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25. 주일낮예배<엡 2:21-22. 지금도 지어져가는 하나님의 교회>
교회는 여러 가지로 그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데 먼저, 교회는 택자들의 모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예배공동체, 신앙공동체, 예수로 인한 새생명공동체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줄여 예수를 삶의 목표로 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교회를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는 교회의 특성은 교회의 정체성이 어떠하든지 교회는 꾸준히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완성된 교회가 아니라 모두 건축 중인 미완성의 교회, 아직도 공사 중인 교회라고 해야 합니다. 완성된 완전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천상교회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교회는 완전하지 못한 인생들이 모여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이 모습도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어져가는 하나님의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곳인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교회는 메시야, 곧 예수를 만나 하나되는 곳입니다.
메시야의 신비한 정체성은 성삼위일체에 있습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존을 우리는, 교회라고 부르는 예배당과 공동체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다만 죄인인 우리의 신분으로는 만날 수 없습니다. 출33:20절에서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내 얼굴을 보고는 살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고 요14:6절에선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18:20절에서는 주님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 들 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 화목할 수 있는 길은 십자가로 우릴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만나는 길뿐입니다.
그리스어로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헬라어는 “에크”라는 “밖으로”라는 뜻과 “칼레오”라는 “부르다. 모으다”의 뜻이 합쳐져서 “밖으로 불러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교회, 엑클레시아란 “밖으로 불러내어 회중을 이룬 자”를 뜻하며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세속의 죄악된 무리로부터 경건의 양우리로 불러모은 택자들의 모임을 지칭하게 됐습니다. 불러내신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만나주시며 교제하고 화목함으로 그 기쁘신 뜻과 소원을 이루시는 곳, 거룩한 회중이 곧 교회, 에클레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클레시아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본질입니다.
롬12:5절“이와 같이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연합된 새 생명이 서로 지체가 되어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믿음의 깊이와 분량이 다르고 성향과 기질과 모양이 달라서 하나되는 일이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되어 서로 한 몸처럼 아껴주며 유무상통한다는 것은 결코 사람의 생각이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회의 전형을 손쉽게 찾으려면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들은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있는 자나 없는 자가 함께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모이기에 힘을 쓰며 필요를 서로 채워주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난 후의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기적인 인간의 본심으로는 결코 건강한 교회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함께 하시면 교회의 머리이신 주의 인도와 성령의 충만을 따라 그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즉 신령한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4:24절입니다.“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 교회는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신령하다는 말은 세속적, 혹은 육신적이란 말과 반대되는 말로서 성령충만, 곧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신령한 공동체, 하나님의 영으로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성령충만한 신령의 공동체라야 비로소 유무상통과 진실하고 경건한 교제의 기쁨이 가능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단체가 아니어서 많은 부분이 세상의 모임과는 매우 다릅니다. 재산이나 지위, 명예와 학식에 무관하게 형제자매가 되어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사와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관한 것을 기초로 하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탁월한 자라도 교회에서는 주눅이 들 수가 있습니다. 반면, 세상에선 비록 무능력하고 낮은 지위로 이름없이 살아도 교회에서는 대단한 영권으로 많은 성도들에게 추앙을 받고 품격있는 지도자로서 보람있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신령한 공동체에서는 당연히 신령한 사람이 앞서가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언제나 기도가 끊이질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대해선 비록 어눌하고 서툴러도 하나님에 관한 한 절대 게으르지 않으려고 결단하고 부단히 노력하며 가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령충만한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 위대한 구원역사를 펼쳐 가십니다. 달리 말한다면 하나님의 몸된 성전 안에서는 하나님께 더 많이 다스림을 받는 이가 가장 앞선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의 다스림을 넘치도록 받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가장 많이 받으려고 노력하거나 많이 받는 사람이 장자가 되는 공동체, 그러한 공동체가 신령한 공동체의 본래모습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신앙에 있어서 탁월한 자가 되시기 축원합니다. 다른데서는 다 양보해도 신앙문제에 관한 한 결코 양보하지 않는 으뜸성도가 되시기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신령한 공동체의 지체들입니다. 예수님이 머리되시고 우리들은 각각의 자리를 맡아 하나님의 몸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과 가까워지려고 애를 쓴다면 주님은 단번에 알아보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여러분을 향한 구원의 도와 거기 필요한 많은 증거들을 드디어 하나씩 둘씩 열어주실 겁니다. 그걸 사람들은 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악을 대신 청산하시고 만복의 근원이 되신 예수님, 신령한 공동체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 세상의 마지막 소망이신 예수님이 우릴 여기까지 불러주셨습니다. 부르셨으니 믿음주실 줄 믿습니다. 믿음주실 때 믿음에 필요한 모든 것도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로 늘 주님과 깊은 교제가운데 주님주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앞당겨 받으시기 축복합니다.
