데 하나님을 떠난 악한 영의 교훈입니다. 기독교는 종교이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앙모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신앙은 반드시 죽고 거듭나는 부활신앙입니다. 세상사람들과 예수믿는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세상사람들은 죽어 영원지옥을 향해 가는 것이고 예수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살아나되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그것입니다.
요11:25절을 찾아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길 바랍니다.
3. 믿는 자의 관계는 살아나는 관계입니다.
지금까지 얻은 결론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사람을 살립니다. 죽은 영혼을 살립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저는 여러분 자신 한분한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게 될 줄 믿습니다. 어떤 것이 소중한 것인가? 여러분도 엘리사처럼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죽어서도 사람을 살렸는데 살아있는 여러분이 왜 죽은 영혼들을 못 살려냅니까? 실은 살려내고도 모르는 경우도 있는 줄 압니다.
여러분이 정상적인 보통의 믿음만 가졌다면 분명 여러분을 만나는 자마다 그 영혼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계속 접촉하는데 그 사람의 영혼이 지속적으로 예수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필경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이 죽은 자로 살기로 작정돼서 여러분을 미워하든지 아니면 여러분의 영에 힘이 없든지 입니다.
허기야 누구처럼 사자를 잡으러 사자 굴에 갔다가 사자친구가 되어서 사람을 잡으러 다시 나오기도 합니다. 좀 다른 얘기지만 과거 2중간첩이 많았습니다. 양쪽에서 활동자금받아 부유하게 살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시체로 발견된 후 사연이 밝혀지곤 했습니다. 어느 쪽에서 죽인지도 모릅니다. 생명을 살려야 할 성도가 오히려 저들의 죽은 행실과 죽은 양심과 속된 정서와 죽은 문화에 물들어 교회를 분석하고 의심하고 야릇한 일과 엉뚱한 사상에 젖어들어 한 패거리가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귀한 믿음의 가족 여러분. 주님만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줍니다. 능력은 오직 믿음가운데 있습니다. 믿음떠나서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시기 권면합니다. 기도를 쉬면 기도거리가 생깁니다. 기도거리 생기기 전에 미리미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015년 한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몸에 접촉되는 관계는 모두 주의 말씀으로 소생하는 생명의 관계이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이후의 사연이 생략되었지만 엘리사의 뼈에 부딪쳐 살아난 그 사람이 어떻게 소리쳤겠습니까?
“난 엘리사선지자의 뼈에 닿아서 살아난 사람이오. 엘리사의 예언은 우리가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엘리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우리는 어찌 외쳐야 할까? “예수를 만나면 죽었던 영이 살아납니다. 하늘의 이치가 깨달아지고 하늘나라가 보입니다. 영원히 살게 됩니다.”이렇게 외치며 거저받은 새생명을 하나님위해 살기 원합니다. 올해 남은 날들은 여러분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살아나게 될 줄 믿기 바랍니다. 그러한 기쁨의 간증과 열매가 풍성하기를 예수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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