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02. 주일낮예배<욘4:8-11. 니느웨를 아끼신 하나님>
니느웨는 많이 부패한 앗수르의 수도로서 그 사회의 죄악상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가진 자의 횡포가 없는 자들의 목을 조였고 우상숭배가 심해 하나님의 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아라랏과의 전쟁과 두어 차례의 역병과 재난으로 기가 죽고 지쳐있었습니다.
한편 북이스라엘은 다메섹을 속국으로 삼아 조공을 받는 등 기세가 등등합니다. 거기에 선민의 특권의식이 강해서 자신들 외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구원관이 강했습니다. 불행은 뭡니까? 실상과 허상을 바꿔 보고 거꾸로 해석해 생긴 일입니다.
하나님을 예루살렘 경내에서만 활동하시는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전락시킨 이스라엘, 이방선교는 입 밖에도 내지 못하던 당시 배경을 보면 요나의 불순종을 요나만의 것이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이스라엘 온 국민이 선민특권의식에 젖어서 열방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거나 회개를 촉구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인 요나조차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가라고 하신 선교지의 반대편으로 도망한 것은 얼마나 이방선교에 저항적이었나를 알게 합니다. 온 우주의 하나님, 세계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요나를 통하여 이런 이스라엘의 편협한 구원관을 부수기 시작하셨습니다. 요나의 불순종과 거기 따른 요나의 고통과 회개는 니느웨의 회개, 구원과 함께 하나님의 보편적인 인류사랑과 구원의 계획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나가 니느웨에서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며 외친 경고의 선포가 크게 성공한 뒤 도리어 허탈해하는 장면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회개촉구와 징계선포가 쾌거를 이룬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인데 요나는 크게 실망합니다. 회개하라고 외쳤더니 회개했습니다. 회개하면 용서하신다고 선포했고 하나님은 회개한 니느웨 성읍을 선포대로 용서하셨습니다. 요나의 경고선포는 매우 큰 효과를 거두어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심기가 불편합니다. 불순종해서 망하는 꼴을 봐야 속히 후련한데 순종해서 살았습니다.본문은 불편한 마음의 요나와 하나님의 용서 그리고 구원을 대비하는데 먼저,
1. 니느웨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나훔선지자는 나훔서2:11/3:1에서 약탈한 물건으로 가득할 니느웨를 “사자굴”로 표현했고 그곳은 궤휼과 강포가 떠나지 않는 피의 성으로 예언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이 멸망할 때에 애곡할 자가 없다(나3:7)고 했습니다. 스바냐선지자도 니느웨성은 멸망하여 그 땅이 황무하여 사막처럼 된다(습2:13-15)고 했습니다. 니느웨는 선지자들의 예언처럼 철저하게 궤멸되어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어 고고학자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니느웨는 길이 5㎞, 폭이 약 2.4㎞되는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규모의 번성한 대도시였습니다. 여리고성의 약 250배나 됩니다.
니느웨성은 사방에 모두 15개의 문이 있었고 문마다 수호신의 이름을 붙여 니느웨가 얼마나 우상숭배에 깊이 빠졌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전쟁에서 취한 전리품과 속국에서 올려온 조공, 매장량이 풍부한 금과 은으로 번성이 극에 달하던 주전 7세기에 니느웨는 풍요만큼이나 타락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전쟁의 여신, 우주의 여왕이라고 신봉하는 이쉬타르여신 숭배, 빈부의 심한 격차 등 풍요로운 물질로 더욱 타락한 니느웨가 두 번에 역병재앙으로 잠시 마음이 찔끔했을 때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셨습니다. 두 차례의 치료조차 안되는 무서운 돌림병으로 온 백성이 공포에 떤 것이 엊그제였습니다. 왕은 요나선지자의 음성을 듣고 즉시 두려운 마음에 국가적인 회개를 결단한 것입니다.
본문 욘4:11절을 함께 읽습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2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같은 니느웨에 대한 시각과 견해에 있어 하나님과 요나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는 멸망받아 마땅한 타락한 성읍이었고 하나님께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철부지인생들이었습니다. 철부지 니느웨를 아끼셔서 용서하신 하나님 앞에 철부지 아닌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마18:22절을 찾아 읽습니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용서를 하되 몇 번이나 해야 하는가를 질문할 때 하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최고의 소식은 뭡니까? 죽을 자가 살아났다는 겁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가 용서받은 겁니다. 은혜가 깊은 감동으로 온 몸에 저려오길 원합니까? 그건 저와 여러분이 죽음과 형벌 외에 받을 게 없는 비참한 존재,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깨닫는 영적 자각능력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죄인임을 깨닫는 것 외에도 모든 진리말씀을 깨닫는 것을 복중에 중요한 복으로 이미 우리 강대상에서 선포된 지 오래입니다. 타락한 니느웨가 용서받았다면 하물며 자녀의 이름과 신부의 이름을 주시고 성도로 부름받은 우리야 어찌 용서치 않으시겠습니까? 언제나 문제는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깨닫지 못하여 엎드리지 않는 우리 인생들에게 있어요. 엎드려서 하나님과 형통한 저와 여러분되시기 축복합니다.
