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03. 어린이주일설교 <왕상 1:5-6. 아도니야의 결국>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그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어린이주일입니다. 한 가정의 미래는 자녀를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국가의 장래도 그 나라 청년문화를 분석해보면 가장 정확하게 내다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미래는 기성세대, 곧 어른들이 어떻게 교육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은 가정이나 국가나 직장 어떤 공동체라도 마지막 승부를 거는 분야입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뭐가 어쩌니 해도 지금 잘먹고 잘사는 데는 우리나라 엄마들의 대단한 교육열에도 그 이유가 있음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겉보리를 삶아먹어도 자식들만큼은 끝까지 가르치려는 것이 우리나라 교육문화와 정신입니다.
그런데 잘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경제원리를 따라 우리가 어디까지 왔습니까?
우리들의 미래인 자녀들 교육이 잘되고 있다고 보십니까? 저들은 지금 철저히 개인주의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사이버세계에 몰입하는 세대에게 또다른 현장감있는 공동체의식을 부어줄 대안이 절실합니다. 내 자녀는 이제 다 컸으니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학교교육과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이 다 하지 못한 부분을 교회가 감당해야 하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모든 교육은 하나님의 감동인 말씀으로 행해질 때 가장 확실한 효과를 지닙니다.
여기서 잠시 자녀의 개념을 살피기 바랍니다. 자녀라 함은 몸으로 낳았건 영으로 낳았건 다 같은 귀한 자녀를 말합니다. 낳은 정보다 더 진한 것이 기른 정입니다. 우리교회 성숙한 믿음의 부모님들은 육의 자녀. 영의 자녀 가리지 않게 되기 기대합니다. 여러분의 예배자세와 믿음생활의 어떠함을 청년들과 자녀들이 지켜봅니다. 큰 부담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살펴보니 다윗이 아들 아도니야를 기를 때 한 번도 혼을 내거나 꾸짖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훗날 장성하여 후계자인 동생 솔로몬대신 스스로 높여 왕이 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즉 왕권에 도전해서 반역을 한 중범죄인, 역적이 됐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스스로 높이는 자는 비참해집니다.
권위와 세력은 주위에서 모아주고 밀어줘야 합니다. 그것을 보통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카리스마는 카라 곧 기쁨이라는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내가 스스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기쁨으로 그를 높여줌으로 생기는 권위가 카리스마인데 아도니야는 스스로 높였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이는 이 잘못된 인격이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그는 심히 체격과 용모가 준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똑똑하여 아버지 다윗에게 그렇게 특별히 야단맞은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겉보기엔 아무리 잘나고 훌륭해도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은 그에게 그래도 충고하고 고쳐줘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더욱이 어린이에게야 오죽하겠습니까? 아무리 영리하고 기특해도 여전히 어린아이는 어려서 야단맞을 짓을 합니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우니 차마 야단치지 못할 것입니다.
야단칠 때 야단치고 혼낼 때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합니다.
잠언(13:24)에는 <매를 아끼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하고 충고합니다.
23:13-14에는 좀 더 자세히 지적합니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얼마나 선명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싫은 소리 한번 안듣고 자란 아도니야는 결국 잠언말씀처럼 그 영혼이 음부로 내려가고 몸은 칼에 베어져 죽는 비참한 길을 갑니다. 오냐오냐 귀여움만 받고 칭찬 속에서만 길들여진 아도니야가 그 결과 대권을 탐냈다가 왕인 동생 솔로몬에게 죽은 것입니다.
자녀교육의 실패가 자녀의 죽음으로 극명히 드러난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것도 타인에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동생에게 죽었습니다.
