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강단

2015.09.20.주일예배<민23:18-23. 발람의 축복>

by 설렘심목 2015. 9. 20.

2015.09.20.주일예배<23:18-23. 발람의 축복>

 

아무리 뇌물을 풍족하게 주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어 전할 수 없는 발람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복된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물질이나 권력 앞에서도 복음은 여전히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이 하나님의 말씀은 세계역사의 바퀴를 돌리는데 그 원동력은 복음이고 그 수레는 교회라는 영원한 하나님의 집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은 오늘 설교듣는 저와 여러분을 말합니다. 우리가 받을 복, 돈도 권력도 환경도 가로막지 못한다는 결론을 기억하면서 발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사랑은 어떠한 것인지 살핍니다.

19절을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1. 신실하신 하나님.

 

1) 식언(食言)치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한번 하신 말씀은 다시 하나님께로 가지 않고 반드시 그 말씀을 이루셔서 증거하십니다. 55:10절입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말씀을 잊거나 약속을 땅에 흘리지 않으셔서 끝내 이루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신실하신 주님을 우리 모두 찬양합니다. 반드시 이루어져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인줄 믿기 바랍니다.

 

2)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 후회할 일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러나 삼상15:11절에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후회할 일을 하시지 않지만 사울의 경우 사울을 치신 후에 사울을 사랑하셔서 그 징계를 후회하듯 매우 아픈 마음이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실수와 후회가 없으셔서 완전하신 주님이 우릴 향한 계획을 이뤄 가실 때 누구의 손을 잡기 원합니까?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134:2)

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18:16)

바로 찬송하는 우리의 손입니다. 자신의 육체를 제압하며 말씀 앞에 순종하고자 애를 쓰며 버거운 일과 피하고 싶은 상황가운데서도 여전히 높이 들어 찬양하는 손, 그 손을 잡고 주님은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2.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허물을 덮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

 

본문 21절은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않으시고 애굽에서 끌어 내셨다고 발람은 노래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과 악함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는 끝이 없습니다. 주님은 일곱 번의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이나 이스라엘이나, 즉 믿음이 앞선 자나 뒤따라가는 자나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자녀들의 연약을 심히 나무라지 않으시고 다만 깨닫도록 도우시는 줄 믿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 세우신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의 용서하심같이 용서함을 몸에 익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용서는 실로 위대한 사랑이고 능력이자 특별히 그것은 뛰어난 영의 권세, 靈權입니다. 미움과 분노에 사로 잡혀 노예가 되었던 자신의 영을 자유하게 하는 대단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하기를 기뻐하는 성도되시기 축복합니다. 결국 용서란 자신과 자신의 후손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잠시 12:15을 보면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바꿔 징계대신 불쌍히 여기셨다는 건데 그 돌이키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그게 용서입니다. 회개는 과녁을 옮기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과녁을 돌이키는 것, 분노라는 과녁을 바꾸어 불쌍히 여기는 게 용서입니다. 괘씸한 마음이 변해 불쌍히 여기면 온전한 용서가 이뤄져 먼저 자신이 평온을 차지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용서는 용서받는 이스라엘 구원의 감격과 선한 결단을 위해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평강과 부요의 깃발이 꽂힌 하나님나라의 건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이 그 구원에 감동하여 남은 생애 기꺼이 헌신하고, 기쁨으로 주의 군사가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치 못하고 온전치 못한 히브리들을 불러모아 예수의 대속보혈로 회복시키셔서 완전하고 온전한 사랑과 선이 지도하고 지배하는 가장 이상적인 낙원입니다. 우리는 약해도 주님은 히브리인 우릴 통해 그 자비하심으로 반드시 이루실 줄 믿습니다.

 

3. 아무도 택한 주의 백성들을 해할 자가 없습니다.

 

본문 23절입니다.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그 어느 것도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를 해치거나 괴롭히지 못합니다. 늘 듣는 말씀이지만 인생을 괴롭히는 것은 남이나 환경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을 분명히 기억하는 복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그래서 자신을 스스로 가로 막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볼까 합니다.

 

1) 내안에 가득한 자아입니다. 가시나무새라는 노래는 이 부분을 정확하게 고백한 진실한 노래라서 많은 성도들과 교회지도자들이 애창하는 줄 압니다.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날아 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자기 자신으로 가득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좋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 손에는 없는 게 없습니다. 주시고 싶은데 성경이 아닌 자아가 너무 강하고 이기적인 욕심으로 가득해서 잘못 사용해 다칠까 못주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

4:23절에선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지킨다는 것은 바르지 않은 것들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오염된 것이 들어오는 것보다 더욱 난처한 것은 내가 그 오염된 것들을 구별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 터득하고 익히게 된 생존본능이 어느새 내 주인이 되어 하나님이 보이질 않게 되는데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내 판단, 습관, 그릇된 고정관념에 대한 확고한 의지, 복음의 교훈보다 시급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어느 새 하나님을 잊은 채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내안에 내가 가득한 사람들의 특성 중 하나가 훈계와 충고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의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서는 계속해서 훈계를 멀리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복된 믿음의 길을 가도록 권유합니다. 지혜의 총서라고 할 수 있는 잠언서의 현실적 결론은(22:4) 그러므로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곧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모든 것을 다 받아 살아계신 영생의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길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옹색하고 비참한 자신 안에서 광활하고 놀라운 영생의 하나님께 나아가 그 품에 영원히 안기게 되는 걸 말합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 최고의 신분변화입니다.

 

2) 잘못된 우선순위입니다. 미숙한 자와 성숙한 자의 차이, 즉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일의 순서에 있어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이들은 하고싶은 것부터 하지만 어른들은 해야 할 것부터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성숙한 자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한 척도로서도 가치 있는 진단법입니다. 우리가운데 나이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마는 성향인데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밀려있다면 그는 아직 미숙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숙제는 하지 않고 재미있는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결국 선생님께 벌을 받는 아이처럼 어른아이 할 것 없이 그런 부분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부분이 성숙과 더불어 차츰 빈도와 깊이를 줄여가며 자신의 삶에서 좀더 풍성한 결실을 확신하려면 나약한 자신을 더욱 추슬러 먼저 해야 할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거듭되는 우선순위를 다시한번 선포합니다.

하나님중심이어야 합니다. 성경중심이어야 합니다. 교회중심적인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교단의 생활표어이며 이는 하나님이 주신 영생의 명령입니다. 이 표어를 오늘 말씀에 잇댄다면 이 일에 하나님은 어찌보실까?”하나님우선사상이요, “이건 복음에 위배되지 않을까?” 말씀우선사상이요, “이번 일이 교회에 유익과 덕이 될까?” 교회우선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자에게 결단코 실패는 없습니다. 실패했습니까? 그것은 더 큰 감사제목의 출발로서 실패가 아니라 또 한 번의 귀중한 경험이요, 교훈을 체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하고 아플 때 감사하고 예물까지 드린다면 그는 진정 모든 사물의 우선순위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우선사상, 말씀우선사상, 교회우선사상, 이러한 갸륵한 결단이 있다면 그는 분명 그리스도의 복된 증거자로 풍성한 삶을 이웃에게 증거하고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이러한 하나님중심과 우선사상으로 자신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알량한 이름에 생명을 걸거나 명예를 걸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낮아지는 자신으로 인해 높아지시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으로 인하여 늘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믿고 순종하시면 복된 말씀 가운데 사시는 저와 여러분과 모든 가문이 되시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