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09. 주일낮예배<롬10:4-15 믿는 모든 자에게 허락된 구원>
우리민족은 우리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우리하나님, 우리아버지, 우리집, 우리학교, 우리아들, 심지어 아내조차 우리아내라고 부를 정도로 대부분 소유격에 내가아니라 우리라는 말을 즐겨합니다. “우리”라는 말은 울타리의 울에서 온 말이 그 말을 하는 이나 듣는 이가 한 울타리안의 한 식구라는 정겨운 공감대를 느끼도록 합니다.
본문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무리중에도 민족주의 색채로 인해 선민사상과 우월감을 버리지 못하는 유대인들과 반면 온 인류를 품으신 예수님에 대한 죄인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종교적 민족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질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믿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출현은 왜 우리에게 복음인가를 살피며 은혜를 나누기로 합니다.
본문 4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아멘
1.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십니다.
본문이 증거하는 바, 율법의 마침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1)예수그리스도는 복음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입술을 열지 않아도, 병자의 몸에 손을 얹지 않아도 그분은 복음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죄인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은 골고다언덕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끌어안고 그 죄값으로 처절한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이미 예수그리스도는 복음입니다. 믿기를 축원합니다.
아기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이사야선지자는 평강의 왕(사9:6)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하나님을 떠난 원죄로 인해 한시도 편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막힌 담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희생양으로 드려서 인간의 죄를 청산하시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화목을 보장하셨습니다. 즉 율법으로는 결코 의로울 수 없다는 이 사실 앞에 주께서 이 난제를 몸바쳐 해결하신 것입니다. 롬3:10-12절에선 시14장 말씀을 인용해 이렇게 지적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그렇습니다.
2) 예수그리스도는 의, 그 자체입니다. 율법으로는 결코 이룰 수없는 의를 누구라고 주 앞에 서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의로 가는 길이요, 의의 본질이요, 그리고 그리스도는 의로 율법의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셨다는 것으로 이는 죄의 삯을 요구하는 율법 앞에 십자가로 죄 문제를 남김없이 갚아 치르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는 완전한 의로 나타나셔서 우리의 의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제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평강과 공평이 영생과 함께 주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의는 평강이요, 또한 공평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즉 모세의 율법에는 행위로 인하여 얻게 되는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적인 죄성으로는 결단코 행위로 인한 의로움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을 잡아 드리는 번제가 계속되어도 죄는 여전히 인간을 평생 괴롭힙니다. 범죄가 있는 한, 진정한 평강이 없습니다. 공평도 없습니다. 모두 죄의 산물입니다. 끝내 행위로는 의로워질 수 없는 게 인생이라면 이제 행위로 의를 구하는 일은 소용이 없게 됐습니다. 히9:12절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짐승의 피로 속죄의 희생물을 삼았으나 이 속죄제사도 차츰 타락했습니다. 성전에서 제물용 짐승을 매매하며 거기서 제사장들에게 뒷돈이 오가는 등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됐다는 주님의 경책을 받게 됩니다.
아담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난 후 인간이 육체로 있는 한, 인간의 죄악은 결코 줄거나 시들지 않습니다. 다만 방법을 달리하며 더욱 교묘해졌을 뿐입니다. 이제 죄와는 마주할 수 없는 의의 하나님이 죄인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끓어오르는 어버이의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죄인과는 상종하시지 않는 의와 평강의 왕이십니다. 죄인과는 화목할 수 없어 인생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의의 하나님은 불의한 죄인과 마주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로 이 땅에 퍼뜨려 놓으신 인생들을 위해서 스스로 희생할 결단을 하신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의 계획은 이미 오래 전에 하신 것이고 그 아들을 보내실 때 400년간이나 침묵하셨습니다. 구역과 신약사이의 침묵기 400년은 십자가의 결행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죄짐에 눌려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죄인들, 빛없고 희망없는 목숨을 연명해야만 했던 인생들, 결코 자력으로 의로워질 수 없는 인간이라면 우리에게 누군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갚아줄 은혜의 손길이 절실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손바닥 보듯이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인생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해서 죄인들을 구하지 않으시면 당신이 창조한 이 피조계에 아무런 소망과 의미가 없다는 걸 아십니다. 홍수로 쓸고 유황불로 태워도 인생의 죄악은 근본적으로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의의 본체이시요, 의의 길이신 주께서 인생의 근본 죄악의 문제를 친히 해결하시러 오셨는데 이때 하늘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라는 찬송이 울려납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은 그 높으신 보좌를 뒤로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름으로 육신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죄인과 꼭 같은 육체를 입고 죄문제에 나선 겁니다. 죄로 멀리 떠난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지성소의 휘장을 찢어 여신 뒤 친히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녀와 만날 하나님의 기쁨은 예수님의 몸으로 당할 모진 수난과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골고다언덕에는 치욕과 영광, 그리고 아픔과 기쁨, 사망과 영생이 함께 얼크러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 고개를 떨어뜨리는 순간, 모든 고난과 치욕은 사라지고 사망권세를 물리친 부활의 승리와 대속의 기쁨만이 영원히 남게 됐습니다.
