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06. 주일예배<창15:1. 여호와는 성도의 방패, 성도의 큰 상급.>
아브라함이 일찍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말하면서까지 연약을 드러내지만 하나님은 그와의 약속을 기억하셔서 끝까지 살펴주시고 풍성하게 하신 것 우리는 기억합니다. 조카 롯은 눈에 보기에 좋은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고 아브람은 척박한 곳 가나안땅 헤브론을 터전으로 삼았는데 후에 이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됩니다. 인생은 장소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 곧 내면 중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조카 롯과 그 가족이 전쟁으로 잡혀가자 아브라함이 도와서 모두 구해줍니다. 이때 간신히 살아난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감사의 뜻으로 사례하려 했으나 이를 극구 사양한 아브람은 이 후에 하나님께 그와는 비교가 안 되는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무슨 선물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자신을 선물로 주신다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방패요, 상급으로 하나님을 제시하신 최고의 언약이 선포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에게 주신 이 귀한 약속은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저와 여러분의 모든 영혼과 가정과 관계 속에서 지금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귀한 선물을 말씀듣는 가운데 모두에게 믿음으로 인하여 넘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어떤 선물이며 어떠한 약속입니까?
1.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다윗은 시 18편에서 고백합니다. 방패란 공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장구입니다. 위험한 공격으로부터 내 생명과 몸을 가려서 보호해줍니다. 방파제는 풍랑에서 배를 보호해주고 댐은 홍수로부터 사람과 농경지를 보호하며 물을 다스립니다. 사람이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님과 주변의 보호가 없었다면 현재의 모습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험한 일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늘 바람막이가 돼주셨던 어른들과 선배친지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호받던 소년소녀가 이제는 다시 어린 자녀와 후손들에게 방패가 돼 갑니다.
성도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가 안전하게 예배드리고 또 저녁에는 두 다리를 뻗고 잠들 수 있는 것은 밤잠을 못자고 휴전선과 각기 맡은 곳에서 경계근무를 하고 보안유지를 위해 밤을 새우는 군인과 경찰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과 나라의 방패가 돼 몸을 드리는 그런 사람들의 헌신이 없으면 이렇게 마음놓고 예배하고 돈벌고 공부하고 그리운 사람들 만나고 또 따듯한 잠자리에서 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잊고 있지만 바람막이와 방패가 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인생은 불안한 살얼음판이요, 험한 가시밭이요, 외로운 나그네길이요, 한치 앞도 모르는 지뢰밭입니다. 아리랑에선 뭐라고 노래했나요? 한평생 한이 쌓여 가슴이 아리고 쓰리니 아리랑 쓰리랑 고갯길을 넘어가는데 날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니 날 떠나 다른 데로 가지 말라는 겁니다. 허탄한 인생과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을 그렇게 허황된 것으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허망을 말하자면 전도서를 능가하는 것이 없습니다. 전도서가 지적한 인생허무는 모두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사람의 본분을 다하면 하나님은 인생들로 하여금 기쁜 찬송을 부르며 살도록 하셨다는 것을 확정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나는 네 방패”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왜 신뢰하지 못하고 그 방패를 삶에 적극적으로 응용하거나 유익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불신앙으로 인한 영적불감증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느끼지 못해서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느끼지 못한다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적인 은혜이며 인간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서 내 능력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여기서 다만 우리가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믿으려고 노력한다면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훨씬 명쾌한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의 실존을 믿는다면 그 분은 우리에게 더없는 최선의 방패가 되시는 줄 믿기 축복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평생을 통해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습니다. “나는 네 방패”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어주시는 구체적인 일들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눌까합니다.
