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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4.04.06. 주일예배<창26:26-33. 언약백성의 선한 권세>

by 설렘심목 2014. 4. 6.

2014.04.21. 주일예배<창26:26-33. 언약백성의 선한 권세>

 

한 인간이 태어날 때 이미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여러 가지 남과 다른 특성들로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 시간 관심 갖는 것은 언약이라는 은혜 안에서 태어나는 언약백성과 그와는 달리 언약 밖에서 태어나는 불신자의 인생입니다. 먼저 우리가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을 끝까지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열어 보여주시진 않습니다. 또 보여줘도 모릅니다. 마치 돌배기 애기가 아빠의 깊은 속을 다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많이 아는 것 같아도 분명한 건 너무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두뇌와 가슴으로 해석되지 않는 것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과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드러난 것보다는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모든 세상의 섭리가 그렇게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것들에 의해 움직여 가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생각할수록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작고도 오묘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걸작인 인간과 인생이 어떻게 창조되었든지 그래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 앞에 헤아림을 멈추고 즉시 엎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요한 중에 그분이 우릴 만나주시기 소원해야 합니다. 그분과 끊임없는 교통을 통해 그분의 거룩하심 안에 들어가며 그분과의 교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고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감동할 수 있는 것은 하필이면 이토록 부족한 내가 구원받아 이 기쁨과 은혜의 바다에 마음껏 노래하며 누릴 수 있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이 깊은 믿음가운데 충만해지면 어떠한 불행도 재해석되어 진실한 믿음 앞에 무력해 집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삭의 만복은 언약백성의 자녀가 일상적인 삶에서 흔히 겪는 영의 권세입니다. 영권이라고 부르는 이 숨은 힘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가운데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그 영의 권세는 언약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언약에 근거한 순종은 약속을 붙잡고 겸손한 능력입니다. 풍성한 약속은 부요 그 자체이며 부요한 자는 여유있게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언약은 어떠한 것인지 알아보는 가운데 함께 은혜를 나누기로 합니다.

 

1. 언약은 동행을 보장합니다.

 

본문 26:28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고 그랄 왕 아비멜렉이 고백합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의 임마누엘 지저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다른 세상사람들이나 지체들이 대신 증거해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랄 왕은 그래서 자신들이 핍박을 해서 멀리 떠났던 이삭가문을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인 군대장관 아비훗과 함께 왔습니다. 군대장관과 함께 왔다는 건 화친 중에도 국방력을 담보로 하는 비중있는 화친입니다. 결코 서로 침략하지 말자는 굳은 언약이 공격과 방어를 담당한 군대의 명예를 걸겠다는 것입니다. 그랄왕이 이삭에게 국방부장관까지 대동하고 찾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 하나,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시는 걸 봤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안에 내놀만한 게 변변찮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모든 것을 쥐고도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들보다 뛰어난 삶이요, 승리한 삶인 줄 믿습니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보아 이삭의 힘은 그랄왕에 비길 게 못 됩니다. 약소한 소수의 가문입니다. 그랄왕은 자신의 군대들이 툭하면 이삭의 우물을 막으며 못살게 굴어 미안함을 느껴 찾아온 게 아닙니다. 이삭의 무리들이 그랄군대의 등살에 멀리 밀려나도 여전히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분명히 본 그랄왕은 상당한 위축감과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힘이 센 거친 친구가 있습니다. 나약하고 순진한 아이에게 집적대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힘센 친구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 아이만 건들면 무슨 사고가 터지고 하다못해 그 아이를 툭 쳤는데 팔이 부러지는 겁니다. 힘센 친구는 오랜 경험 끝에 이 아이는 건들면 무조건 손해란 걸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이좋게 지내기로 마음을 굳혔더니 그때부터 무슨 일이든 풀리는 것이었습니다. 내친김에 힘센 친구는 약한 친구에게 찾아가서 우리 친구가 되자고 하기에 이릅니다. 이삭의 형통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며 그 언약의 주체가 이삭의 아비 아브라함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에 뵈는 배경보다 참으로 위대한 능력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입니다.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뒤 그 크신 손으로 인생의 걸음을 지도하시고 세상을 주장하고 조절합니다. 이 하나님의 손이 구약과 신약의 엄숙한 언약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손을 꼭 붙잡으신 줄 믿기 축복합니다.

 

2. 언약은 복의 시작입니다.

 

본문 26:30절을 봅니다.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아멘.

 

이삭은 하나님의 동행으로 강한 상대로부터 오히려 화친요구를 받았고 이삭도 평강 중에 그들과 먹고 마셔 잔치를 나눕니다. 서로 도우며 형제처럼 지내기로 기쁜 맹세를 하며 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동행을 보장했고 하나님의 동행은 깨어진 관계를 치유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전어록 복습입니다. 복중에 가장 큰 복은 관계의 복이고 그 관계의 복에서 최고의 복은 깨닫는 복입니다. 그것은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믿음의 복입니다. 반면 눈에 뵈는 현실적인 복중에 가장 큰 복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관계의 복입니다. 관계중 가장 큰 관계요, 근본적인 관계는 무엇이라고요? 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만 바로 세워지면 모든 인간관계가 제자리에 돌아와 얽혔던 것들이 하나하나 풀리기 시작합니다. 이삭은 그간 골칫거리였던 그랄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동행으로 깨끗하게 풀어졌습니다.

 

사랑하는 비전인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해결하신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부담은 다만 믿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 보혈이 저와 여러분의 죄를 모두 감면해주셨습니다. 이젠 죄로 치를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모셔드리면 됩니다.

이 눈에 뵈지 않는 관계의 복이 열리면 다음에 따라오는 복이 눈에 뵈는 물질의 복입니다. 32절입니다.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드디어 파기만 하면 메우던 우물이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복된 우물, 기쁨의 우물, 세바가 되었습니다. 세바는 일곱인 세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만족하신 상징적 수입니다. 하나님이 언약하시고 거기에 근거하여 동행해 주심으로 주변의 대적들이 먼저 찾아와 화평을 이룬 증거가 우물 세바입니다. 이래서 태어난 우물이름이 브엘세바입니다. 브엘은 우물이란 뜻입니다. 말하자면 럭키세븐의 우물입니다. 하나님이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동행을 기념한 우물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운데 한 사람도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험한 길을 외롭게 가는 이가 없기를 바랍니다. 이미 예수그리스도로 이뤄진 언약이 동행을 약속했습니다. 우린 이미 우리가 알던 모르던 주님께서 동행해 주고 계십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영의 생명력이 약하면 감각하지 못하고 감각하지 못하면 고백도 없고 고백이 없는 사랑은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동행은 우리가 믿어 신뢰해드리는 만큼 놀라운 증거를 우리에게 주시기 기뻐하시는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능력은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몫은 주님의 능력과 자비로우심으로 하는 동행을 철저히 믿어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언약 중에 사랑으로 동행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의 남은 모든 날들이 오직 말씀 안에서 깨닫고 이미 열린 관계의 문에 적극적으로 담대히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간섭과 통치와 인도가 그치지 않는 참으로 복된 가정과 개인과 생업의 현장되기 예수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