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01월18일 주일설교 <창22:1.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반드시 선한 계획과 목적이 있고 모든 믿음의 시험에는 귀한 상이 준비돼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더 큰 복,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기 위한 중요한 과정을 준비하신 겁니다. 시험이 어려울수록 상이 큽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는 기다렸다는 듯 즉시 대답합니다. 이미 여러 고비를 넘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놀라운 일의 시작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 즉시 응답한다는 건 언제든지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종이 여기있나이다. 무슨 말씀이든 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믿음으로 순종을 서원하며 드리는 응답, 종이 여기 있나이다. 오늘 설교제목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입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의 믿음을 강화 심화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1. 주님께서 부르실 때 대답하는 나는 누구인가?
얍복강 나루턱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야곱에게 이름을 물은 뒤 “다시는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하갈이 사래를 피해 광야로 달아났을 때 그 이름을 묻는 하나님 앞에서 하갈은 사래의 여종이라고 밝혔습니다. 주님의 제자 요한은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이름이 그의 호적이름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다윗은 ‘여호와의 종, 또는 그의 종’이라고 했고 요셉은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라는 수식어로 항상 하나님의 동행을 보장받는 신실한 종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아합왕은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고 하늘 책에는 뭐라고 적혀 있을까?
저와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무엇을 소망하고 간절히 원합니까?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곧 그 사람입니다. 현재 무엇을 이루었느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그 사람의 꿈과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은 하나님에 관한 것들로 안팎이, 곧 내면과 주변이 가득해야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주안에서 지극히 건강한 자존감이 넘쳐나야 합니다.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늘 가슴가득 뿌듯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주께서 부르실 그 때 나는 과연 누구인가?
세상에 둘도 없는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유업자라는 자존감 높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이미 죄악으로 죽어 썩은 냄새가 나던 나사로같은 내가 알량한 작은 믿음하나로 구원받아 그렇게 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과 천국의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놀라운 감동이 늘 거룩한 영적 실체적 기쁨과 감동인 동시 부담이 되길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주님께서 부르실 때 나는 어디 있는가?
주께서 부르실 때 내가 있는 여기는 주님이 과연, 끝내 기뻐하시는 장소인가?
그렇게 매우 귀한 내가 지금 서 있는 여기는 정녕 내가 머물 만한 곳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은 그 신분이나 지위에 알맞은 곳에 있어야 합니다. 제자리에 있으면 샬롬이라고 했습니다. 있을 곳에 있는 것은 떠나야 할 곳을 신속히 떠나는 것과 함께 지혜와 용기가 요구됩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은 장소의 문제나 환경의 문제이기 전에 먼저 관계의 문제인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즉 주님이 부르실 때 누구와 함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며 신뢰하는 관계입니까? 그런데 불신자입니까? 그는 이제 전도대상자입니다. 교회의 지체입니까? 이제는 내가 먼저 위로할 때입니다. 이 말씀들은 이후에 해로운 곳에 발길을 옮기지 않게 되길 원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좀먹고 가정을 흔드는 장소에 더 이상 유혹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친구들을 이제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 만나야 한다면 속히 전도하셔야 합니다. 그들로 인하여 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염두에 두십시오.
3. 주님께서 부르실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주께서 부르실 때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현재 내가 갖고 있는 것과 하고 있는 일 가운데 믿음과 사랑과 소망 외에는 모두 버리고 가야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어떤 값으로도 구할 수 없는 구원을 우리 주님께서 생명을 주고 대신 값을 지불하셔서 나는 이제 새 생명 됐습니다. 잠시 지나는 이 땅보다는 영원을 기뻐합니다. 그러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과연 그 신분과 소망에 합당한 것인가? 사람은 근사하게 즉 그럴싸하게 살아야 합니다.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이 근사하다는 말은 요즘의 멋지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근사하다..국어사전에는 비슷하다는 뜻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이 희망하는 최상최고치에 가깝게 됐다는 것인데 이야말로 멋진 것입니다. 소원하던 것의 비슷한 데까지 이뤄진 겁니다. 요즘은 문화가 발전하고 영양상태와 환경이 좋아져서인지 모두들 인물이 훤합니다. 50년 전 소학교졸업사진 보셨지요? 100년 전만해도 우린 모두 모두 황진이나 양귀비나 압살롬의 외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괞챦은 외모에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은 기대에 못 미칩니다.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하는 짓은 얼마나 멍하고 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멍하다는 것은 자신이 멍한 것을 깨닫지 못한 것에서 시작합니다. 어떤 것이 이로운 것인지 어떤 것이 해로운 것인지를 도무지 분간치 못합니다. 누구를 가까이 해야 유익한지를 모릅니다. 아니 알아도 그냥 눈에 보기에 기분에 좋은 사람을 만나서 서서히 물들어 가는 것입니다. 유혹은 매우 달콤합니다. 뿌리치기 어려운 것이 보통입니다. 옳은 것은 대부분 재미와는 먼 것입니다. 맛있다고 잔뜩 먹은 짠고기로 목이타서 물을 맘껏 퍼마신 독수리는 그냥 가서 손으로 잡는 겁니다. 몸이 무거워 날지를 못합니다. 현대인과 세상유혹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달콤해서 이것저것 쥐고 있는 여러 가지 세상의 재미난 것들은 영혼의 날개를 무겁게 해 자유롭게 날지 못하게 합니다. 모처럼 묵상의 시간이라도 가지려고 앉으면 별에 별 생각이 다 찾아듭니다. 뭐가 그리 소중하고도 시급한지 도무지 눈에 뵈지 않는 하나님을 찾는데 실패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이미 내안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말씀 후 서둘러 정돈된 줄 믿습니다. 어지간한 것들은 모두 버리시기 바랍니다. 단순하고 말끔한 생활로 정리되기 바랍니다. 누구든 당신을 만나면 아 이사람 참 상큼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좋겠습니다. 예수믿으라는 말만 빼고는 다 괞챦다는 말을 먼저 들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그 예수믿으라는 소리를 거부하지 않을뿐더러 가장 반가운 소리로 듣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끊임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놀라운 분이십니다. 그분이 부르신다는 것은 여러분을 택하신 뒤 눈여겨보셨다는 것이며 구원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뭔가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생명입니다. 생명의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실 때에 여러분의 인생은 송두리째 변화할 기회가 열립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소명을 받을만한 자세로 살아가며 주님의 음성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믿음과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는 곳에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에서 먼 것이라면 즉시 거기를 떠나세요. 멸망에서 구원받은 여러분을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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