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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4.08.17. 주일예배<민13:1-16(16). 여호수아가 된 호세아>

by 설렘심목 2014. 8. 16.

2014.08.17. 주일예배<민13:1-16(16). 여호수아가 된 호세아>

 

본문 1-15절까지는 르우벤, 시므온, 유다, 잇사갈, 에브라임, 베냐민, 스불론, 요셉, 단, 아셀, 납달리, 갓지파 모두 열두 지파의 수령된 자들 이름이 각각 열거 됩니다. 이 중에서 6절의 유다지파의 수령이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8절의 에브라임지파, 눈의 아들 호세아가 등장고 각지파에서 수령 한사람씩 나와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가게 됩니다. 한 지파도 예외없이 참여합니다. 교회의 정치와 행정과 운영은 이렇듯 각기관이 유기적으로 연합하여 조직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우리교회 머지않아 여기를 떠나 근방 어딘가 새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 주님이 하시겠지만 본문처럼 어느 한 사람도 예외없이 관심과 기도로 동참해야 합니다. 이리저리 알아보는 사람이나 기도로 밀어주는 사람이나 그 중요함은 한가지입니다.

 

여호수아의 본명은 호세아입니다. 구원이란 뜻의 호세아 앞에 여호와의 구원을 강조하는 뜻으로 여호와의 앞 자인 “여”를 붙여 여호세아--여호수아가 된 것입니다. 모세가 이 이름을 붙여준 것은 여호수아가 감당할 가나안땅의 정복을 염두에 둔 결의적 의미를 갖는 개명이었습니다. 즉 구원이라는 말 앞에 여호와를 강조함으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고 해 여호와께서 이루시는 구원을 강조하여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한 겁니다. 다시말해 가나안의 입성은 오직 여호와께서 이루신 일임을 이름에 기억시키는 모세의 신앙고백적 권면이 여호수아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부부(아브람:큰아버지->열국의 아비 / 사래:부귀영광->공주,왕손)와 야곱은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반면 “어리석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발은 그 이름대로 도움을 청하는 다윗을 거절했다가 노한 다윗의 소식을 듣고는 몸이 굳어 죽고 그 아내 아비가일은 다윗의 발아래 무릎꿇어 선처를 구함으로 그의 아내가 됩니다. 아비가일의 뜻은 “내 아비가 기뻐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김춘수시인의 꽃이란 시를 기억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에 인도자되시는 그리스도에 관해 무지하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우리들의 이름 석자는 대부분 옛이름입니다. 약속의 이름은 교회에서 불러주는 이름입니다. 집사, 권사, 장로, 전도사, 목사, 선교사라는 이름은 위대한 이름입니다. 위대하신 분이 임명하고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혈통가문에서 지어준 이름은 다분히 가문과 부모의 소원이 담겨있습니다. 거긴 하나님의 소원이 없습니다. 그냥 잘 먹고 훌륭하게 될 것을 소망합니다. 왜 잘 먹고 잘 살아서 훌륭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굳이 하라면 가문의 영광입니다.

 

성경은 이름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창32:27에서 밤새도록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한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람은 “네 이름이 뭐냐?”고 묻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꽃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라고, 잊혀지지 않는 의미로 남길 바라지만 하나님은 네 이름이 뭐냐고 묻습니다. 야곱이라는 대답에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로 바꾸라고 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인가? 설교자입니다. 다시는 설교자라고 하지 말고 전달자라고 하거라. 네 이름이 무엇인가? 권사입니다. 사모입니다. 집사입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행복한 노예, 감사하는 노예라고 하거라. 네 이름이 무엇인가? 장로입니다. 그러지 말고 죽은 자라고 하거라.

 

이름에 합당한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름에 합당한 꿈과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름에 합당한 능력과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저와 여러분. 감당할 수 없는 최고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이름에 합당한 어떤 희생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습니까? 희생이란 말은 제단에 죽여 올리는 제물을 일컫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대신 죽는 걸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죄를 대신해 희생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대단한 이름에 합당한 희생이 있나요? 예배는 바쁜 중에도 시간을 따로 떼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시간의 봉헌예물입니다. 그리고 영이 살아나는 참 놀라운 시간입니다. 뭣보다 우린 예배위해, 찬송하러 주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들입니다. 예배를 위해서 다른 것을 희생해야만 합니다. 불편함과 시간과 비용을 희생해야 합니다.

 

초심의 회복, 칭찬받는 믿음, 구별된 성도의 길, 예배에 빠지면 초죽음이 되는 듯한 심령의 예리함, 그건 주님을 예리하게 느끼는 자만 가능한 영의 대단한 감각과 파워입니다.

 

가난한 젊은 연인이 불타는 사랑을 합니다. 기다리던 데이트를 위해 열심히 일해 비용을 마련합니다. 회사에선 오버타임도 하고 남의 근무도 대신합니다.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도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건 오직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에 빠져 번번히 데이트시간을 잊고 있다가 상대방이 마음을 닫아 절교를 당하게 됩니다. 본질을 잊고 곁가지에 충실하다가 본래의 목적을 잃고 마는 어리석은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하나님은 그와 그 가정을 소중히 여겨주시는 것을 믿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호세아, 그래요. 구원입니다. 구원은 죄로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께 예수님으로 인해 받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라는 호세아의 이름에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표현이 빠져 있었습니다. 구원은 구원인데 누가 주신 구원이며 어디로 가는 구원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구원, 주께로 가는 구원. 호세아가 아니라 여호수아인 것입니다.

누구의 엄마, 안애경. 누구의 아내 안애경. 뉘집 딸 안애경이 아니라 안애경집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어렸을 때 이담에 커서 무슨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까? 대통령에서부터 장군, 의사, 축구선수, 선생님, 시인, 화가, 과학자 등등 얼마나 많은 소원을 말합니까? 저는 지금도 말합니다. “이 담에 커서 훌륭한 사람되겠습니다.” 우린 지금도 크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이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인가? 다시한번 분명히 일러드립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이 성도와 집사 또는 권사로 부르셨습니다. 즉, 교회가 여러분을 목사, 권사, 집사로 불러주신 겁니다. 이보다 더 거룩하고 아름다운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귀히 여기셔서 하나님 집에 사환으로 여겨 집사로 부르시고 하나님집에 가족인 성도로 부르셨으니 더 무슨 이름을 구합니까? 최고의 이름, 집사, 권사, 사모, 장로, 전도사, 목사입니다.

 

목사다워 목사로 부르지 않았고 권사다워 권사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집사처럼 살라고 권사처럼 살라고 목사처럼 사모처럼 살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여주시고 임명하신 것입니다.

 

호세아가 여호수아가 된 것처럼 우리들이 받은 이름위에 덧입혀주신 삶의 목적과 그 의미를 따라 살아가길 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집사, 총무, 회장, 서기, 회계, 불러주신 분의 소원을 이뤄야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으니 살리신 분의 살려낸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고최상의 인생임을 믿고 그렇게 살아가시기 예수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