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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4.06.08. 주일낮설교 (왕상19:1~18<13~14봉독>. 호렙산의 엘리야)

by 설렘심목 2014. 6. 8.

2014.06.08. 주일낮설교 (왕상19:1~18<13~14봉독>. 호렙산의 엘리야)

 

아합왕은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는 바람에 이스라엘 역대왕 중에 가장 악한 왕이라는 이름을 받게 됩니다.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이란 이름은 바알과 함께라는 뜻입니다. 이세벨은 그 아버지이름처럼 바알과 함께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동해서 하나님 여호와의 눈 밖에 나 있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이 850명 모두 엘리야의 칼에 죽자 이세벨은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선언합니다. 살기등등한 이세벨 앞에서는 살아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엘리야는 급히 달아나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이제 거둬달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야와 하나님의 대화에서 듣는 귀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주께서 원하시는 신앙성숙이 모두에게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은 한절씩 살펴가며 끝에 주제를 봅니다.

 

1~2절입니다.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신 앞에 철저히 헌신된 열정의 우상숭배자였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종교인들에겐 몇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 중 두드러진 하나가 바로 열심입니다. 미혹의 영에 빠져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은 화목과 질서의식도 대단하고 전도나 봉헌에도 정통 기독인들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입니다. 가정도 교회앞에 별거 아닙니다. 교주가 집문서를 가져오라면 즉시 바치고 이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가출을 거리낌없이 합니다. 심하면 죽이고 죽는 일에도 서슴없이 하는데 저들은 그것을 순교라고 굳게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릇된 목적은 어떤 성실과 최선도 그 목적을 정당화하질 못합니다.

 

3~4절입니다. 절박한 엘리야선지자는 어딜 둘러봐도 희망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고하고 죽기를 청합니다. 성도여러분. 정녕 극심한 고통을 당해봤습니까? 차라리 죽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이 대목에서 누가 엘리야를 비웃겠습니까? 3절 앞에 보면 엘리야는 “이 형편을 보고”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형편사정을 보면 죽음만 못한 상황이 많은 게 인생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동시에 보는 사람들입니다. 당한 상황가운데 지금 모든 것을 한 손에 쥐신 주님을 바라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내려놔야 합니다. 죽든지 살든지의 믿음 안에 들어가기 전에 사실 평강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4절의 엘리야는 그 진심이 전적인 의뢰와 극심한 좌절이 한탄으로 생명의 주께 생명을 포기하는 고백으로 봐야 합니다.

 

5~8절입니다. 지친 엘리야선지자는 천사가 갖다 준 구운 떡과 물을 먹고 힘을 차리는데 두 번씩이나 같은 내용이 되풀이됩니다. 그 후에 사십주야를 가서 호렙산에 이릅니다.

여기서 7절에 천사가 뭐라고 합니까?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도우실 때는 그 일을 마치도록 충분하게 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9~10절입니다. 우린 두 구절에서 두가지를 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질문,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이세벨을 피해 달아나 천사의 도움으로 호렙산에 숨어있는 엘리야의 처지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있어야 할 곳은 달아나 숨어있는 여기가 아니라 당당히 찾아간 이세벨 앞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엘리야선지자에게 아쉬운 게 하나가 보입니다.

그건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 반드시 죽이겠다고 했을 때 엘리야의 활동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도망가기 전이 아니라 일단 도망친 후 도착한 브엘세바 들판 로뎀나무 아래였습니다. 방금 전에 바알과 아세라를 상대로 기도전쟁을 치러 큰 승리를 한 엘리야였지만 자신의 생명위협 앞엔 당황하여 기도보다 달아나기를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 들으시기에 참으로 황당한 소인의 기도였습니다.

 

10절을 다시한번 더 읽습니다. 여기선 자신이 하나님께 특별히 열심인 이유가 모든 이스라엘백성이 언약을 버리고 제단을 헐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칼로 죽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만이라도 하나님 앞에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젠 다 죽고 자신 하나만 남았다고 합니다. 달리말해 하나님의 선지자는 이제 자신만 죽으면 이스라엘에서 한명도 없이 전멸이니 어쩌시겠습니까? 전멸하게 두시겠습니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전멸하시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에게 전멸처럼 보이는 일은 있어도 전멸은 없습니다. 완전패배로 보였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용서와 부활이란 선물로 온 인류를 구하시고 믿고 돌이키기만 하면 이루는 구원과 천국영생을 베푸셨습니다. 다 죽었고 오직 나만 남았거늘 나마져 죽이려고 한다는 엘리야의 말은 그래서 맞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품과 손 안에는 우리에게 다 보여 주지 않으신 많은 것이 있습니다.

