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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5.08.16. 주일예배<행27:22-44.(24~25) 한사람도 잃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by 설렘심목 2015. 8. 16.

2015.08.16. 주일예배<27:22-44.(24~25) 한사람도 잃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우리는 사도바울의 행적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하는 인생들의 동의를 기다릴 틈도 없이 일방침입으로 결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의 소명도 그러했지만 사역의 현장마다 하나님이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절실히 알게 합니다. 오늘 본문도 바울의 생명을 아끼신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한 모든 자들을 다 구원하시는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길위에서 성령의 강권적 부르심을 받은 뒤 기독교박해자에서 기독교선교사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였습니다.

이후로 바울은 초지일관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며 평생을 바칩니다.

 

본문의 배경시점은 바울사도가 3차에 거친 전도여행이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몇 번의 종교재판에 이어 로마로 호송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을 적고 있습니다. 결국 어찌하든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바울의 목적은 행23:11절의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하리라.”는 성령의 예언을 이루게 됩니다. 그것도 손발이 묶여 군사들의 호송을 받아서 가는데 이는 바울의 생명을 보호하시면서 아울러 로마군사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아그립바왕과 베스도총독은 바울의 변론을 듣고 석방하고 싶었지만 이미 바울이 가이사황제에게 상소를 한 터라 로마로 호송군사들을 붙여서 보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바울사도가 탄 배는 유라굴로라는 큰 풍랑을 만나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바울을 향한 계획에 의해 이 배의 모든 사람들을 구하십니다. 바울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어떠한 일입니까? 본문 23-24절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1. 두려워하지 않도록 확신을 주십니다.

 

이 땅에 모든 영혼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 외 이방인의 사도로 바울을 선택하셨고 바울을 변화시키신 뒤 바울의 전도를 위하여 바울에게 확신과 권세와 능력을 주셨으며 바울을 늘 보호하셨습니다. 바울과 죄수 및 간수와 군사의 일행이 탄 배가 풍랑에 밀려 익사직전 바울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미래와 생명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아무런 보장이 없으니 불안한 것입니다. 바울이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아래 바울이 가이사황제 앞에 서서 복음을 당당하게 증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가이사황제앞에서 복음을 증거해야 할 중대한 사명 때문에 죽거나 다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환경의 위협도 바울에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앞에 도구로 서있는 바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까지 어떤 것도 여러분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런데 환경이나 사람이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자는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확신 없는 믿음이 스스로와 하나님을 동시에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결코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염려와 걱정에 이미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걱정근심에 길들여진 사람은 오히려 아무 근심거리가 없이 평안할 때 그 평안이 두려워집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면서 하신 첫 음성이 샬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26:17-19절에 보면 이스라엘백성 앞에 대적을 두어 두렵게 하신 것은 깨달아 하나님말씀에 순종하게 하려 함이라고 증거합니다. 한편 창 35:5절에서는 야곱일가가 세겜땅에서 디나의 일로 도망칠 때 하나님께선 야곱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면고을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고 했습니다. 마크트웨인은 유혹을 물리치는 가장 확실한 무기는 겁, 곧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두려움을 제외하고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성경은 충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의 원인을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부족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려워 떠는 자에게는 이미 상대방에 대한 친밀과 사랑과 신뢰대신 패배감과 죄의식과 단절감만 남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어느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제자들이 찾아와 울면서 세상에 이런 원통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그랬더니 소크라테스는 웃으면서그럼 내가 꼭 죄를 짓고 여기 갇혀야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신념이 있는 사람은 고통중에도 억울함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신념에 비하겠습니까? 우리에게 분명한 믿음이 있다면 두려움은 반드시 사라집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 믿음, 믿음이 능력입니다. 이제 이 시간 이후 다시는 자신이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기 바랍니다. 다만 능력의 하나님을 믿기 바랍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그 믿음이 믿는 자의 능력인 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믿는 대로 능력이 될지어다. 아멘.

 

30-3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2. 한사람도 남김없이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2-4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배에는 사공, 곧 선원이 전문가입니다. 바울의 일행이 탄 배는 심한 풍랑을 만나 생명을 건 사투를 벌이는데 바울사도가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영의 권세로 배안에 있는 모든 자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하고 여러 지시를 하며 이끌어갑니다. 선원들은 이제 살아남기가 틀렸다고 판단합니다. 배에는 비상시 배를 포기하고 탈출하기 위해 작은 구명정이 준비돼 있습니다. 그러나 구명정의 숫자는 지금 모든 승선자 276명을 감당하기엔 부족한 숫자입니다. 선원들은 슬며시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한눈에 모든 상황이 보입니다. 군사들에게 구명정의 줄을 끊어버리게 지시합니다. 모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지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네들끼리만 도망치려 했던 사공들에게 바울은 한마디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이는 바울의 신분이 죄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은 누구의 잘잘못을 헤아릴 때가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원이 해야 할 막중한 사명과 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잘잘못보다 우리의 영혼을 더욱 사랑하시는 주님을 찬송합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들, 곧 우리가 해야 할 일들 사명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부족하고 못난 우리, 죄수와 같은 우리를 고치셔서 반드시 귀한 일을 이뤄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원들이 탈출에 성공한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몰래 도망했을 경우, 성공했다하더라도 바울과 나머지 일행은 모두 다른 방법으로 무사히 상륙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그 일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몰래 도망쳤다면 거긴 피할 곳 없는 섬이기 때문에 모두 잡혀서 처형당했을 게 뻔합니다. 하나님은 한사람도 버리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24절에서 하나님의 사자는 분명히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네게 주셨다는 것은 네가 받은 선물 즉 전도의 열매로 주셨으니 모두 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선원들은 탈출에 실패했습니다.

