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04. 주일낮설교<욥1:20-22. 욥의 고난과 찬송>
욥은 동방 우스땅에 보기 드문 경건한 사람 욥은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상회의에서 하나님이 사단에게 욥을 자랑하시자 사단이 야실댑니다. “그렇게 넉넉하고 복되게 해주셨는데 하나님께 충성하고 사람 앞에 선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단의 항변 때문에 욥은 졸지에 그의 경건을 시험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거친 후 욥은 시험받기 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게 됐다는 증거가 욥기의 내용입니다.
본문 1:16-18절은 모두 “그가 아직 말할 때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15절에서 스바사람이 와서 칼로 종을 죽였다는 비보를 전하는데 그 말이 아직 끝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불이 와서 양과 종을 살라버렸고 다시 그 말을 하는데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뺏고 죽이고 또 그 말이 마치기 전인데 거친 들판 대풍이 와서 집이 무너져 아들들이 죽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거의 동시에 종과 짐승 떼와 아들들이 모두 몰사하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우리가 지금 읽은 본문 20-22절은 이 큰 일을 당한 후에 괴로워하며 엎드린 욥의 독백입니다. 먼저, 욥의 절규에서 진정한 고통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1.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고통은 일단 누구나 그 통증으로 인하여 괴로워합니다. 후에 어떤 영광이 다가오고 보상이 주어진대도 그 현장에서는 속히 빠져나가고 싶습니다. 통증을 즐길 이는 없다는 게 상식입니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어 흉한 외모로 고난 앞에 몸부림치는 욥의 모습은 아파하는 많은 성도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미는 것으로 표현된 고대근동의 절규하는 장면은 우리나 욥이나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겉옷을 찢는 대신 우리는 가슴을 치고 머리털을 밀 때 우리는 머리를 풀고 땅을 칩니다. 그런데 욥을 보면 특별한 부분이 보입니다. 20절을 함께 읽습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그렇습니다. 욥은 형언하기 힘든 가운데 주께 엎드려 예배하기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21절 하단에 보면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하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고통 중에 하나님을 높이는 욥의 자세는 역시 하나님이 칭찬하실 만하다는 걸 알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통 기쁘면 노래하고 선물 받으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억울하거나 슬픈 일을 당한 뒤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높여 찬송하며 예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욥은 모든 소유와 자녀가 떼죽음을 당한 그 처참한 현장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올려드립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러한 큰 믿음이 어디서 왔는지 욥의 고백을 들어보기로 합니다. 21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2. 적신(裸身알몸)思想의 신앙고백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나온 알몸이 돌아갈 때에도 여전히 알몸에 베옷 한 벌 얻어 입고 빈손으로 간다는 걸 늘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상이 적신사상입니다. 분명한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손에 쥔 게 없으면 다 잃었다고 생각하는 상실감에 매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실감은 억울하단 생각과 분노로 드러나 고통이 되기 시작합니다. (감정은 감정일 뿐 사실(Fact)과는 다를 수 있다는 지난 금요일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은 본래 있었던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죽어 헤어지든 살아 떠나든 사랑하는 이들과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헤어질 것입니다. 억울한 일로 재산을 잃을 수 있습니다. 직장을 잃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희귀병에 걸려 건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세월을 잃었습니다. 잃은 것들은 즉시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내곁에 잔상으로 남아 날 괴롭힙니다. “그가 있었더라면.”“그 돈이면 지금쯤”“그런 직장 없는데”“아. 그때가 좋았는데.”눈에 선하게 보이는 아쉬운 기억들, 알고보면 거저 왔다가 갈 때도 올 때처럼 거저 가는 것들입니다. 결코 억울할 게 없는 인생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늘 억울해 합니다. 본래 세상에 태어날 때 많은 것을 갖고 태어난 사람처럼 그 기준이 부잣집 맏아들이나 외동딸같이 욕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고통은 동일한 것이지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른 자세로 고통 앞에 섭니다. 비가 오는 것을 막을 순 없지만 우산을 준비할 수는 있다는 말을 기억합니다. 바꿀 수 없는 과거라면 그 과거를 해석하는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몫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그래요. 우리는 질병이나 고통스런 사건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어려운 상황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바꿀 수 있습니다. 바람이 세고 파도가 높을 때 배의 방향만 잘 잡으면 배는 오히려 빠른 속도로 나아갑니다. 바람이 심할수록 나무의 뿌리가 깊어집니다. “나는 신음한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는다.” 리챠드 백스터의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자세가 올바르게 잡혀 있다면 우리는 삶의 고통가운데서도 훨씬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욥의 고백은 어떻습니까? 욥의 고백은 진정 우리가 본받아야 할 바른 고백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그렇습니다. 세상에 나올 때 분명히 아무 것도 소유한 것 없이 다만 생명과 몸 하나로 왔습니다. 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주셔서 여기저기 넉넉한 것들로 인생이 풍요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중 한 구석이 사라지면 그만 모두를 잃은 듯 희망을 잃고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원망합니다. 어찌해야 힘든 고통가운데 편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을까? 욥의 적신사상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무,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주시고 몸주시고 여러 좋은 관계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가정과 직장과 건강과 물질과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진리와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떠나 영혼 하나만 남아서 하나님 앞에 가더라도 우리는 사실 잃은 게 없는 것입니다. 다만 모두 제자리에 되돌아 간 것뿐입니다. 오직 영혼하나가 주님 앞에 서서 살아온 그간의 모든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그나마 그 영혼마저 도둑질 당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든 게 제자리도 돌아가 내 곁에 아무 것도 없어도 내 영혼 주를 찬양한다면 우린 잃은 것이 없다는데 동의하시고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욥의 赤身思想입니다.
흑해연안 시노페의 유명한 통나무철학자 디오게네스, 아테네를 정복한 알렉산더가 통나무에서 청빈한 삶을 자유롭게 즐기고 있는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찾아왔습니다. 알렉산더는 명예도, 부도, 모든 것을 버리고 통나무에서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그를 진정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하신 게 없습니까?”정중하게 다가섰습니다. 디오게네스가 말합니다. “좀 비켜서시면 그늘이 지진 않을 것이오.” 이후 알렉산더는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스토아학파의 통나무철학자, 디오게네스가 고향 시노페에서 추방당한 이유가 아이러니하게도 위조지폐제조혐의였습니다. 그가 한 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인간은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채울 때 행복을 얻을 수 있으며, 자연스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이나 흉한 것이 아니라”면서 긍정적이고 청빈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자세히 살피면 하나님의 진리와 얼마나 다른 말로 모두 아는 척하는 자들이 철학자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문의 말씀“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언젠가는 적신으로 돌아간다는 욥의 고백은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채우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로 우매한 백성을 현혹하는 철학자의 말과는 놀라운 간격을 갖습니다. 아무리 깊은 학문의 도를 득해도 성경의 감동을 모르는 사람들은 씨없는 수박이나 계란같아서 먹기는 좋아도 더 이상 열매나 생명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은 욥기의 작은 한 부분만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의 비추심이 우리들의 연약한 믿음에 스미면 고통하는 현장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주를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찬송할 때 더욱 찬송할만한 일들이 다가오고 하나님께 감사할 때 더욱 감사할 일이 다가온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성경의 진리를 기억합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입니다. 언제 어느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엎드려 찬양함으로 열배 백배의 복 가운데 생명과 지혜와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시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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