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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5.07.19. 주일낮설교<빌3:12-14. 푯대를 향하는 비전방주>

by 설렘심목 2015. 7. 20.

2015.07.19. 주일낮설교<3:12-14. 푯대를 향하는 비전방주>

 

엊그제 송구영신예배드린 것 같은데 벌써 반이 지나고 7월도 다 갑니다. 쏜살같은 세월이라고 했는데 참 쏜 화살 보이지 않듯 한주간이 고속철 열차 지나듯 합니다.

베잠방이에 아침이슬, 시방까지 눅눅한데 벌써 한낮 지나 어느새 뉘엿뉘엿 해저물어 가는 육체 뒷손질에 아쉬움만 가득하네청년시절이 엊그제 같고 군함타고 망망대해를 떠가며 흙냄새를 그리워하던 일이 며칠 전 같은데 벌써 손주가 내년에 초등학교에 간다니 세월 막을 장사가 없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것 네 가지가 있습니다. 입으로 한 말, 쏘아논 화살, 흘러간 세월, 놓쳐버린 기회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두 구절은 쏘아논 화살, 쏜살같이 흘러가는 세월위에 우리의 헌신된 삶이 갖는 목표가 어떤 것인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날들을 어떻게 계획하고 어떠한 마음으로 맞이할 것인가를 말씀가운데 함께 발견하기 원합니다. 본문 12절 앞부분을 함께 읽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1. 완성은 예수께만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자신의 모든 상태를 미완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아니라도 인생은 언제나 미완성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의 본질 자체가 죄악이고 죄악은 언제나 부족을 그럴싸한 것들로 위장하게 합니다.

19:30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하신 후 죽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 이루신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뿐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아직 다 구하지 못한 사역의 열매와, 그리고 다 붙잡지 못한 구원의 도 앞에서 현재와 과거와 미래에 대한 보다 선명한 개념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잡은 줄로 알지도 않는다는 바울은 시간의 개념에 있어서 다분히 미래 지향적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늘 이루어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인 사고방식과 고백에서 바울이 매우 진취적인 의식의 소유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2. 예수운동은 중단없는 전진입니다.

 

그렇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주님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평생 다해도 다 못할 거룩한 숙제가 있습니다. 결코 다 할 수 없는 구원사역에 그 끝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1:24)”이란 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구원의 완성가운데 아직은 성화되지 못한 당신의 백성에게, 남겨두신 거룩한 과업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는 일로 우리는 중단없는 성화의 전진을 하루도 쉬지 않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전투요, 성도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도의 영적상태에 완충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붙잡혀 있든지 또는 마귀에게 붙잡혀 있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도 아니고 사탄도 아닌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있을 때도 알고보면 악한 영에게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 나는, 내 이름으로 위장한 마귀의 친구일 뿐입니다. 내 생각과 주님의 명령이 서로 부딪치면 즉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탄의 계략에 속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흔히 사탄과의 큰 전투에서 이긴 자가 스스로와의 작은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을 종종 보는데 이는 적이 내안에 교묘히 숨어 있던 것을 발견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숨어 있다가 스스로 선한 척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타나면 이것을 위선이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신 명예대신 자신의 이름을 그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 죄인들은 뭐하나 제대로 이룰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앞에 모두 기꺼이 동의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뭐하나 변변한 게 없어도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노래하며 살아갈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과 그 중단없는 예수운동이 저와 여러분처럼 부족해도 실망치 않고 나아가는 믿음의 백성들을 통해 이루신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소망과 주신 환상이 있는 사람은 결코 그 자리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육체도 호흡을 멈추는 순간 부패하기 시작하듯이 믿음은 머무는 순간 세상물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물도 흐르지 않고 고여 있을 때 썩게 되고 기계도 사용하지 않고 세워두면 녹슬기 시작합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이 말하기를 성도가 입은 갑옷은 등판이 없다고 했습니다. 갑옷은 전진할 때 사용하는 것이지 비겁하게 후퇴하는 등 쪽에는 입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쳐서 쉬고 싶어도 중단없는 예수운동은 변함없이 앞에 놓인 사명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에도 함께 일할 제자를 찾고 계십니다. 번번히 선포되는 주님의 뜻이지만 주님은 능력있는 자보다 순종하는 자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머리좋은 사람보다 신의 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눅9:62절에서 말씀하기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주 앞에서 전진하는 사람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1) 과거를 교훈삼되 과거에 매이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능력자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비굴함이 과거의 두려운 기억으로 시작됐다면 겸손은 과거의 실패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에 눌려서 열등감으로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는 두려움은 더 이상 겸손이 아니라 자기학대요, 자기기만입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학대하는 사람입니다. 불러주셔서 꿈과 비전을 주신 약속의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2) 언제나 현재에 성실합니다. 전진하는 사람의 특성 중 현재에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과정 중에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일단 손을 댄 일에는 최선을 다 합니다. 현재란 내가 손 쓸 시간도 없이 순간적으로 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는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속에서 쉬지 않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에 성실하다는 것은 아름다운 추억과 귀한 미래를 동시에 열어가는 위대한 창조적 행위입니다.

3) 미래는 확신으로 채웁니다. 전진하는 사람은 그 미래가 확신가운데 소망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하고 있는 일에 자신감이 있습니다. 분명한 목표가 세워져 있습니다. 과정의 어려운 일도 치를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아 늠름하게 견딥니다. 미래에 이룰 크고 놀라운 결과에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확신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으로 출발하는 대단한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비전성도 여러분. 우리는 유약해도 주님은 강대하십니다. 우리는 지칠지라도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환경따라 감정따라 변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불변, 약속을 향해 나아가십니다. 우리는 불완전해서 다 이루지 못해도 주님은 어떤 일도 다 이루십니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 교회운동의 특성입니다. 이 교회운동에 누굴 부르시고 어떻게 사용하신다고 했습니까? 부족한 자를 부르셔서 과거를 교훈삼되 과거에 매이지 않는 사람되게 하십니다. 부족한 사람을 부르셔서 언제나 현재에 충실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부족한 사람을 부르셔서 미래를 확신으로 채워주십니다. 부족한 저와 여러분은 할 수 없어도 우릴 부르신 주님은 우릴 키우시고 가르치셔서 주의 나라 위대한 일에 귀하게 사용하실 계획을 다 이루실 줄 믿습니다. 오직 순종함으로 주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귀한 일꾼들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