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30. 주일설교(마5:3~10. 모든 복의 출발, 관계의 복)
기독교는 복음에서 시작되는 신앙입니다. 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것이고 메시아는 구원자라는 뜻인데 온 인류가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원죄에서 구원받게 됨을 선포한 칭호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에서 소망이 없던 인류가 거기서 놓임을 받고 살아나되 영원히 사는 길을 우리 주님이 열어놓으셨다는 놀라운 소식은 더 이상의 복된 소식이 없는 최고최상최존의 값진 소식인 것입니다. 왜? 인생은 하나같이 죄로 인해 반드시 죽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복음은 복음이 됩니다.
2003년도 평택 첫 설교를 기억합니다. 다섯 개의 만남, 부모-친구-스승-배필-자녀와의 만남이 다 무너져도 마지막으로 복음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난다면 그 다섯 개의 만남을 무색하게 할 것이고 승리로 이끈다는 말씀 이제 진정한 복은 복음으로 출발한다는 말씀을 설교로 모두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복 받길 원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지금 그 기복 설교로 인해 결국 국민과 회중으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했습니다. 내면의 자기고뇌, 자기십자가를 외치지 않고 기복주의는 대형교회로 흘러갔고 작은 예배당에 선교와 자기성찰보다는 큰돈 대출받아 대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역자들은 그것을 모델로 따라하다가 이자 못 갚아 이단이 낙찰을 받습니다. 애석하게도 교회부흥의 기본여건이 대형마트의 그것과 같다는 사실은 일반회중이나 거기 부응해야하는 목회자에게도 부인하지 못하는 현실이 됐습니다. 목좋은 장소와 고급화한 대형건물에 최고급 음향장비와, 조명장치는 선한 투자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196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대형교회와 고급기자재 등은 예수라는 주어가 없는 말씀도 은혜롭게 들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은 그게 아니란 게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후부터였습니다. 교계 지도자가 부패와 부정으로 형무소에 들락거리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보이는 복만 설교하던 분들이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더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의미의 복이 무엇인지 살피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창39:3절 함께 읽습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1. 만복 중 으뜸가는 기초의 복은 관계의 복입니다.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요셉은 사랑하는 집을 떠나 외로운 타지에서 낯선 삶을 시작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인생의 만복이 어디서 증거됩니까? 고급주택과 엄청난 재물, 대단한 스펙과 환경이 아닙니다. 누구와 함께 하며 살고 있느냐는 겁니다. 훌륭한 환경 속에서도 악한 사람과 함께 하면서 이상한 영에 붙잡혀 온전치 못하다면 이는 불행한 일입니다.
한 나그네의 손에 들린 진흙이 그윽한 향기를 뿜고 있습니다. 네가 그 유명한 바그다드의 진주더냐? 아닙니다. 그럼 인도의 사향이란 말이냐? 아닙니다. 그럼 넌 누구냐?
네 저는 그냥 진흙입니다. 다만 백합화 옆에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비록 가난해도 정직하게 성경을 따라 살고자 노력하면서 성실한 중에 좋은 사람만나 함께한다면 그게 최고의 복입니다. 방금 전 언급한 5개의 만남 중 단 한 개도 시원치 않다면 우리는 예수님만나 모든 것 막판 뒤집기에 큰 감격으로 새 출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평생 이어지는 성화는 나 자신 안에서의 문제라는 걸 알면 내가 변한만큼 귀한 자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변한 것만큼 상대방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균형이 깨지면 헤어지게 되는 게 이치입니다.
귀에 익숙한 우리교회 복의 순서를 다시 정리합니다. 복 중 최고의 복은 관계의 복이라고 했습니다. 여러 관계 중 제일은 누구와의 관계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복, 이보다 큰 복은 없습니다. 만복의 근원 예수,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 아닙니까? 하나님 손 안에 없는 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 최고의 복인가? 그렇습니다. 존재라고 부르는 만유의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됐고 하나님으로 인해 생명을 유지합니다. 최고의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는 일보다 더한 복은 없고 그 관계의 복을 으뜸으로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복은 관계를 통한 깨닫는 복, 즉 각성의 복입니다.
아무리 귀한 분을 알아도 그 관계를 통해 얻는 유익이 없다면 그 관계야말로 허상입니다. 눈에 안 보이게라도 얻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책에서 작가의 양심과 사상을 읽고 감동하거나 누구에게 감동의 한마디를 들었다면 그는 관계를 통한 내면적유익을 취한 것이고 정직한 오너를 만나 생업을 유지한다면 그 역시 관계를 통한 복을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이든 안 보이든 관계에서는 반드시 어떤 영향을 받게 됩니다. 아무 일도 없다면 스쳐 지나가는 바람같은 관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이러할진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야 오죽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면 드디어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게 됩니다. 타락한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사랑의 대상임을 알게 됩니다. 안개같은 존재, 검불같은 존재가 아니라 깊은 존재의미와 거룩한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관계는 그 관계를 통해 깨달을 때 관계의 의미가 주어집니다. 즉 관계의 복은 깨달음으로 인해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발견과 깨달음의 최대장애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교만과 확신이라는 것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3. 관계에서 깨달은 것은 몸을 움직여 행해야 진정한 복입니다.