3.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 영생을 이루는 곳입니다.
요12:49-50절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교회의 운영은 당회장이나 담임목사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명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만일 목회자가 하나님의 뜻을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없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대로 결정하고 이끌어간다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라는 회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물어 진행되는 교회운동은 그 명령권자가 분명 하나님이시고 그 명령은 모두 영생과 연결되는 내용과 문제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 순간적인 인간의 생명을 합류시키는 일은 중간에 죄로 막힌 담을 헐어야 하는 일이 절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예수그리스도께서 몸을 던져 죄인과 하나님사이에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성경은 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신 계시의 책입니다.
그리고 계시의 내용이 결론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내용은 결국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천국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은 영생을 보장받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명령으로 알아 순종할 때 영생의 능력인 주님이 우리가운데 임하는 줄 믿기 축복합니다.
4. 교회는 지금도 지어져가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본문 21절과 22절의 끝이 각각 “성전이 되어가고...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정리되어있습니다. 이미 언급했지만 우리는 모두 본문에서처럼 아직도 지어져가는 진행형인 하나님의 집들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공사중”인 건축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비하고 미숙하고 부족하며 불편한 구석이 많게 마련입니다. 타락한 이 땅, 구원받아야 할 이 지상의 모든 교회는 그렇게 불완전한 하나님의 집들입니다. 그래서 늘 문제거리가 그치질 않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을 뒤로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복지로 가는 여정은 오늘 날 우리 성도들의 인생여정인 신앙행진과 같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은 선택받은 자답지 못한 채로 험한 사막을 갑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늘 불평하고 원망하며 심지어 툭하면 애굽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넘어지고 엎어집니다. 이러한 부끄러운 모습이 하나님의 교회인 저와 여러분의 실상임에 동의하신다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럼에도 우리가 늘 기쁜 찬송으로 하나되며 그 주신 구원의 감격으로 날마다 감사하고 환경을 넘어선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직도 우리들의 결론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학교서 시험치를 때 종료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시험지에서 손을 떼야 합니다. 종소리가 나는 순간 그 수험생은 점수에 관한 한 미련을 버려야합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종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끝없는 사랑으로 지금도 계속 우릴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처소로 건축해 가시는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사도는 고후4:16절에서“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 몸은 자꾸 세월을 먹어 주름이 늘어나고 예전같지 않아도 우리가 더욱 소망 중에 기뻐할 수 있는 건 하나님의 나라가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온다는 놀라운 사실 때문입니다. 아무도 막지 못하는 세월 속에 하나님의 집이 날마다 새롭게 지어져가길 소원합니다. 내보기에 좋은 집이 아니라 이 육신과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보시기에 아름답고 유익한 집이 건축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보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처소는 어떠한 모습으로 지어야 하는가? 방금 설교내용을 통해 교회란 예수를 만나는 집, 신령한 공동체를 이루는 집이어야 한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보시기에 합당한 집은,...
1) 어디서도 예수그리스도의 문화와 정서가 풍기는 집입니다. 언어습관, 표정, 행동거지, 생각과 사상, 생활습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수의 문화와 정서로 가득해야 합니다.
2)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의 덕을 위해 세워진 집입니다. 삶의 목표가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왜 사냐고 묻는 이에게 예수가 내 목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적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 수단으로서의 삶이란 말을 꼭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찬송이 그치지 않는 거룩한 집입니다. 우리들의 가슴과 머리와 입술이 하나님의 인도와 교훈으로 가득한 집이어야 합니다. 생각하고 느끼며 고백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중심적이어야 합니다.