본문 9-10절을 함께 읽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2.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며 입술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1)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릅니다. 구약의 율법시대가 갖던 모든 율례와 그 행함에 따른 의는 신약에서 예수님의 은혜인 오직 믿음으로 의에 이르러 구원의 도를 성취하는 새 계명으로 집약됩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율법에 이른 명령을 반드시 지켜 행해야만 죄를 면하고 의에 이르던 것들이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하여 오직 그 십자가의 대신 속죄함, 그리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하나로 의에 이르러 구원받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지상의 모든 인생들은 구원받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곧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성육화된 영광, 영생의 길이요. 의의 본질이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겁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면 그 의, 즉 믿음의 성취가 입술의 고백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2) 입술로 그리스도를 시인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 후 입술로 고백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고백이 구원을 이룬다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실존이 내 구원이 된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고백이 필요한 이유는 마음 외에도 세상천지에 내가 구원의 주를 높이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만 하는 사랑은 무기력합니다. 입술로 고백해서 증표를 삼고 확신과 확정함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사람도 결혼하려면 하객에 둘러싸여 인정받습니다. 그렇게 승인되면 이제 그 결혼이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님을 선언하게 됩니다. 두 가정의 연합이요. 나아가서 많은 친지이웃의 보증을 얻어내는 확정의 과정을 거쳐 든든하게 세워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도 이처럼 회중과 세상 앞에서 언제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원주로 고백하여 확정하는 일은 그리스도 앞에 매우 아름답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대중 앞에서 공개된 믿음을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언제 어디서고 고백하는 믿음이길 바랍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3. 구원은 모두에게 오직 믿음으로 열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구원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이방인이라도 예수그리스도를 시인하고 고백하면 선민이 되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놀라운 비밀이 신약시대에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종교적 민족주의나 선민우월의식에 젖어 허망한 종교에 빠져있는 이스라엘과 유대교를 향하여 우리는 도리어 선교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롬11:20-21절에선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안 믿으면 선민도 꺾어 버리실 것이니 두려운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이방인도 믿으면 든든히 세워주신다는 전 인류를 향한 구원의 확장을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끝으로 본문 13절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에서 “누구든지”의 범위, 즉 구원의 보편성, 구원이 무한한 범위를 살피기로 합니다.
1)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학식이 풍부하거나 무식한 자나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입니다. 가진 재산의 여하에 상관없고 학식과 지식에 전혀 무관한 게 구원의 범주입니다.
2) 영혼과 육체가 건강하거나 병들었거나 무관하게 누구든지입니다.
3) 어느 나라, 어디서 누구의 자손으로 태어났든지 무관하게 누구든지 입니다. 동서양, 인종과 민족에 무관한 출생과 신분에 대한 구원의 보편성입니다.
4) 아홉시에 불렀던 열두시에 불렀던 부름 받았다면 부른 시간에 무관한 누구든지 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시간의 초월성입니다.
5) 사상과 학습과 가치관과 인격 등 정신체계와 무관하게 누구든지 입니다.
6) 모든 경계를 무너뜨린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이지만 단 하나, 하나님의 선택의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한 자에 한한 제한속죄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구원의 보편성, 즉 온 세계 만민에게 두루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속죄은총은 오직 우리구주, 다시 사신 부활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모든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그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선 인간의 국경도, 인종도, 학력과 인격과 재산도, 부르신 시간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기뻐하신 모든 자들, 곧 믿는 백성에게 열어주신 구원의 도로 누구나 믿음으로 가는 천국의 길이 열려 있는데 이 길은 좁은 문 예수그리스도로 열린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구원에 관련해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를 바르게 잘 믿어서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자자손손 대대에 이르도록 저 세상 하나님나라, 천국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구원받은 백성의 복된 삶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의 증거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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