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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4.07.27. 주일설교(마11:28~30. 무거운 짐을 예수께)

by 설렘심목 2014. 8. 6.

2014.07.27. 주일설교(마11:28~30. 무거운 짐을 예수께)

 

1. 인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입니다.

 

가장 큰 짐은 육체입니다. 육체 때문에 사랑도 짐이 됩니다. 육체가 있어서 얻는 기쁨들, 그 기쁨 뒷면에 그 못잖은 짐이 있습니다. 먼저 육체때문에 생각자체가 통제당합니다. 육체가 없다면 누구나 무엇에든 품격있게 고상하고 우아하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낙타를 타고 먼 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낙타가 아니고선 도저히 갈 수 없는 사막길, 낙타는 육체고 낙타 위에 탄 사람은 정신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낙타는 계획을 세우지 못하지만 건강해야 합니다. 낙타가 건강하지 못하면 그 낙타에 알맞게 여행거리를 짧게 잡아야 합니다. 건강한 육체가 절실한 하나님의 성전들, 귀한 영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신 육체가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해도 인생은 여전히 외롭고 힘겨운 나그네길입니다.

먼저 28절 앞 한마디를 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첫째 인생이 수고로운 것입니다. 나면서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지만 그 축복대로 이뤄지기란 쉽지 않은 험난한 길을 시작합니다. 사는 게 다 고통이란 말이고 인생은 고해, 즉 고통의 바다라는 옛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사랑이 아니고 고난, 고통이라는 사실은 인생이 수고로운 짐이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 항상 어깨 위에 짐이 지어져 있는 인생입니다. 뭔가 가득한 부담이 사람마다 달라도 누구나 힘겹고 무거워 내려놓고 싶은 짐을 지고 갑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쟁기를 끄는 소를 보면 바로 인생이 보입니다. 어깨에 멍에를 메고 그 멍에에 쟁기를 묶어 힘껏 숨을 몰아쉬며 가는 모습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가야하는 길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거저받은 구원과 영생은 어린 자녀들 앞에 밥상을 차려놓은 엄마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바로 앉아 수저를 들어 맛지게 먹는 일은 자녀의 몫입니다. 근심거리로 밥맛을 잃거나 과자를 몰래 먹고 와서 깨작거리는 건 엄마가 거저 베푼 밥상 앞에 성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베푸십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다만 인간의 죄성이 골고루 나누지 못하고 가진 자가 더 채워 공평이 깨진 개인과 사회와 관계, 그리고 건강이 균형을 잃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음이란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 하나님과 주로 이웃을 향한 원망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태생적 고통스런 인생의 멍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본문 28절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셋째, 짐을 지고 있는 인생은 끝없이 고단합니다. 평생 피할 수 없는 짐이라면 인생은 고통 중에 하던 욥의 고백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을 뻔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실수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이 자청한 죄 짐이 인생 짐이 된 겁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말씀은 약속이며 그 스스로 신실한 보장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그 분께 나아가 죄짐, 인생짐을 맡겨드려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맡겨드리면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쉴 수 없는 인생, 어떻게 쉬게 하실까?

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지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은 스스로 겸손온유하신 것을 말씀하시고는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엄청난 멍에, 이웃을 위해 죽어주는 멍에, 분노할 자리에서 도리어 축복하는 멍에, 어디까지 온유해야 그게 가능할까? 과연 가능할까?

 

2. 주님께 배워야 할 주님의 멍에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잠시 이 땅에 오셨던 하나님의 신비이십니다. 믿음없인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만의 계획을 사람의 이지로 헤아린다는 것은 질그릇이 토기장이를 말하는 것과 같이 말이 안 되는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십자가를 우리가 작은 윤리로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주님께 배워야 할 그 분의 멍에는 말씀처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기초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온유와 겸손은 인간이 말하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사람은 얌전하고 온순하면 좀 게으를 수 있고 우유부단할 수도 있습니다. 겸손할 때 보통 추진력도 없고 억울한 일 많이 당합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그런 거로 봐 사람 안으로 끌고 들어오면 주님을 오해합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은 하나님의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은 하나님의 본질이신 사랑에서 비롯되는, 형체형질이 없으신 하나님의 존재감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한 예수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은 이미 인간의 그것을 품고 그 넘어 하늘에서 실행되는 섭리라고 알면 우리는 어렴풋하나마 주님의 온유, 신비를 알까요? 창조주의 온유와 겸손은 그래서 하늘로 땅을 덮는 능력인데 갈등과 분노가 필요없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크신 하나님이시기에 작은 인간들의 요동함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큰 바다의 고요함과 같은 것인데 예컨대 꼬마들이 구슬치기를 하며 아옹다옹할 때 마음의 요동이나 짜증없이 빙그레 웃으며 보고 있는 아버지의 상태, 그게 주님의 온유와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의 멍에를 배웁니까? 먼저 배운다는 것은 안 되는 걸 자꾸 연습해 스승처럼 해내는 것으로 학습의 효과는 무조건, 조건살피지 않고 계속 따라해야 합니다. 뭘 따라합니까?