4) 일상의 삶이 신앙고백이 되는 신전사상(神前思想), 코람데오의 집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며 고백한 하나님중심적인 신앙은 반드시 일상적인 삶에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할 것입니다. 365일, 24시간 언제 어디서고 하나님의 눈이 우리 곁을 떠난 적은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믿고 믿은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하는 신언행의 일치는 하나님 앞에서 세워져가는 코람데오의 마땅한 모본이 되는 일입니다.
5) 구원의 감격으로 끝없는 감사와 겸손뿐 아니라 믿음으로 인한 담대함과 단호함이 있는 구별된 집입니다. 구원의 감동은 범사에 감사하도록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낮아진 자는 언제나 감사하며 겸손합니다. 아울러 주님의 가르침에 담대함과 단호함으로 순종합니다. 천하고 부족한 자를 부르셔서 세상을 바꾸신 주님이 오늘 우릴 택하셨습니다. 우릴 통해 이루실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 앞에 가슴이 설레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6) 위로는 깊은 묵상으로 주님과 교제를, 옆으로는 믿음의 예수혈맹들과 화목함으로 기쁨을, 아래로는 섬김으로 잘 지도하는 리더쉽과 헌신을 통하여 동행의 삶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관계의 복을 받으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위로는 하나님과, 옆으로는 지체들과, 아래로는 믿음의 후진들과 서로 사랑하며 구원의 감격을 함께 나누며 복된 날들을 귀하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이 관계의 복에는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를 통과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성도여러분. 희생과 죽음과 섬김의 도가 십자가의 도입니다. 내가 먼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는 결단코 다시 살 수 없는 부활의 진리 앞에 버거워도 십자가를 지시기 바랍니다. 또다시 선언하기는 십자가의 중앙, cross point에는 그리스도의 심장이 박혀 있습니다. 거기 보혈이 늘 흐르고 있습니다. 이 보혈을 맛보지 않고는 위로든 아래로든 옆으로든 진정한 교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 보혈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했습니다. 남을 위해 죽어주신 거룩한 희생의 피입니다. 희생없인 진정한 사랑의 교제가 일어나질 않습니다. 손해보지 않으려는 사람곁엔 언제나 진정한 친구가 없습니다. 준것만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서로 다투게 합니다.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신 후 이세상과 오는 저세상의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7) 영혼구원의 열정이 식지 않아서 전도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잉태와 출산이 계속되는 생산하는 집입니다. 우리가 받은 영혼의 구원과 그 영원한 생명을 큰 감격으로 받아 믿음에 충실하다면 우리는 반드시 영혼구원에 대한 벅찬 소망과 부담과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령사업은 예수님의 분부 중에도 가장 큰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생애 최고의 주님명령이 바로 영혼구원, 곧 전도와 선교라는 사실은 단순한 명령이기 전에 우리의 삶에 가장 큰 무게의 복과 기쁨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마시기 당부합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다른 것 다 뒤로 하고 한가지를 거듭해서 신신당부한다면 거기엔 필시 중요한 모든 것이 담겨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는 각자각자 하나의 작은 교회로서 하나님이 당신의 몸으로 사용하시는 귀한 하나님의 처소, 성전들입니다. 오늘 주님주신 설교말씀의 중요한 줄거리를 선포할 때 큰 소리로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메시야, 곧 예수그리스도를 만나 하나되는 곳입니다.
교회는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여호와의 명령, 영생을 이루는 곳입니다.
교회는 지금도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저와 여러분 심령 밭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주님의 성전건축이 다시한번 활기를 찾게 될 줄 확신합니다.
끝으로 하나만 확인하면서 설교를 맺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기쁨 중 가장 앞서가야 하는 기쁨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의 질문입니다. 기둥이 되고 바닥이 되는 기쁨 주의해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건강한 몸과 마음과 신앙입니까? 양질의 가정과 가문과 사회적 지위입니까? 좋은 스펙과 당당한 인물과 자격증과 직장입니까? 구원의 제일인 기쁨은 그 구원으로 인해 증거된 많은 조건충족과 환경의 개선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구원의 부속물로 받은 선물들입니다. 구원된 우리가 제일 기뻐할 일은 우리들의 소속감입니다. 우리의 갈 곳, 우리의 본향이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며 우리의 아버지가 사단마귀가 아니라 여호와 크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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