2. 니느웨의 멸망을 기대한 요나의 불만.
하나님을 자신들만의 하나님으로 단정해버린 이스라엘의 교만과 편협한 구원관은 니느웨의 구원을 통해 여지없이 부서졌습니다. 요나는 부패한 니느웨가 자신이 선포한 경고를 당연 무시하고 멸망당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니느웨는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짐승에 이르기까지 금식합니다. 왕은 조서를 내려서 금식과 아울러 기도를 명령합니다.
요나의 경고메시지를 듣고는 이른 바, 범국민적인 금식기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무서운 심판을 거두셨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자비와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실 때 이미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구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의 경고를 받아들이기 원하셨습니다. 저들이 혹 요나의 경고를 무시했더라면 하나님의 불변하는 니느웨의 구원계획은 많은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서 이뤄졌을 것입니다. 다행히 니느웨성읍은 요나의 경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허탈해지고 심통이 난 것은 요나였습니다. 성경대로는 심통정도가 아니라 화가 치밀어 죽을 것 같았다고 합니다. 본문 9절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어찌 옳으냐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하니라.”요나는 자신이 선포한 니느웨의 멸망장면을 보고자 뙤약볕에 초막을 세우고 하나님이 만드신 박넝쿨그늘에서 몸을 가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새벽 박넝쿨에 벌레가 들어 갑자기 박넝쿨이 시들어 오그라붙자 뜨거운 볕 때문에 어찌나 짜증이 나던지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본문 8절 뒷부분을 읽습니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가뜩이나 멀쩡한 니느웨로 불만이 가득한 데 볕을 가리던 넝쿨마져 사라지니 있는대로 화가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엎친데 겹친 설상가상의 요나입니다. 이렇게도 심한 요나의 불만은 어디서 왔습니까?
1) 하나님을 모르는 데서 기인합니다.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예루살렘의 지방신(地方神) 정도로만 알았던 영적인 무지가 요나 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선민들에게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믿고 높이며 의지하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리만의 하나님도, 이스라엘국가만의 하나님도 아닌 만유의 근원과 주재시고 만물을 창조하셔서 모든 존재의 근원과 현상의 근본이 되시는 영원하신 유일신이십니다.
하나님을 알면서 행복은 시작되고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빠질 때 불행은 이미 시작된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성경은 그래서 모든 것의 지혜와 지침서가 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떤 일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보다 앞서가면 그는 일의 순서를 바꾼 어리석은 사람인 걸 믿기 축복합니다.
2) 범죄는 곧 징벌이라는 잘못된 편견입니다.
악한 자를 보면 누구나 분노하고 그 분노는 반드시 징벌을 봐야만 가라앉는 인간의 이기심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조금도 손해 볼 수 없다는 인간의 생각엔 상벌의 구분이 뚜렷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돌이키는 자에게 끝이 없는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이지 징벌이 아닙니다. 범죄에 댓가를 안 치르면 영악하고 연약한 육체들은 늘 재범에 무방비로 노출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댓가를 치르게 하시되 용서는 하십니다. 범죄가 곧 징벌일 수 없는 것은 믿는 자에게 말씀으로 찾아주신 주님 앞에 즉시 돌이켜 꿇어 앉아 선처를 기다린다면 애절한 심경의 통증으로 모든 죄를 청산하도록 하십니다. 그 청산은 그러나 예수님이 내대신 십자가에서 내 죄값을 치르기 위해 죽어주셨다는 믿음이 기반이 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범죄는 징계거리가 아니라 회개거리이고 신자에게 있어서 회개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출발이 되는 복의 기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요나는 성공한 선교의 결과 앞에 죽고 싶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에도 내 안에 미움이 자리잡고 있다면 우리는 그 미움의 노예가 되어 바른 판단도, 기쁨도, 평강도 못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와 교회 외에도 그 사랑을 만방에 공표하시고 실행해 가시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 좋으신 하나님 손에 꼭 붙잡혀서 하나님의 노예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려 예수그리스도의 노예가 된다면 다시는 요나처럼 미움의 노예가 되거나 옹색한 자신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올인하여 세상 모든 것에서 자유하며 기뻐하는 신앙인이 되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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