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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4.12.28. 주일낮예배<창32:22-32.네 이름이 무엇이냐?>

by 설렘심목 2015. 1. 1.

2014.12.28. 주일낮예배<창32:22-32.네 이름이 무엇이냐?>

 

오늘 본문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그 이름이 바뀌는 얍복강의 씨름이 중요한 주제입니다. 얍복강의 씨름은 얍복강에서 생명을 건 사투의 기도입니다. 기도없이 형 에서를 만난다는 것은 차라리 자살만도 못한 일임을 야곱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재확인된 하나님의 언약이지만 야곱은 기도없이 매우 두려워 한발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지략을 다해 세운 작전에 따라 많은 선물과 함께 모든 식솔을 먼저 출발시키고 자신은 얍복강 나루터에 남아 난생처음 맹렬한 기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서 드디어 하나님의 응답을 얻어냅니다. 즉 야곱은 자신의 평생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이 외롭게 홀로남아 죽을힘을 다해 씨름하듯 하나님의 사람과 대면합니다. 야곱의 얍복강 기도, 어떤 기도였기에 온 가문의 생명을 구한 것입니까?

 

1. 밤새 겨루어 허벅지관절이 턀골된 기도였습니다.

 

야곱의 얍복강기도는 背水陣을 친 기도였습니다. 뒤엔 물이라 물러서면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마지막 진을 배수진이라고 합니다. 이 기도에서 실패해 응답받지 못한다면 야곱은 끝이란 절박한 결단으로 밤을 새워 기도합니다. 성경은 이 기도를 씨름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엎치락뒤치락 그야말로 하나님과 씨름을 하듯 온몸을 바쳐 드리는 전투와도 같은 기도를 야곱은 저녁에 시작하여 날이 새도록 합니다. 25절을 함께 읽습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허벅지관절 엉치뼈는 허리아래에서 허리를 받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엉치뼈는 생식기관을 직접 관장합니다. 이 뼈를 어긋나게 쳤다는 것은 야곱의 가장 중요한 것을 때렸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남성을 비롯한 중요한 몸의 근력을 잃었습니다. 밤을 꼬박 새워 기도한 뒤 야곱은 날이 새자 떠나려는 어떤 사람을 못 가게 붙잡습니다. 어떤 사람이란 28절에 하나님의 방문이었음을 증명하는 구절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못 가게 붙잡고 늘어집니다. 축복하지 않으면 놔드리지 않겠다는 결단을 우리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그 중심의 간절함에 하나님이 졌다고 하시며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바꿔 주십니다.

 

성도여러분. 우린 여기서 기도의 원형을 보게 됩니다. 야곱은 약속의 자녀입니다. 기도에 그렇게 매달리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거라는 생각을 야곱은 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지겠지만 야곱의 권속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하는지를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킬 언약을 그 백성들도 잘 지켜갈 수 있도록 어떤 방법으로든 인도해 가십니다. 야곱에게 성난 에서를 보게 하셨고 두렵게 하셔서 뜨겁게 기도하게 함으로 그를 변화시켜 가십니다. 장차 언약을 이뤄갈 당사자요, 믿음의 선조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기도를 잠시 살펴봅니다. 야곱의 기도 첫 째,

 

1) 절박한 기도였습니다.

 

간절한 정도가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도입니다. 야곱 자신만 살고 죽는 기도가 아니라 온 가족들의 생명까지 볼모로 잡힌 사투의 기도였습니다. 잘 아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머리가 풀어지고 눈물콧물이 흘러 미친 듯 술 취한 여자처럼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눈물에 침상이 뜰 정도로 밤새워 울며 기도했다고 시편에서 고백합니다. 이미 보셨고 아시는 주님이시지만 기도하는 자녀의 중심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선 뜨겁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왜 기도하라고 하시는가? 기도는 교제이고 하나님은 우리와 깊은 교제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교제는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깊이 사귀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기도 두 번째,

 

2) 허벅지관절이 탈골되는 기도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야곱의 기도, 엉치뼈가 물러날 정도로 심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소원을 들어주시되 야곱의 엉치뼈를 치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환도뼈 탈골입니까?