자녀에게 야단치기를 주저한 다윗은 노년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고 사랑이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께선 그 다윗의 역사가운에 실패 몇가지를 증거함으로 귀한 믿음의 자녀인 우리들이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이렇게 간곡히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아도니야의 왕권도전 실패에 따른 죽음이 아닙니다. 아도니야의 실패는 왕좌를 탐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높인 것이었으며 그 교만은 다윗의 잘못된 자녀교육의 산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창조이래 지금까지 인류는 꾸준히 발전해 왔습니다. 그 발달의 원동력은 누군가를 감동시키려는 욕구였습니다. 애기가 첫걸음을 뗄 때 식구들이 “와, 걷는다, 걷는다.” 박수를 치고 기뻐하는 걸 본 아기는 더 감동을 주기 위해 자꾸 걸으려 합니다. 잘한다고 하면 몸생각 안하고 뛰어듭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으로 살아 가냐고 성도에게 물어보면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 역사학자의 대답은 감동하기 위해 역사는 만들어진다고 대답합니다. 맞는 말들입니다. 성도는 결국 하나님과 교회를 감동시켜드리기 위해 온몸을 불사르게 됩니다. 이 감동 중에 가장 위대한 감동은 나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내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보다는 더 나은 우리들의 후손들이 우리의 기쁜 가을추수이고 주님의 기쁨인 줄 우리가 믿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점인 올바른 자녀교육,
첫째. 자녀교육은 격려와 칭찬 뿐 아니라 경고질책과 엄한 훈계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칭찬받을 만한 일엔 칭찬하고 야단맞을 일엔 따끔히 혼을 내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 본이 되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부모의 모습은 어떠한 교과서보다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모라고 모두 모범일 수는 없습니다.
본이 되어야 하는 부모의 모습, 크게 두 가지만 제시하고 말씀을 마치렵니다.
1) 부모는 끝까지 정직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과 미숙을 자녀앞에 솔직히 시인하는 자세야말로 훗날 자녀들에게 뿌리깊은 정직성을 심어줄 것입니다. 자녀 앞에서 자신의 어리석음과 실책을 정직하게 인정하며 화목할 수 있는 부모는 위대한 부모입니다. 골로새서 3:21에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충고합니다.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받아야 할 자녀에게 부모가 미처 알지 못하는 놀라운 세계와 깊은 사려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숨겨서 체면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쓰기보다는 밝히 드러내고 흔들림 없는 자세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한 부모의 용기있는 모습에 도리어 자녀는 깊은 신뢰감을 갖게 됩니다.
이 본이 되는 모습에는,
2) 부부간에 친밀한 모습을 늘 확인시키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엄마는 아빠를,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아이에게 있다면 그 아이는 어떤 환경에서도 잘 견디는 훌륭한 사람으로 커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자녀는 극도의 안정감과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며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이유가 있어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아직도 자신의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백번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위하여 값없이 죽어주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빛의 자녀로 훌륭하게 키우고 복음의 위대한 전사가 되게 하는 일은 여러분이 죽어지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부부간에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되 그리스도의 긍휼과 인자한 마음으로 살펴주고 용서하기를 즐기고 잘 참으며 서운한 일을 속히 잊어버리고 고마운 일은 오래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한 여러분의 모습은 자녀에게 금보다 귀하고 큰 빌딩보다도 귀한 유산이 됩니다. 그러한 부모아래서는 자녀가 곁길로 가지 않습니다. 가더라도 신속히 돌아옵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 그리고 그 인격은 늘 한계에 부딪치기 때문에 무릎을 날마다 꿇으시기 축원합니다. 자녀교육의 성패도 알고보면 내안에 십자가사건이 부활의 영광으로 승리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예배인 여러분. 어린이주일에 나이에 상관없이 여러분이 많은 영육간의 자녀 앞에 살아있는 교과서임을 기억하시기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오직 정직한 고백으로 젊은이들과 인격적인 교류가 이뤄지기 바랍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양질의 교육입니다. 좋은 것만이 교재가 되지는 않습니다. 실패의 샘플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정직하게 실토하는 실패담의 고백은 듣는 후손에게 훌륭한 반면교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릎 꿇을 때 주님께선 십자가의 부활능력으로 저와 여러분을 자녀들 앞에서 높이 들어 귀한 귀감이 되도록 도우실 줄 확신합니다. 자녀들이 반듯하게 나아갈 것을 또한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으로 우리도 자녀에게 그렇게 예수님을 삶으로 고백하여 자녀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기쁨과 보람이 넘치시기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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