1) 하나님은 영적배경에서 방패이십니다. 성도여러분. 잘 알듯이 우리 평소 삶은 영적인 상태의 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평강을 이루면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삶도 따라서 평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영혼의 평강과 번성을 이루는 것은 인생을 주님 앞에서 어느 정도 깨달은 성도라면 모든 것 가운데 우선돼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는 주님이 먼저 아시고 돕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께선 친히 성도의 영적배경이 돼 주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주심으로(롬8:26) 든든한 영적방패가 돼 주십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 결코 사단이 함부로 어찌하지 못합니다. 이렇듯 영적배경에 우리 하나님이 계신 자는 무엇으로 그것을 증거할 수 있습니까? 먼저 영혼이 강건합니다. 정신적인 문제가 없습니다. 귀신들림과 무관하며 악귀를 제어할 수 있게 됩니다. 영분별의 능력이 주어집니다. 흔히 말하는 신령한 지혜가 있습니다. 영이 맑고 밝아 미혹의 영이나 사단의 영에게 속지 않고 평강입니다. 귀신에 들리거나 이단에 빠지거나 정신병에 오락가락하는 일은 영적인 배경이 나빠진 현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환경이 좋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피하게 됩니다. 이럴 경우 본인은 물론 주변에서 꾸준히 그 영혼위해서 기도 해주고 듣던 안 듣던 찬송을 틀어 놓면 좋습니다.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일만큼 귀한 일은 없습니다.
2) 하나님은 육신의 삶에서 방패이십니다. 평생 살면서 우리는 어떠한 이유로든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때로는 모든 짐 내려놓고 무덤에서 잠자는 자가 부러울 적이 있습니다. 사업이나 직장일이 어렵게 돼 가정경제가 뿌리째 위협 받아본 가장은 처자식만 없다면 멀리 무인도로 가서 미련없이 세상 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고 잠든 어린 자식들의 얼굴을 보면서 진퇴양난의 깊은 한숨을 쉽니다. 불편할 정도의 가난이 아니라 이 정도라면 가난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게 몸의 질병입니다. 몸에 갇혀있는 인간의 삶은 잠시도 편하지 못합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모든 계획을 바꾸고 포기해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치병, 갑작스런 사고, 인간 누구에게도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3) 하나님은 관계에서 방패이십니다. 가난을 물리치고 육신의 질병에서 해방되면 이젠 어떤 어려움도 없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젠 두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누구를 만나느냐에서 인간은 행불행을 결정받게 됩니다. 잠17:1절에서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사람한번 잘못 만나 평생을 후회하고 찌든 삶을 살며 꿈이 사라진 평생을 한숨과 눈물 속에 살기도 합니다.
주께서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내면에는 참으로 측정키 어려운 위대함과 우주보다 더 큰 오묘한 세계가 숨어 있습니다. 인류가 창출한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만 한편 인간만큼 환경과 육신에 나약한 존재가 없습니다. 온 우주를 담아낼 만한 아름다운 한 영혼과 생명이 숨을 거두는 데는 단 3분이면 족한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 인간의 최고가치와 극도의 불안정한 미약을 동시에 세워주고 부축하는 단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람 앞 등불같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안가운데 완벽한 보호막과 바람막이가 되시는 방패, 하나님이십니다. 연애할 땐 전혀 그런 티가 없더니 애기 둘 낳고 나서부터 저 인간이 본색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내인생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애 하나일 때 얼른 결단했어야했는데 이젠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면서 가슴을 칩니다. 사람 제대로 만나는 거, 누가 이일에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어른들이 자주하던 소리. “얘, 넌 나처럼 살지 말거라. 신랑 바로 만나야 한다. 아무하고나 함부로 만나지 마라. 아니다싶으면 즉시 갈라 서거라.” 평생의 한이 서린 말입니다. 많이 들어 익히 알고 있는 다섯 개 만남을 보면 그 사람 주변이 다 보입니다. 부모. 친구. 스승. 배우자. 자녀, 그것이 예수로 인해서 통째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 소망을 갖고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부모와의 만남도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복된 관계로 변화받기 축원합니다. 모든 관계에서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꼭 붙잡고 먼저 관계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 지극히 큰 상급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안에는 없는 게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급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신 말씀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급이라는 것은 어떤 일을 잘 했을 때 위로부터 내리는 격려와 칭찬의 한 방법입니다. 더 잘하라는 겁니다. 남이 보고 도전받고 흠모하여 모두 잘하라는 공표입니다. 