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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5.05.24. 주일오후예배<창38:1-11. 유다의 실패>

by 설렘심목 2015. 5. 29.

2015.05.24. 주일오후예배<38:1-11. 유다의 실패>

 

유다는 레아가 낳은 4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어여쁜 라헬대신 속아서 얻은 언니 인물없는 레아의 아들입니다. 야곱의 아내들 네 여인은 야곱 한사람을 남편으로 갈등과 암투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들들의 신앙교육에 빈틈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유다는 1절과 2절에서 소개하듯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취해 불신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유다의 불신결혼은 유다의 불행과 수치의 시작이었습니다. 아들을 셋씩 낳았으나 본문은 장남 엘을 여호와 목전에 악해서 죽은 자로 소개하고 있고 차남 오난은 형수의 침실에 들어갔다가 씨를 바로 드리지 못한 불순종으로 하나님 앞에 죽음을 당합니다. 두 아들이 연거푸 한 며느리 앞에서 죽자 유다는 막내아들 셀라를 주지 않으려고 며느리 다말을 친정에 보내며 어린 막내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형들처럼 막내도 죽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고 11절에서 밝힙니다. 본문 1-11절까지 유다의 불행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듣고 은혜받는 시간되기 바랍니다.

유다의 불행 그 출발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1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1. 하나님이 안 계신 곳, 가지 않아야 할 곳을 간 유다입니다.

2.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만나지 않아야 할 사람을 만난 유다입니다.

 

3. 하나님을 떠난 결과가 유다와 유다의 자녀에게서 일어났습니다.

 

즉 우리의 평생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인생행보만이 가장 확실한 길이요, 보장받는 삶이라는 것에 모두 아멘입니다.

 

유다는 비교적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요셉을 팔아넘긴 일도 세월이 지나면서 잊어 갈 즈음 형편을 따라 형제들은 서로 떨어져 살게 됩니다. 유다도 그런 이유에서인지 부모형제 곁을 떠나 아둘람사람 히라에게로 갔습니다. 오늘날에는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당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백성이 씨족가문을 떠나는 것은 이방인의 종교에 오염될 확률이 높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아직도 문제가 많습니다. 대학입시 수능고사가 끝나면 어느 대학을 지원할 것인가를 놓고 머리싸움, 눈치싸움을 하게 됩니다. 한 인간의 미래와 연결된 전공을 결정하는 일에 개인의 특성보다는 지능지수나 학업수학능력이 우선시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바람직하기는 성실도와 취향과 특성이 적극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정확히 찾아내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보통 부모들이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할 때 행복의 척도를 남보다 잘먹고 잘사는 것에 집착할 뿐 바르게 살고 보람있게 사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조사발표에 따르면 지금도 나이든 부모들의 생각은 자녀들을 평가할 때 이웃의 자녀와 비교해 누가 더 큰 차를 타느냐, 몇 평에 어디서 사느냐를 놓고 성공여부를 가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서 무슨 짓을 하든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 있다고 하면 모두들 부러워합니다.

 

우리 SFC 3 대입시생들에게 전에 제가 한 말이 기억이 납니다. 어디를 가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거기 하나님이 함께 계시냐가 중요한 것이니 명문대는 실력좋은 대학이 아니라 하나님거기 계시고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시는 좋은 사람이 있는 곳이 명문대라고 밝혔습니다. 흔히 말하는 명문대에 가서 이상한 친구만나 엉뚱한 사상 물들어 군입대한 학생가운데 월북하여 자살특공대 교관이 된 국군장교는 다 명문대출신이라고 합니다. 지금 평안북도 양덕군에는 북한군 특수요원을 키우는 양덕훈련소가 있습니다. 거긴 청와대, 국방부청사, 각군 사령부건물과 꼭같은 건물을 지어놓고 속옷부터 군복, 무기까지 국군과 같이 차려입은 특수병들이 맹훈련을 받는데 600명의 자살특공대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 훈련조교가 다름아닌 월북국군장교출신들이라고 합니다. 이 정도면 명문대가 아니라 망하는 문으로 들어간 망문(亡門)대학입니다.