 

첫째 성경대로 살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를 믿고 이젠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종종 잊고 살아갑니다. 성경을 이루며 산다는 것은 이 십자가 부활의 바퀴가 내 안에서 분명하게 돌아가 재현되는 걸 말합니다. 그러려면 온유겸손하신 주님을 닮고 또 따라할 때 아주 조금씩은 하늘나라 가까이 우리 삶이 성화될 줄 믿습니다. 요약한다면 성경대로 사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말합니다. 육체는 그분의 처소로 내어드리되 육성, 곧 죄성은 확실하게 죽어야 합니다. 육성이 죽어도 열심히 일하게 하시고 필요한 것 욕심내게 합니다.

중요한 건 신비한 하나님의 나라에 좀더 가깝게 다가서서 놀라운 것들을 깨달아 감동하게 하심으로 상당부분 세상과 육성 앞에 초연한 신앙인격을 부여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때 주의할 일은 내가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이란 말에 유의하세요.

성경대로 살려한다는 것, 아주 단순하고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신앙과제입니다. 육체가 방해꾼입니다. 세상이 방해합니다. 가까운 관계가 방해합니다. 스스로 지쳐 변질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한가지 일에 꾸준한 겁니다. 성공사례는 모두 꾸준해서 쟁취한 이야기들입니다. 끝으로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 묵상하고 말했습니다. 어찌 그 멍에가 쉽고 그 짐이 가벼울꼬? 사랑이 큰 능력이 돼 그런 말씀을 하셨겠지... 그러나 그 생각은 무지한 것이고 교만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같은 인간으로 끌어내려 본 것인데 어줍잖은 인정으로 크신 창조주를 생각한 겁니다. 만유를 지으신 주님께서 무거운 게 어디 있고 어려운 게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좋으신 하나님께서 능치 못한 게 없으시니 맡기랄 때 맡기면 우리의 순종이 완성돼 능력되고 그 힘이 믿음의 확증이 돼 쉼과 평강을 얻는다는 말씀을 잊지 않기 축복합니다.

 

3. 버거운 짐을 주님께 맡긴 인생은 승리한 인생입니다.

 

우리는 맡기고도 종종 도로 찾아와 내 어깨에 올려놓고 언덕길을 숨차게 올라갑니다. 사실 완전한 맡김, 온전한 의뢰와 인도는 육체를 버린 후에라야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우린 벅찬 육체의 짐, 죄의 짐, 인생의 짐을 속히 맡겨드릴수록 말씀 앞에 순종해서 죽어 천국을 살아서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증인의 삶이 성도의 삶이고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승리는 몸을 버린 후에 이뤄지고 밝혀지는 일이지만 우린 말씀으로 인하여 얼마든지 이 땅에서 승리를 선포할 수 있게 주님이 길을 열어주셨고 또 먼저 몸으로 가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승리가 눈에 보이는 것에 제한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만 갇혀있질 않기 바랍니다. 주님의 승리는 뵈는 것과 뵈지 않는 모든 것들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맡기라고 하신 고생스럽고 무거운 짐은 마음과 영으로 눌렸던 것들과 아울러 몸을 짓누르고 있던 모든 어려움을 다 함께 의미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한 것 하나는 우리가 이리가든 저리가든 잠시후면 몸을 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엔 수고하고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거기서 성도들은 믿음으로 인한 영생구원의 판결을 약속대로 받게 됩니다. 그때 우리들은 비로소 돌이킬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하찮고 소소한 것들로 속 태우며 발을 굴렀던가? 우리 눈을 잠시 감고 주님을 묵상하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다 내려놓고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여 좀 더 주님의 형상들인 이웃들을 품을 걸, 더 불쌍하게 여기고 더 품어 눈물을 닦아줄 걸, 더 따듯하게 말하고 용서해 줄 걸, 그 때 더 양보하는 건데, 맞아 내가 심했어. 내가 왜 그랬을까? 좀 더 참아야했는데, 오 아버지여!

그 날 거기서 돌아볼 거 우리 여기서 미리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빛 앞에 자신을 돌아보면서 훗날 아파할 일들을 줄여가는 깨달음의 복을 오늘 우리에게 넘치게 부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