뭘 잘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자신은 하나님이 소유한 것 외에도 더 놀라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되 생명을 주시기까지 이루신 ❶ 십자가의 사랑과 ❷ 믿음으로 인한 영생을 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작은 믿음에 대한 보상치고는 너무나 큰 상급입니다. 더 주지 못해 마음이 안타까운 하나님이 핑계가 없어서 주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상급이며 불변하는 마음입니다. 신실하시고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이 자신을 믿는 자녀들에게 송두리째 내어 주셨는데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우리 교회와 성도의 상급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여기서 반드시 짚고 가슴에 새겨야 할 생명의 진리는 무엇인지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신 십자가의 사건은 본문이 이미 제시한 하나님자신이 선물이란 점에서 우리는 하박국선지자를 통해 주신 감동의 선포를 마땅히 품어야 할 것입니다. 합3:17-19절까지 함께 읽고 끝의 말씀을 듣기로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분이 공급하는 어떤 것들이 있고 없고 간에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와 상급이 되신 것 자체로 감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박국선지자는 이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아멘. 하박국선지자의 고백이나 다니엘선지자의 고백인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입니까? 그것입니다.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천국에 소망을 둔 믿음은 지금 이 땅에서의 공급의 문제를 떠나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이 자신의 머리위에 머무름만으로도 충분한 구원의 감격이 그치질 않게 됩니다. 우리에게 언젠가 죽음이 찾아오면 육신과 함께 불치병도 떠날 것입니다. 가난도 힘을 잃을 것입니다. 온갖 열등감과 상처와 설음과 억울함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영존하시는 하나님은 늘 곁에 계십니다. 거기는 천국, 하나님의 통치가 머문 현장,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환경과 조건에 무관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은 우리의 소망이 눈에 보이는 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한 저 천국에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본문을 다시한번 읽습니다. 창15:1절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방패시요, 지극히 큰 상급이시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입니다.
3. 믿음은 두려움을 물리칩니다.
두려움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두려움의 끝에는 죽음이란 게 있습니다. 사망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절망과 공포로 인간의 무릎을 꿇게 합니다. 그동안 사단은 부단히 사망권세로 인간을 협박하고 조롱해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나약한 인간은 “죽음만 면하게 해준다면, 생명만 살려준다면” 그렇게 구걸하며 마귀에게 이끌려 골고다 직전까지 왔던 겁니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오르심으로 사단의 사망권세는 끝났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영생은 죽여서 없앨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 선포됐고 아울러 어떤 사단의 권세도 주님을 방해 못한다는 증거가 골고다의 빈 십자가와 아리마데 요셉의 빈 무덤으로 분명히 증거,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사랑하시는 예배인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그분께 우리의 모든 삶과 더불어 생명까지도 전폭적으로 의뢰함으로 두려움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두려움은 불신앙이기에 두려움을 떨쳐내는 일은 믿음의 성도들이 마땅히 취할 코람데오의 사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사상, 신전사상이야말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는 사상이며 이는 주께서 주신 일심, 오직 주를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의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되시는 하나님을 잘 믿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실존을 바라보시기 축복합니다. 그 분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성도의 방패며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부요한 자들입니다.
메마른 사막길에서 가장 귀한 모든 것들을 풍성히 소유하고 또 나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와 상급이신 이 믿음의 길에서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모든 우선적인 시각과 초점과 중심이 꽂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방패삼고 상급으로 받은 복된 자들의 마땅한 가치관과 표준입니다. 방패이시고 상급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혀서 만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선포하면서 매번 죽으면서 다시 살아나는 저와 여러분이시기 예수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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