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03.부활주일설교<요11:25~26. 영원한 성도의 삶>
다시 사신 부활 예수그리스도, 영원히 사시는 우리 주님을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저와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죽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도 언젠간 반드시 죽습니다. 인간 뿐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분명히 한번 죽습니다. 이 엄숙한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무겁고 가장 중차대한 주제, 나아가 그 무게 그대로 기쁨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죽음이 왜 기쁨의 근거요, 중차대합니까? 인간에게는 가장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두려운 공포는 사실 그것만 이기면 그 두려운 공포의 분량만큼 놀라운 기쁨과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린 잘 압니다. 곧 죽을 사람에게 최고의 소식은 뭐라고 했습니까?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부활하신 영생의 주님소식이 우리에게 어느 무엇보다 큰 기쁨인 것은 저와 여러분 우리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 부활과 생명의 예수그리스도십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 사망소식 앞에 그녀에게 하신 주님말씀입니다. 부활이란 죽었던 것이 도로 살아나 효력을 발생해 활동하게 되는 걸 뜻합니다. 자동차등록원부가 밀린 세금 또는 범칙금이나 어떤 담보금에 압류돼 등록이 말소되면 밀린 부담금을 모두 갚기 전에는 죽은 차입니다. 이때 차의 등록을 되살리려면 자동차가 짊어진 모든 짐 곧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내면 자동차는 되살아나 운행할 수 있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효력이란 어떤 효력입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했는데 주님의 부활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죽지도 않은 이에겐 부활도 없습니다. 죽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부활입니다. 즉 주님에겐 이미 죽음이란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상관없는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한 삶은 곧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생명의 주관자시라는 것의 뚜렷한 증거로서 우리에겐 영원한 복음이 됩니다. 그런즉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효력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겐 그분의 영원한 사랑 안에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죽을 우리가 죽지 않고 영생하시는 주님께 연합되어 우리가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다는 것, 이게 복음이고 예수님의 존재이유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부활의 효력은 반드시 죽을 우리 성도들이 부활예수님을 따라 모두 부활한다는 것이고 이 부활은 단순히 살아나는 것을 넘어 그분의 사랑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가운데 살고 있는 이들은 그 사랑이 과거의 자신처럼 복음에 무지한 자들을 향해 증인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가고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은 닮아가는 것이고 사랑은 번식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5절 다시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죽어도 살 것입니다.
여기서 죽어도 산다는 말은 우리의 생명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남을 뜻하는 동시에 영혼이 살아나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에서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다만 생물학적으로 호흡하고 맥이 뛰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닮아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실존 그 존재의미가 사랑이듯이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면 그는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그 사랑을 위해 몸부림하게 됩니다. 그 몸부림이 결국 삶입니다.
26절입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3. 예수그리스도를 살아서 믿는 성도는 살되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이란 말을 다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합니다. 불신자의 죽음은 사실상 삶의 끝이지만 성도의 죽음은 진정한 사랑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시작돼 빈 무덤에서 증거됐고 지금 우리가운데 영원히 살아계시는 그것으로 만민에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자의 죽음은 완전한 종말이 아니라 불신에 대한 심판의 시작이고 성도의 죽음은 죽지 않는 영원한 나라의 시작인 것으로 부활절의 감동을 더합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마르다에게 하신 이 말씀은 온 인류가 들어야 하는 사랑의 메시지로서 죽음을 이기신 부활에 대한 주님의 선포입니다. 당시 나사로를 두고 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죽지 않는 영원한 삶, 영생에 관한 복음 즉 그리스도의 보혈로 영혼이 되살아난 자들이 주를 믿으니 영생하리라는 말씀으로 다시 새겨지는 부분입니다.
오늘 말씀의 큰 줄기는 부활과 생명의 예수그리스도에 이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죽어도 산다는 것이고 다음 살아서 믿는 성도는 살되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체를 훑어 중요한 요약하면서 마칠까합니다.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가장 오래되고 중대하며 또 영원한 부담과 두려움은 죽음이라는 사실에 누구든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무거운 과제를 단번에 영원히 풀어버리고 참기쁨의 소망으로 찾아오신 생명의 주관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모두 끝없이 찬양하고 높여드립니다.
잠시 지나는 이 사막 길 짧은 인생길이지만 예수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로운 소망의 역사가 열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소망의 핵심인 부활, 주님이 본을 보이신 부활을 기뻐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이제 묻습니다. 부활감사예배에 부활주님께 드릴 가장 큰 예물은 무엇인가요? 예, 장차 부활해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갈 우리의 몸입니다. 예배에는 예물과 함께 몸을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물은 다른 말로 보이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몸이 다시 살 줄 믿고 기뻐하며 몸을 드리니 주여! 받으신 줄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시며 드리신 줄 압니다.
결론입니다.
참으로 잠시입니다. 이 땅은 참으로 잠시입니다. 괴롭고 서럽고 외로워도 정녕 잠시 지나갑니다. 여기가 전부인줄 알고 예수님과 무관하면 영생도 천국도 없이 그냥 뵈는 대로 삭막한 세상을 희망없이 살다가 허망하게 사라질 세상입니다. 그 가운데 놀랍게도 우리가 주님의 부름을 받아 이제 영원한 성도의 삶을 보장받았습니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선물가운데 최고의 선물을 우린 받았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지만 그래도 소원은 이젠 진정 주님의 기쁨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우릴 구원하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남은 생애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무지한 인생들가운데 공로없는 죄인 우리가 구원받아 영생을 약속받았는데 간절히 바라옵기는 아버지여. 우리가 받은 이 영생구원이 어떤 것으로도 받을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인줄 우리가 믿습니다. 성도의 영원한 삶이 얼마나 큰 선물이고 얼마나 큰 기쁨인지 절감하며 주님의 부활에 감동하는 우리모두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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