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25. 주일낮예배<약1:2-4.부족을 채워 온전케 하는 시련>
“나는 신음한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는다.”17세기 영국의 크롬웰장군부대의 군목이었던 리챠드 백스터의 말입니다. 전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나는 신음한다. 그러나 불평은 물론 서러워하지도 외로워하지도 않겠다.”우리의 신음은 굳게 믿는 믿음을 따라 곧 감탄과 찬미예수가 되는 것을 번번이 어김없이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부족을 채워서 온전한 인내를 이루는 시련을 다룹니다. 워낙 방대한 내용이지만 간략하게 요점만을 나누며 함께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본문에는 눈여겨봐야 할 말씀이 있는데 믿음의 시련이라는 부분입니다. 2절에서 4절까지 나오는 중요한 어휘는 앞에 수식을 한 가지씩 달고 있습니다. 시험은 여러 가지 시험이고, 기쁨은 온전한 기쁨이고, 시련은 믿음의 시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는 마지막 인내도 온전한 인내라는 것입니다. 이 온전한 인내가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결론은 성도의 완성, 즉 우리 자신의 완성으로 이뤄지는 최소단위인 작은 교회들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앞에서의 자아완성, 얼마나 가슴뛰는 말입니까? 자아완성, 그것은 온전한 기쁨으로 우리를 충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만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운데 주님이 바라시는 온전한 기쁨 그것은 어떤 과정을 요구하는가?
1. 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시험입니다.
본문 2절은 시험을 "여러 가지 시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다 시험거리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떤 일이 시험거리가 되어 사람을 곤혹케 하려면 먼저 욕심과 만나 결탁해야 합니다. 시험에는 외부에서 오는 시련(試鍊:Trial)과 내면에서 오는 유혹(誘惑:Temptation)이 있습니다. 본문 헬라어 원어는 외부에서 오는 시련을 뜻합니다. 그런데 시험은 사람의 생각인 내면의 욕심에서 오는 유혹이든 외부의 환경을 통해 오든 제자리를 벗어난 모든 것들은 다 고통을 수반하게 됩니다. 즉 눈앞에 벌어진 상황과 내 예상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고통의 분량이 커집니다. 문제는 그 예상의 기대치가 늘 시험거리가 되는 것이고 현실보다 눈이 낮으면 감사요, 현실보다 기대치 곧 눈이 높으면 실망과 불평과 고통으로 남게 됩니다.
6.25사변 실전용사로부터 제가 들은 말인데 소개합니다. 두 병사가 가다가 지뢰를 밟아서 한사람은 왼발, 또 한사람은 오른 발을 동시에 크게 다쳤습니다. 한 사람은 통증가운데 크게 화를 냈습니다. 이제 평생을 절룸발이로 살 자신을 생각하며 좌절하며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감사하며 고통을 잘 참아냈습니다. 그는 다치기 바로 전날, 두 발이 모두 잘려나간 동료를 간호했기 때문입니다. 눈높이가 다른 두 사람의 반응이 행불행의 갈림길을 정한 것입니다. 그 후 불평하고 화를 내던 병사는 몰래 술을 먹다가 다리가 점점 썩어올라와 엉치밑까지 끊어냈고 한편 감사하던 병사는 발가락 두개를 제거한 뒤 이상없이 퇴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욥기(5:6-7)에선 고난은 흙에서 난 것이며 인생은 고난을 위해서(전제로) 났다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인생은 이미 고난으로 태어난 고통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죄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러서 하나님을 떠난 것이며 그 결과 죽음, 질병, 이별, 재앙, 배반, 이기심, 가난, 전쟁, 장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삶을 누구든지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거기에 성도들은 예수믿는 신앙의 양심에서 오는 거부와 충돌의 고통이 더해집니다. 우리가 예수떠난 죄가운데 있는 한, 끊임없이 밀려드는 고난의 물결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을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는 것과 같고 인간이 지구 밖으로 버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는 살았어도 영혼이 죽은 삶을 사는 불신앙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예수님 붙들고 죄와 싸워 이기는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죄로 기울어지는 육신을 때려서 하나님을 향하고자 몸부림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그렇게 지속적인 시험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그 시험의 결과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시험보는 자세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험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른 차이입니다. 시련으로 찾아오는 시험, 시련은 먼저 인내를 만들어 낸다고 본문 3절에서 증거합니다.