 

현장의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게 우리 손을 꼭 잡고 계신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모르는 동네로 갔습니다. 자신을 불행의 수렁으로 이끌고 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다는 하나님을 모르는 곳에서 하나님을 전하기보다는 그곳의 이방신을 받아들일 확률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모르는 곳에 가서 하나님을 모르는 여인을 만납니다. 죄와 악은 하나님을 등진 채 형성된 모든 문화와 정서와 삶입니다. 악한 곳이 어딥니까? 악한 자들이 살고 있는 장소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약 30년 전에 서울 모처에 기가 막히게 잘지은 별장이 있었는데 헐값에 나와도 한동안 팔리질 않았던 저택이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밤마다 이상한 일이 생기고 귀신이 출몰하여 흉가로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건물보다 중요한 게 거기 누가 살고 있냐는 것입니다.

 

유다는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듯이 눈으로만 그 동네를 보았습니다. 영으로 타락한 곳에 우린 복음 들고 순교할 각오, 혹 그렇진 못해도 선교하는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유다처럼 눈에 보기에 괜찮다고 만나는 사람은 결국 내 영혼과 인생을 좀먹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유다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간 결과로 만나지 않아야 할 사람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상처럼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과 무관한 여인을 만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유다가 결혼해 세 아들 낳고 장남이 결혼할 때까지 제법 세월이 갑니다. 그 동안 유다는 하나님을 모르는 아내와 큰 갈등없이 살았는데 이는 유다부부사이에 신앙의 갈등이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유다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우유부단하여 충실치 못한 믿음으로 이미 유다는 불행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인아내를 전도하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 그 효과는 어김없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주로 엄마의 신앙은 자녀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다말에게 장가보낸 유다의 장남 엘의 믿음상태를 성경은 어떻게 표현합니까? 7절입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유다의 장남은 하나님 앞에 악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악했다는 것은 먼저 영적인 문제로서 신앙을 말합니다. 신앙이 잘못됐을 때 윤리나 도덕과 생활과 습관이나 성향이 잘못돼 갑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장남이 결혼 후 하나님 앞에 악했다는 것은 그의 신앙이 바르지 못했음을 말하고 그 잘못은 유다의 불신결혼이 원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없는 사람들은 잘못된 가치관에서 깨어나질 못합니다.

우리나라 전근대적인 가부장제도의 악한 권위의식이 그것이고 요즘 신세대들 가운데 입에 담기도 싫은 스와핑, 애인만들기 등은 불신가정이 저지를 수 있는 매우 위험천만한 윤리개념들인 것입니다.

 

유다의 아들이 하나님의 징계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관습에 따라 차남을 며느리 다말의 방에 넣어서 기업이 될 대를 잇도록 합니다. 그러나 차남 오난 역시 바르지 못했습니다. 8-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여기서 오난의 악행은 다름아닌 자기가 드린 그 씨가 자기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형수의 몸에서 형의 씨든 내씨든 가문의 혈통과 기업을 잇는다는 선한 마음대신 내 씨 네 씨를 따지는 계산은 얼마나 악하고 못된 생각인지 모릅니다. 오난은 그래서 죽었습니다. 말 그대로 백번 죽어 마땅한 죄악입니다. 오난의 이 악행 하나만 보아도 유다의 자녀교육은 완전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비극은 여기서 멈추질 않습니다. 유다는 두 아들이 며느리 다말에게서 죽어나가자 막내아들을 주지 않으려고 차일피일하다가 며느리의 변장수법에 의해 창기인 줄 알고 며느리에게 들어가 씨를 주게 됩니다. 11절을 함께 읽습니다.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유다는 모든 불행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알지 못하고 며느리하나 잘못 들어와서 두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막내아들조차 그 기분 나쁜 며느리 때문에 죽을까 염려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면 지혜도 떠납니다. 지혜라는 것이 있긴 한데 바르지 못한 자기 꾀에 불과합니다. 지혜는 위로부터 주신 것이고 자기 꾀는 자신의 유익만을 꾀하는 육체의 생각들입니다.

유다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과 만나 하나님을 떠난 가정을 이루고 불신앙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멀리한 대가를 자녀들의 비참한 죽음과 며느리를 취하는 가문의 치욕으로 치릅니다.

 

사랑하는 예배인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가야할 곳, 가고 싶은 곳은 언제나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당이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애쓰는 이들이길 바랍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디서든 불신자를 만나야 한다면 그는 전도대상자라는 것을 잠시도 잊지않는 여러분이길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여러분과 여러분 자자손손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그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 그 가정에 주의 평강과 풍성과 나누는 기쁨, 그리고 무엇보다 영생의 소망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