선원들의 실패는 생명을 구한 일이 되었습니다. 탈출에 성공했다면 그들은 뒤따라 상륙한 군사들에게 죽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안에 붙잡혀 있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손에 붙들려 있기만 한다면 우리들의 실패가 때로는 다시 살아나는 기회가 되는 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단 한 생명도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33-35절을 함께 읽습니다.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 구원받은 자에게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희 중 머리털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다고 한 바울의 보증이 저와 여러분의 구원에 있어서 평생 큰 소망의 메시지가 되기 바랍니다. 바울사도는 배의 무게도 줄일 겸 그동안 절망과 멀미에 지칠 대로 지쳐서 14일간이나 굶어 초죽음이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제시하여 믿게 한 뒤 음식을 권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능력이 있어서 모두 바울의 말을 신뢰하여 힘을 얻었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음식을 먹는데 바울이 축사하고 떼어 모두가 충분하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밀을 바다에 버림으로서 배의 무게를 가볍게 했습니다. 배가 가벼워지면 그만큼 육지접근이 가까워집니다. 이들이 탄 배는 애굽에서 생산된 밀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까지 수송하는 화물선이었습니다. 밀을 버린 것은 풍랑이 일자 짐을 버린 뒤 사흘 되던 날 기구들을 버린데 이어 마지막 식량마저 버리는 특단의 조치로서 이는 바울의 선포에 따른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구원이 이른다는 믿음없이는 절망과 멀미를 이기고 일어나서 음식을 먹을 수도 없으려니와 남은 식량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축사를 받은 것을 보아 이미 이들은 모든 처사를 바울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고 보아야합니다.

 

3. 생명을 구원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식량마저 바다에 던져버림으로 배의 무게를 줄이는 장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22절을 함께 읽기로 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의 구원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영혼과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것도 우리들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인생 80평생 안에 갇힌 작은 순간이 아닙니다.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 연합됨으로 영원하게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생입니다. 그 영생을 위하여 때로는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팽겨치시는 무게나가는 배를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아쉬워했습니까?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목적지에 쉽게 다다를 수 있습니다. 바울일행의 배는 무게를 더욱 줄임으로서 해안에 한발이라도 가까이 다가서려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지인 구원의 하나님곁에 다가서기 위해서 어떤 것들을 버려야 합니까?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무거운 짐을 무엇부터 내려놔야겠습니까? 삶의 능력인 믿음을 구하기 위하여 무엇부터 포기해야 할까요? 우리 삶의 현장에서 번번히 우리를 힘들게 하며 내안에 너무 가득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 꼭 포기해야 할 것들을 몇 가지 살펴보며 말씀을 정리합니다.

 

1) 알량한 우리들 자존심과 특권의식과 야망과 안락의 포기입니다. (일대일성경공부복습)

내가 이래뵈도 누군데? 용서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더없이 존귀한 주의 자녀된 거룩한 인생입니다. 자존심을 죽이면 하나님주신 건강한 자존감이 다가옵니다. “난 너희와 달라, 구원받은 천국시민이야.”아닙니다. “누구보다 못나고 악한 나를 구원하시다니.” 특권의식이 죽어야 겸손이 다가옵니다. 편견이 죽으면 지혜가 다가옵니다. “이건 내가 반드시 성취할거야.”아닙니다. “이건 분명 주님이 하실 거야.”야망과 욕심이 죽으면 믿음과 영생의 소망이 다가오며 안락이 죽으면 헌신의 기쁨이 다가옵니다.

2) 탐심과 이기심과 시기와 분노의 포기입니다.

더많이, 더 탁월하게 일하고 싶고 드러내고 싶은 욕심은 탐심이 되어 시기와 분노를 만들어냅니다. 어떻게 해서든 내가 이일을 바로잡고 저 사람을 반드시 고쳐줘야겠다는 생각이 지나치면 안타까움을 넘어서 분노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주님도 주님을 배반한 가룟유다를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겟세마네동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나도 나를 고치지 못하는데 우리가 누구를 고치겠습니까? 다만 울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응답이 됐든 안됐든 주를 신뢰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역사는 늘 선하십니다. 사람의 생각과 달라서 가장 합당한 주님의 시간에 가장 선한 주님의 방법으로 일하시는 줄 우리가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도록 바울을 부르셔서 사도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보내실 때 가장 안전한 미결수의 몸으로 보내십니다. 바울을 택하신 하나님이 바울의 생명을 아끼셔서 유라굴로풍랑 가운데서 바울과 함께 한 모든 죄인들을 살리셨습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바울과 같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어떤 이는 설교로, 어떤 이는 직업을 통해서, 어떤 이는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방법은 달라도 전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민족과 취향과 언어는 달라도 우리는 모두 구원의 주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전파하다가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습니다. 가정마다 직장마다 개인마다 복된 소식, 복음을 사랑하고 전파하는 사명 때문에 복음이 보장하는 복된 삶의 주인공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대로 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