2. 인내를 만드는 믿음의 시련입니다.
본문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단순한 시련이 아니라 믿음의 시련이란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시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를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과 부딪치며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성도가 믿음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분명하고도 단호한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이 하는 것 다하며 살면 안됩니다. 한편 세상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것 성도는 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몸은 여전히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경건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험한 가시밭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길이요, 죽고 다시 사는 영원한 찬송의 기쁜 길입니다. 남들이 추구하는 세속적 즐거움과 안일과 쾌락 등 본성적 죄에서 떠납니다. 남들이 성가싫어하는 적절한 통제의 삶을 취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에서 비롯되는 모든 교훈과 계명을 따릅니다. 세상이 교회와 크게 구분되는 것은 인생을 백년 안에서 보는 세상의 시각과 달리 교회는 오히려 육신이 떠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이 땅의 현세에서도, 다가올 내세를 준비하는 훈련성있는 최고가치의 삶을 기뻐합니다. 슬픈 노래로 인생을 저주하지 않고 육신을 초월한 영생을 감격하며 기쁜 노래로 삶을 찬미합니다.
그 근원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청산하신 예수님의 실존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아시다시피 죽음조차 사랑으로 정복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공급하신 우리의 구세주,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시련들은 오직 잘 참고 견디는 것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인내를 온전한 인내라고 함으로 참되 끝까지 참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옛말에 참을 忍자 세 개 모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고 서양엔 끝까지 참는 자가 세상을 차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내하되 마지막까지 인내하는 것이 온전한 인내입니다. 끝까지 참지 못하면 그간 참은 것은 참은 것이 아니라 벼르고 벼른 것이 되고 맙니다.
믿음을 잘 지키기 위한 시련들은 인내로서 맞설 수밖에 없으며 결국 그렇게 훈련된 인내는 화평을 이루어 교회를 세움으로 하나님의 나라운동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3. 온전한 인내는 부족함이 없게 합니다.
십년째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여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지질대로 지쳐서 우리식구들은 택한 자들이 아닌 가보다 생각하여 기도를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집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자기 가족의 영혼구원을 위해 23년간이나 기도하여 응답받아 온 식구가 잘 믿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다시 힘을 내어 기도했습니다. 3년이 지나 14년이 되자 기도는 응답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물만 파면 물이 솟는 어떤 이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물이 나올 때까지 파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샘을 파되 구원의 생수가 솟을 때까지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다만, 평생 한 우물만 파라는 말에 온 인생 다 바쳐 마른 샘을 파는 일은 결코 없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누구는 미련하게 참아서 망했습니다. 제가 분이 올라와 참느라고 너무 힘들었고 지금도 그 이름이 떠오르면 그게 스트레스입니다. 기도하는 우리에게 그런 어리석은 인내는 없을 줄 압니다. 바른 분별로 잘 인내하는 것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요약해 봅니다.
1) 인내는 기도응답을 받는 비결입니다. 시40:1편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고 증거합니다.
2) 인내는 영혼을 얻습니다. 눅21:19절입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3) 인내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히10:36절입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4) 인내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합니다. 계3:10절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5) 인내는 형통을 이룹니다. 시37:절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 가지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듭니다. 그리고 인내는 모든 부족을 채우는 능력이 되어 온전한 성도를 세워 갑니다. 저와 여러분. 여러 가지 믿음의 시련이 있습니까? 삶의 질고가 있습니까? 박차고 일어나 까부실 것이 아니라면 받은 영생과 구원에 감격하며 잘 참아내기 바랍니다. 그렇게 잘 참아내어 우리가운데 부족한 모든 것이 온전케 채워지는 풍성이 있길 예수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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