약2:20절에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모르겠냐?”고 합니다. 이어 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요즘 더없이 편하고 복된 시절을 갑니다. 인간은 편할수록 더 편해지고 싶고 게을러지는 육체의 속성을 누구나 피하기 어렵습니다. 크신 하나님을 만나 거기서 깨달아도 속히 잊고 행하지 않으면 그는 받은 복을 거머쥐지 못하게 되고 이는 마치 애써 구한 소금을 음식에 넣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맛을 내는데 요리를 말로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귀로 들어 머리로 알고 다시 가슴으로 느껴 감동하면 팔다리를 움직여 감동한 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귀만 커서 머리에 가득 각종 설교 다 들어 속으로 설교품평회를 열면서 행함이 없으면 야고보는 말합니다. 죽은 믿음이 아닌가? 몰라서 못하는 것보다 알고 안 하는 것 옳지 못합니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관계에서 깨닫고 깨달은 것 행하는 복까지를 관계의 복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만난 저와 여러분 주신 복음이 우리의 육체를 통해 반드시 행함으로 증거되길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으로 주님말씀하신 팔복을 간단하게 요약하면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과연 복이란 무엇인가? 큰 차타고 큰 집에 살면 복인가? 마태복음 5장으로 갑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소유. 영생의 복음이 채워지기 합당한 텅빈 심령이길 축복합니다. 특별히 복음을 향한 굶주린 마음은 말씀을 향해 가난해야 합니다. 이것저것 가득차서 그것들로 복음을 평론하려는 잡학다식한 것은 이미 순결성이 오염돼있는 것이고 머리부터 청소해 성전이 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천국은 주의 다스림이 머무는 바로 거기를 말하는데 심령 안에 뭔가 공허한 잡학으로 가득하면 내부 수리해서 주님나라 이루는데 많은 세월과 눈물이 필요합니다.
2) 애통하는 자, 위로를 받음. 골고다언덕을 오르시던 주님이 뒤따르며 우는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몸과 환경 때문에 울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 내면의 불찰과 미숙함과 불순중과 불신앙과 탐욕과 이기심을 놓고 울어야 합니다. 특별히 이러한 악이 대를 잇지 않도록 주님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3) 온유한 자, 땅을 기업으로 받음. 언어생활 중 주어가 항상 나, 내가 되는 자아를 완전히 버리려는 이는 겸손과 온유가 무엇인지 다소 알게 됩니다. 자신을 비우고 내면에 그리스도를 모시면 그는 주장과 소견을 소리쳐 내지 않게 됩니다. 아집과 주장을 버리고 복음이 나를 주장하도록 원할 때 주님은 필요를 따라 땅 곧 활동무대를 넓혀 주실 것입니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배부를 것임.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의로운 삶을 선택할 때 주어지는 여러가지 불편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절히 원할 때 그 소원 너무 간절하여 목이 마르다는 뜻이며 그 어려움을 도리어 거룩에의 기쁨으로 승화시켜 살아가는 경건한 모습을 말합니다.
5)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김을 받음. 주께서 우리를 가엽게 여겨주시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 멀쩡하게 앉아 예배할 사람 하나도 없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영혼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슴이 저며 옵니다. 하나님에겐 손주가 없습니다. 다 아들이요 딸이며 복음 앞에선 모두 씨가 되는 아들인 줄 믿기 바랍니다. 내 자녀 내 가족으로 보면 눈물겹지 않은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6) 마음이 청결한 자, 하나님을 볼 것임.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죄로 얼룩진 게 없길 소원합니다. 깨끗하고 말갛게 소제된 마음에 복음이 아로새겨지길 축원합니다. 복음은 예수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육화된 보이는 말씀이었고 그 말씀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
7) 화평하게 하는 자,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음. 하나님은 사랑으로 모두가 하나되기를 항상 원하십니다. 범죄만 아니라면 약속붙잡은 언약의 백성들, 교회는 언제나 하나가 돼야 합니다. 늘 듣는 말씀입니다. 화평은 먼저 자신 안에서 이루기 원합니다. 바울사도조차 안에서 두 법이 싸운다며 절규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천국이 그들의 것임. 의, 곧 복음으로 인해 박해받거나 생명을 바치면 천국을 소유한다는 말씀입니다. 중국의 고은은 삶을 고통의 바다라고 했습니다. 삶은 사랑이고 사랑은 통증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아파도 행복합니다. 어차피 아픈 인생이라면 영원한 복음을 위한 고통이기를 바랍니다. 벧전3장에는 같은 고난이라 해도 의로 인해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악으로 인한 고난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고난과 불행은 대부분 무지와 허물과 죄로 인해 시작된 것입니다. 육신의 허물로 받는 고난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이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의를 위해 박해가 있다면 결코 피하지 말고 의연하기를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천국을 소유하는 일이며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특혜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는 복음이십니다. 교회는 복음을 주제로 모이는 구원받은 택한 무리들의 집단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복이라는 주제가 다시 핵심이 됩니다. 이 복은 눈에 보이는 복을 우선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복을 강조하면 기복주의가 되고 그 복의 뿌리를 찾아 거기 부합되지 못하는 자신을 아파하면 복음주의가 됩니다. 오늘 받아먹어 삼킨 말씀이 우리의 신앙체질이 되기 바랍니다. 땅에서 복을 원한다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주님말씀에 잡혀 노예되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자신의 삶에 복의 기초가 된다고 확신하시면 가슴에 손을 얹습니다. 제가 기도합니다.
'주일강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5.09.13.주일예배<민27:1-11(6-11).슬로브핫의 딸들> (0) | 2015.09.13 |
---|---|
2015.09.06. 주일예배<창15:1. 여호와는 성도의 방패, 성도의 큰 상급.> (0) | 2015.09.06 |
2015.08.23. 주일예배<민29:1-6.<28-29장> 제물과 제사와 헌신> (0) | 2015.08.23 |
2015.08.16. 주일예배<행27:22-44.(24~25) 한사람도 잃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0) | 2015.08.16 |
2015.08.09. 주일낮예배<롬10:4-15 믿는 모든 자에게 허락된 구원> (0) | 2015.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