엉치뼈는 남성에게 있어서 근력의 상징입니다. 엉치와 허벅지를 잇는 관절로 대단히 중요한 뼈입니다. 야곱의 기도를 들어주시면서 그 육신적 능력을 무력화시킨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앞으로도 긴 인생여정을 자신의 힘과 꾀와 방법에 의존하지 말고 온전히 주께 의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엉치뼈가 물러날 정도로 기도한 야곱이 받은 응답은 온 가족의 안위였지만 야곱 자신은 다리를 절며 간신히 걸어가야 했습니다. 늠름한 모습으로 당당히 걷지 못하고 절룩거리면서 형 에서를 만나러 갑니다. 품위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용서를 구하는 자 답게 측은하고 처량한 야곱의 걸음걸이입니다. 밤새 기도한 자답게 겸손이 배어나오는 모습입니다. 27-28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를 다른 말로 바꾼다면 “넌 내 앞에서 누구냐?”즉, 하나님 앞에서 그 정체가 뭐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속이고 속던 야곱, 결국 남의 뒤꿈치를 붙잡고 약삭빠르게 살아온 그가 라반에게 붙잡히는 모진 20년 세월을 지나 이제 하나님께 붙잡히는 사람이 되어 얍복강 나루터에서 드디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기도의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된 것, 우리가 우리 된 것,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인도하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네 이름이 뭔가?” 즉 “넌 내 앞에 누군가?” “야곱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예, 전 지금까지 속이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속인만큼 또 속았습니다. 속고 속이는 인생이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말라.” 다른 말로는 “이제 다시는 속이거나 속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밤새 날 향해 몸부림쳤으니 더 이상 속고 속는 일은 없으리라. 이제 널 이스라엘이라 부르리라. 하나님과 및 사람들을 이겼음이라.” 다른 말로 해봅니다. “네가 날 이겼으니 곧 만날 형 에서를 비롯 모든 사람들을 네가 이겼도다. 아무도 널 어찌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제 너는 언제어디서나 나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로 날마다 내 앞에 승리할지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한 인간의 정체성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분과 소속이 변한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달라져 좋아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들이 바뀝니다.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바라는 게 달라집니다. 삶의 향방과 말하는 것과 눈빛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바뀝니다. 그런데 세상 모든 것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단 하나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를 부르시고 여러분을 부르셔서 하나되게 하시고 우릴 통하여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이뤄가시는 이 한가지 하나님의 약속과 소원인 줄 믿으시기 축복합니다.

그 소원과 언약은 무엇인가?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가운데 여전히 변함없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약속이 영적 이스라엘들을 통하여 대를 이어 이뤄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9절의 야곱질문은 대답대신 야곱을 축복했다고 증거합니다.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인생이 감히 어찌 하나님의 신분을 물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선 머리를 조아리고 말씀과 임재하심과 복 주심을 기다리는 것 외에 무슨 입을 열겠습니까? 우리의 할말, 오직 감사와 찬송뿐입니다.

31절입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 다리를 절며 나아갈 때 브니엘에 해가 돋았더라.

 

30절을 보면 야곱이 상대방을 깨달은 후에 그만 놀라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는데도 죽지 않은 은혜를 기념한 것입니다. 그렇게 브니엘을 통과합니다. 성경은 그 때에 해가 돋았더라고 기록합니다. 결국 브니엘의 통과란 어두운 밤, 생사를 건 사투의 기도를 통과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 앞에서 밝은 태양을 보는 일은 그렇게 두려움의 터널, 인생의 어두움의 터널을 기도의 전투로 통과한 후의 일이었습니다. 이젠 에서를 만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비록 절며 걸어도 사망의 공포가 사라지고 생명과 안전과 화평의 밝은 해가 솟아올라 기쁨의 재회를 약속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얍복강의 기도가 아니더라도, 한나의 미친 듯한 기도가 아니더라도 우리 저와 여러분 매일조석기도와 금요기도회만큼은 빠지지 말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께서 주시려는 많은 것들을 약속을 붙잡은 기도에 따라 다 받아 이웃에게 나누고 세상이 밝히 알게 하여 귀한 감사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 예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