 

11~12절입니다. 하나님의 명대로 산에 서 있는 엘리야 앞에 무엇이 나타납니까? 처음엔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숩니다. 바람 후에 지진이 납니다. 지진 후에 불이 보입니다. 이 세 가지를 먼저 보내시는 하나님은 그러나 그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의 현상 마지막 불 뒤에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은 예나 지금이나 인생들이 두려워하는 자연현상입니다. 인간의 어떤 과학도 능력도 아무 소용이 없는 하나님의 창조품들입니다. 그것을 먼저 엘리야앞으로 지나가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잘 아시는 욥기서 38장에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질문을 하시는데 도무지 사람으로서는 답할 수 없는 것들이 계속 나옵니다. 땅과 바다와 별들과 파도와 새벽의 근원이 어디서부터인지, 눈과 홍수와 우박과 가슴 속의 지혜와 수탉의 슬기는 누가 주었는지, 수많은 질문 앞에 욥은 드디어 회개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려니 했던 하나님의 수많은 권능을 깨닫는 순간 욥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바람과 지진과 불이 지나면서 드러난 하나님의 권세 앞에 엘리야는 자신의 왜소함을 비로소 인정합니다.

 

13절입니다. “엘리야가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눈여겨 보시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9~10절, 13~14절 각각 두 군데의 내용이 같습니다. 하나는 지쳐 누웠을 때이고 하나는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굴 어귀에 섰을 때라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토씨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두 번 다른 자세의 엘리야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까?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을 먼저 엘리야 앞으로 지나게 하신 뒤에 다시 같은 질문을 던지신 하나님은 자비롭고 인자하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나만 남고 다 죽었다고 하는 엘리야를 한번더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은 엘리야의 입에서 첫 번의 그 대답과는 다른 말이 나오길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같은 질문이 반복된 것입니다.

 

15~17절입니다. 아람왕을 바꾸고 이스라엘왕을 바꾸고 선지자를 바꿉니다. 이른 바 전격적인 권력구조개편이며 정권교체입니다. 다 죽고 나만 남았다는 엘리야를 포함한 물갈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하나님은 앞서 보낸 바람과 지진과 불과는 달리 아주 미약하고 세미한 작은 음성으로 엘리야를 찾아주셨습니다. 자칫 자신의 주장과 신념이 바람과 지진과 불처럼 휘몰아칠 때는 결코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 작은 소리로 뭐라 하셨습니까?너는 너만 살고 모두 죽어 이제 하나님의 종이 전멸상태라고 했는가? 내 손에는 아직도 쓸만한 자 곧 너만큼 충성스런 자가 얼마든지 있느니라.아멘.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고 입맞추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 칠천을 남기시겠다는 불변의 약속은 영존하는 하나님의 기쁨이며 하나님의 소원가운데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소망의 불입니다. 엘리야만 남고 다 죽은 줄 알았던 이스라엘에 결코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고 입맞추지 않은 성결의 하나님백성 칠천 안에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굳건히 서 있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쟁으로 불타버린 도시 한 가운데 도무지 살아날 것 같지 않은 정원의꽃나무들, 그러나 그 남겨진 뿌리와 그루터기는 더 아름답고 견실하게 자라나 씨를 맺고 퍼져갈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기독교회가 힘을 잃고 빛이 바래서 조롱거리가 된 듯해도 주님은 남겨둔 칠천의 약속을 반드시 이뤄주실 줄 믿습니다.

 

적은 숫자로 버겁고 외로운 믿음의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교회는 보이는 우리 외에 주님이 남겨두셔서 우리에게 보내실 칠천의 동지들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 약속의 동지들을 우리가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보시기 만족한 그 이스라엘의 수는 우리가 이 세상 떠난 후에도 계속 그 수를 더해갈 것입니다. 그런데 새식구 맞기에 합당한 격있는 신앙인격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간 많은 시행착오와 허물로 부끄럽고 쓰린 경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우리 안에 상처로 남아 교회성장의 귀한 밑거름이 될 줄 압니다. 더욱 낮아지고 삭아져서 돌맹이를 던져도 깊숙이 품어 소리조차 나지 않는 솜사탕 같은 저와 여러분이길 소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엘리야앞에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을 먼저 보내신 주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도 귀를 기울여 생명의 복음을 잘 받아먹는 모두되게 하옵소서.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은 계속해서 주님의 구원계획을 이뤄갈 줄 믿습니다. 우리교회 그 가운데 모두 요긴한 자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